암표가 2600만원? 브로드웨이 최고 히트작 ‘해밀턴’, 어떤 작품일까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9.08.22 13:09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8.22 13:14

2009년, 미국의 한 작곡가가 백악관에서 짧은 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의 이름은 린 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 2008년 뮤지컬 <인더하이츠>를 직접 작곡·작사하고 출연까지 한 다재다능한 젊은 창작자였다. 그런데 그는 히트작인 <인더하이츠>의 노래 대신 준비 중인 신작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가 노래를 시작하자 객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곡이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에 대한 ‘랩’이었기 때문이다.

2009년 린 마누엘 미란다가 백악관에서 <해밀턴>의 ‘Alexander Hamilton’을 공연한 영상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은 미국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이다. 미국인들에겐 10달러 지폐 속 초상화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니 관객들이 웃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로 랩을 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을 테니. 어찌 됐든 미란다는 진지한 태도로 곡을 마쳤다. 처음엔 웃음을 터뜨렸던 관객들도 곡이 끝나자 미란다의 열정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들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역사를 새로 쓸 작품, <해밀턴>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알렉산더 해밀턴|위키피디아

미란다는 론 처노(Ron Chernow)가 쓴 해밀턴의 전기를 우연히 읽고 뮤지컬을 구상하게 되었다.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미란다는 해밀턴 또한 카리브해의 네비스 섬에서 태어났다는 점에 이끌렸다. 사생아로 태어나 미국 유학길에 오르고, 조지 워싱턴의 오른팔로서 미국 건국을 이끌고, 미국의 초대 재무 장관을 맡고, 권총 결투에서 아들을 잃고 그 자신도 정적(政敵)인 에런 버(Aaron Burr)와의 결투에서 목숨을 잃기까지. 해밀턴의 그 파란만장한 인생과 어마어마한 야망은 미란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미란다에게 <해밀턴>은 힙합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보여줄 기회이기도 했다. 해밀턴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썼던 수많은 글과 정치인들이 벌였던 설전이 랩으로 풀어내기 딱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백악관 공연으로 쏟아지는 관심을 받은 후 <해밀턴>의 공연화는 차근차근 진행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1월 오프브로드웨이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작곡과 작사를 한 미란다가 직접 해밀턴 역으로 출연까지 했다. 신선하고 잘 만든 신작이 탄생했다는 소문에 공연은 연일 매진되었다. 같은 해 7월 곧바로 브로드웨이의 리처드 로저스 극장에 입성했는데, 입소문 덕에 개막하기도 전에 이미 3000만 달러(한화 약 360억 원)어치 티켓이 팔려나갔다고 한다.

뮤지컬 <해밀턴> 공연 장면(왼쪽)과 <해밀턴>이 공연 중인 리처드 로저스 극장|Joan Marcus, 올댓아트 정다윤

이듬해 <해밀턴>은 토니상에서 무려 16명의 후보를 배출했다. 70년 토니상의 역사에서 최다 노미네이트 기록이었다. 백악관에서 <해밀턴>의 탄생을 지켜봤던 오바마 부부가 시상식에서 직접 영상을 통해 작품 소개 멘트를 해주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뮤지컬 작품상을 포함해 11개의 상을 거머쥐었고, 연이어 그래미상과 퓰리처상까지 휩쓸었다. 2016년은 그야말로 <해밀턴>의 해였다.

2016년 토니상 <해밀턴> 축하공연 영상

개막한 지 4년이 지난 2019년 현재도 <해밀턴>의 인기는 전혀 식지 않았다. 그 인기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 티켓 가격일 것이다. 대부분의 대극장 뮤지컬이 6만~15만 원 선에서 정해지는 우리나라와 달리 브로드웨이에선 작품별, 시즌별 수요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해밀턴>의 경우 가장 좋은 좌석의 가격이 849달러(약 102만 원)이다. 암표가 아닌 공식 홈페이지에서 판매하는 정가로 말이다. 3층 꼭대기의 제일 구석 자리에서 보더라도 199달러(약 24만 원)는 줘야 한다. 사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미란다가 해밀턴 역으로 직접 출연하는 마지막 공연의 암표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라 2만2000달러(약 2600만 원)을 호가했다고 하니 말이다!

