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년 7월,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센트럴파크 인근에 위치한 뉴욕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바로 근처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고대부터 근대를 아우르는 인류의 문명사를 폭넓게 다룬다면, 구겐하임은 현대미술을 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품과 상관없이 건축물 그 자체로 문화유산에 등재됐다는 사실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독특한 생김새로 유네스코 등재 전부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건축물’로 손꼽히곤 했다. 바깥에서 보면 꼭 하얀 달팽이 껍데기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그 내부는 더더욱 아름답다. 자연광이 쏟아지는 중앙의 채광창을 중심으로 나선형 구조의 경사로가 둥글게 이어진다. 이런 구조 덕에 구겐하임은 그 어느 미술관보다도 관람 동선이 간단하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필요 없이 경사로만 쭉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사각형의 전시공간을 거부한 이 형태는 당시 미술계에서 파격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이 독특한 디자인은 누가 생각해냈을까.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사람은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함께 ‘근대 건축의 3대장’으로 불리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다. 그는 건축물이 주변 자연환경 및 사용자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유기적 건축’ 개념을 만들었다. 자연 폭포가 집을 관통하게 설계한 ‘낙수장’이 대표적인 예인데, 구겐하임의 디자인 역시 관람객이 가장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건축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라이트와 구겐하임 미술관의 인연은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국의 거부이자 자선사업가인 솔로몬 R.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의 현대미술 컬렉션에서 출발했다. 구겐하임 가문은 1847년 미국에 정착한 스위스계 유태인 집안으로, 광산업을 통해 대부호가 됐다. 솔로몬 R. 구겐하임은 이민자 1세대인 마이어 구겐하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동생인 벤자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은 1911년 타이타닉에 승선했다가 침몰 사고로 사망했는데, ‘신사답게 차려입고 최후를 맞겠다’고 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벤자민 구겐하임의 딸이자 솔로몬 R. 구겐하임의 조카인 페기 구겐하임(Marguerite “Peggy” Guggenheim)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고 방황하다가 예술 작품을 통해 위안을 찾았다. 그는 ‘미술 중독자’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작가들을 후원하고 미술품을 수집했는데, 그중에서도 잭슨 폴록을 발굴하고 후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많은 소장품 중에서도 페기 구겐하임이 기증한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다시 라이트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라이트는 1943년 구겐하임 미술관의 첫 관장이었던 힐라 본 르베이(Hilla von Rebay)의 편지를 받고 미술관의 디자인을 맡게 됐다. 라이트는 당시에도 이미 70대였는데, 본격적인 공사는 13년이 지난 1956년에야 시작되었다. 행정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미술계의 반발에까지 부딪혔기 때문이다. 벽이 평평해 미술작품을 걸기에 적합하지 않고, 작품이 그저 건축물의 장식품으로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구겐하임엔 자신의 작품을 걸지 않겠다는 작가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미술관은 1959년 10월 완공되었다. 라이트가 자신의 가장 큰 유산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후였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디자인은 아직도 종종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들의 원성을 사곤 한다. 그러나 뉴요커들과 전 세계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건축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주제가 ‘위아래 vs 아래위’다. 나선형 경사로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관람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야 할 것인가 하는 논쟁이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구겐하임 미술관의 구조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구겐하임은 나선형의 메인 공간인 ‘로툰다’와 계단·엘리베이터로 연결된 ‘타워’, 그리고 ‘스몰 로툰다’로 구성되어 있다. 로툰다에선 기획전이, 타워에선 상설전이 열리고, 스몰 로툰다에는 카페와 기념품점 등이 위치해 있다.
처음 라이트의 의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툰다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뒤 아래로 내려가면서 전시를 관람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기획전은 1층에서부터 관람하도록 기획되고 있다. 매표소와 인포메이션 등이 모두 1층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로툰다의 1층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기획전을 관람하고, 그 후에 타워로 이동해 아래로 내려가며 상설전을 관람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동선이라 할 수 있겠다.