때문에 뉴요커들조차 보기 쉽지 않은 공연이 <해밀턴>이다. 이에 <해밀턴> 측에서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Ham4Ham’이란 이벤트를 만들었다. 풀어쓰면 ‘Hamilton for Hamilton’, 즉 (해밀턴의 초상화가 그려진) 10달러에 <해밀턴>을 볼 수 있는 추첨 제도다. 처음엔 추첨을 극장 앞에서 오프라인으로 진행했다. 추첨에서 떨어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극장 앞에서 배우들이 팬 서비스 차원의 짧은 공연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뉴욕 최고의 인기작인지라, 나중에는 이 짧은 공연이라도 보기 위해 매일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결국 안전사고를 우려해 추첨은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온라인 추첨의 첫날엔 단 20여 장의 할인 티켓을 위해 5만 명의 사람들이 접속해 서버가 터질 정도였다고.

리처드 로저스 극장 건너편에 자리한 <해밀턴> MD숍|broadwaymerchandiseshop.com/stores/hamilton/

티켓이 없어도 팬들의 뜨거운 열기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해밀턴>이 공연되고 있는 리처드 로저스 극장의 길 건너편에 자리한 <해밀턴> MD 숍이다. 브로드웨이에선 티켓 소지자만이 극장에 입장할 수 있기 때문에, 티켓이 없어도 <해밀턴> 관련 상품을 사고 싶어 하는 팬들을 위해 따로 상설 매장을 마련한 것이다. 이곳에선 프로그램북, OST, 티셔츠, 배지는 물론이고 실제 해밀턴과 관련된 서적이나 오리지널 캐스트의 한정판 사진 등 다양한 MD를 판매한다.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OST를 따라 부르는 팬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그 방대한 가사를 다 외워 랩을 따라 하는 모습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해밀턴>의 인기는 뉴욕에서 그치지 않았다. 2016년엔 시카고에서 개막했고, 그 이듬해엔 전미 투어도 시작되었다. 영국 웨스트엔드에선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11년간 공연됐던 빅토리아 팰리스 극장을 <해밀턴>이 2017년 물려받았다. 2019년 4월엔 시카고에서 <해밀턴>을 다룬 전시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2020년엔 독일 함부르크에서, 2021년엔 호주 시드니에서 개막이 예정되어 있다.

해밀턴이 그려진 10달러 지폐|위키피디아

<해밀턴>의 인기가 뮤지컬 마니아 사이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또 있다. 2015년 미국 재무부는 10달러 지폐의 초상화를 해밀턴에서 다른 여성 위인으로 바꿀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뮤지컬 덕에 실제 해밀턴에 대한 인기 또한 치솟자 이 계획은 무산되었고, 해밀턴은 그대로 10달러 지폐에 남아있게 되었다. 대신 20달러 지폐가 앤드루 잭슨(미국의 7대 대통령)에서 노예 해방 운동가인 해리엇 터브먼으로 변경될 예정이라고.

그렇다면 <해밀턴>은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음악이 정말 좋기 때문이다. 뮤지컬을 보지 않아도 힙합이나 팝 음반을 듣듯 OST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음악 자체로 완결성과 중독성이 있다. <해밀턴> OST가 빌보드 3위까지 올라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음악성이 소문난 만큼 유명 아티스트들과 컬래버레이션 한 앨범도 냈는데, 알리샤 키스, 존 레전드, 시아, 어셔, 켈리 클락슨 등 참여한 뮤지션들의 이름만 들어도 어마어마하다. ‘해밀턴 믹스테이프’란 제목의 이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켈리 클락슨이 부르는 ‘해밀턴 믹스테이프’의 ‘It’s Quiet Uptown‘

그러나 <해밀턴> 음악의 정말 대단한 점은 단순히 멜로디가 좋을 뿐만 아니라 뮤지컬 넘버로서의 기능을 완벽하게 해낸다는 데에 있다. 지금까지 힙합 뮤지컬을 시도한 사람은 많았지만 <해밀턴>의 완성도에 도달한 작품은 많지 않았다. 반면 미란다는 힙합에도,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문법에도 정통했다. <해밀턴>에서 랩은 그저 ‘힙’한 분위기를 더해주는 보조적 수단이 아니라 인물을 소개하고, 사건을 전개시키고,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해밀턴이 부르는 첫 곡인 ‘My Shot’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다. 야망에 굶주린 해밀턴의 성격을 그린 이 곡은 잘 쓴 랩인 동시에 정석적인 ‘아이 원트 송(I Want Song, 뮤지컬에서 주인공의 주요한 욕망과 목표를 보여주는 곡)’이다. 이 곡은 작품 내내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해밀턴이란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해밀턴>의 ‘My Shot’

힙합이라는 장르가 작품의 주제와 잘 맞아떨어진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다. 얼핏 보기엔 18세기 역사적 인물과 힙합이라는 장르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해밀턴이 당시 미국 사회에서 아웃사이더로 시작해 혁명에 몸을 던졌던 인물임을 생각하면, 저항의 음악인 힙합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가 없다. 고루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역사적 인물들에게 동시대의 음악을 입힘으로써 이들을 현대에도 공감할 수 있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만든 것이다.

정통 브로드웨이 뮤지컬 문법에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입힌 것. <해밀턴>이 기존 뮤지컬 관객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뮤지컬 극장과 거리가 멀었던 젊은 세대까지 모두 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뮤지컬 <해밀턴> 공연 장면. 제퍼슨(왼쪽)과 해밀턴이 랩 배틀을 벌이고 있다.|Joan Marcus

이 모든 음악을 혼자 작곡·작사한 미란다는 그 천재성을 인정받아 수많은 곳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디즈니인데, 미란다는 <모아나>의 음악을 작곡하고 <메리 포핀스 리턴즈>에 출연한 데 이어 <인어공주> 실사판의 음악을 맡게 됐다.

음악만큼이나 중요한 <해밀턴>의 두 번째 인기 비결은 바로 캐스팅이다. 스타가 출연해서 잘 됐다는 뜻이 아니다. <해밀턴>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비백인(非白人) 배우들이 연기한다. 오리지널 캐스트 중 해밀턴은 라틴계인 미란다가, 해밀턴의 아내인 일라이자는 아시아계 배우 필리파 수(Phillipa Soo)가, 일라이자의 언니인 안젤리카는 흑인인 르네 엘리스 골즈베리(Renee Elise Goldsberry)가 맡았다. 이 배우들이 하차한 뒤에도 해당 배역들은 오디션에서부터 비백인 배우가 맡을 것이 명시되어 있다. 유일하게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배역은 악역인 영국의 조지 왕뿐이다.

뮤지컬 <해밀턴> 공연 장면. 왼쪽이 일라이자 역의 필리파 수, 가운데가 안젤리카 역의 르네 엘리스 골즈베리|Joan Marcus

사실 브로드웨이에서 기존에 백인들이 맡던 배역을 다른 인종의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이제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해밀턴>처럼 실제론 백인이었던 실존 인물들을 비백인 배우들이 맡는 일은 이례적이다. 미란다는 이러한 캐스팅의 이유를 “이것(다양성)이야말로 오늘날 미국의 모습”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백인들의 전유물로만 느껴졌던 낡은 역사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오늘날의 관객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해밀턴>의 이런 메시지는 이민자와 인종적 소수자를 배제하는 트럼프 정권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2016년 11월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해밀턴>을 관람하러 갔는데, 이 날 공연에선 그의 존재를 의식한 관객들이 ‘Immigrants, we get the job done(우리 이민자들은 맡은 일을 다 해내지)’라는 가사에서 격렬한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에선 배우 브랜든 딕슨이 펜스를 향해 “당신의 행정부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이 공연이 당신에게 미국의 가치를 일깨워줬기를 바란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트위터 캡처

이에 트럼프는 “<해밀턴>이 펜스를 모욕했다”고 트윗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BoycottHamilton(해밀턴을 불매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물론 당시 <해밀턴>은 몇 개월치 티켓이 매진된 상태라 불매를 할래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어찌 됐든 <해밀턴>은 지금까지도 매일 저녁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다. 미국은 이민자들에 의해 건국된 나라라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핫한 작품인 만큼 한국의 뮤지컬 팬들이 가장 국내 공연을 소망하는 작품 중 하나지만, 미국 독립사라는 다소 낯선 소재와 번역이 어려운 랩 때문에 가장 라이선스 공연이 성사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2021년 호주 공연 후에 아시아 투어가 진행된다는 소문도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발표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 뉴욕이나 런던 등 <해밀턴>이 공연되고 있는 도시를 방문한다면 꼭 놓치지 말고 보도록 하자. 높은 티켓 가격을 감수할 만한 공연이다. 다만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하는 게 아니라면 예습은 필수다. 검색을 통해 번역된 가사와 역사적 배경지식을 숙지하고 가면 몇 배는 더 깊이 있게 <해밀턴>을 즐길 수 있다.

■ 뮤지컬 <해밀턴>
2015.07.13 ~ 오픈런
미국 브로드웨이 Richard Rodgers Theatre

뉴욕 |올댓아트 정다윤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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