상설전에선 칸딘스키, 모딜리아니, 샤갈, 피카소, 툴루즈 로트렉, 드가, 마네, 고갱 등 현대미술에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기획전으로는 ‘Artistic License: Six Takes on the Guggenheim Collection’이 2020년 1월 12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여섯 명의 컨템퍼러리 작가들에게 원하는 주제를 하나씩 정해 구겐하임 컬렉션으로 전시를 기획하도록 한 것인데, 차이 구어 치앙(Cai Guo-Qiang), 폴 챈(Paul Chan), 제니 홀저(Jenny Holzer), 줄리 머레투(Julie Mehretu), 리처드 프린스(Richard Prince), 케리 메이 윔스(Carrie Mae Weems) 여섯 작가 각각의 가치관과 안목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운 전시였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선 다양한 투어와 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하고 있는데, 그중 눈여겨볼 만한 것이 ‘유모차 투어(stroller tour)’다. 유모차를 탄 유아와 보호자가 함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전시 해설을 듣는 프로그램이다. 매달 둘째 주 화요일에 12팀씩 신청을 받는데, 거의 매번 예약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참여하는 유아들은 대부분 생후 6개월에서 24개월 사이다.
만 2살도 안 된 아이들이 미술관에 오면 뭘 얼마나 이해하겠느냐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 교육만이 이 투어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평소 아이 맡길 곳을 찾기 힘들어 문화생활을 즐기지 못했던 부모들이 편하게 미술관을 방문하고, 다른 부모들과 소통하는 자리를 제공하는 것 또한 구겐하임이 유모차 투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다.
실제로 투어 해설도 부모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과 아이들을 위한 설명이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설명 내용도 정보를 주입하기보다는 가족끼리, 그리고 다른 부모들끼리 서로 감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전시를 함께 관람하는 동안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낭독이나 교구를 활용한 감각 놀이도 함께 병행된다. 작품을 만지려고 하면 주의를 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술관 예절도 배울 수 있다. 어려서부터 미술관 환경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자연스럽게 미술관을 자주 방문한다고 한다. 미술관 측에선 잠재 고객 개발 효과도 가져가는 셈이다.
휘트니 미술관 등 다른 뉴욕의 미술관에서도 유모차 투어를 진행하지만, 구겐하임의 유모차 투어에는 몇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 우선 계단이 없는 경사로 구조 덕에 유모차를 끌고 다니기 매우 편하고, 전시 동선이 간단하기 때문에 아이를 달래거나 화장실에 가느라 뒤처지더라도 쉽게 투어에 다시 합류할 수 있다.
무엇보다 휘트니 미술관의 경우 일반 개장 전 이른 아침에 유모차 투어를 진행하는 데 반해, 구겐하임에선 보다 접근성 좋은 시간대인 오후 3~4시에 일반 관람객들과 한데 섞여 투어를 진행한다. 만 2세 이하의 유아들이니 당연히 울기도 하고 칭얼대기도 한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불평하는 관람객은 없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많기 때문인지, 미술관을 조용하고 엄숙한 어른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투어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미술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유모차 투어를 통해 어린이와 문화공간을 함께 향유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노키즈존’이 여전히 뜨거운 감자인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큰 투어가 아닐까 싶다.
구겐하임은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등을 제외한 모든 날에 개장한다.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8시까지는 정해진 입장료 대신 자신이 원하는 만큼 내고 입장할 수 있다. (입장료 정가는 성인 25달러, 학생과 65세 이상은 18달러, 12세 미만의 어린이는 무료.) 뉴욕 시티패스 등 패스를 활용하면 할인된 가격에 입장 가능하다. 미술관 바로 길 건너편에 센트럴파크와 호수가 있으니, 날씨 좋은 날 방문해 아름다운 풍경까지 함께 즐겨보면 어떨까.
자료 제공 |뉴욕 관광청/NYC & Company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