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9.09.25 13:37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9.25 13:55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 나오는 사건들, 실화일까?

※이 글에는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가 4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뮤지컬 <엘리자벳> <모차르트!> <레베카> 등을 만든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와 극작가 미하엘 쿤체 콤비의 또 다른 대표작입니다. 프랑스의 왕비였지만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생과, 혁명을 주도한 가상인물 마그리드 아르노의 삶을 대조시키며 그려내는데요.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공연 장면|EMK뮤지컬컴퍼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왕비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오스트리아 출신입니다. 175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명목상의 황제는 남편인 프란츠 1세였지만, 실권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었습니다)의 15번째 아이로 태어났죠. 1770년, 마리는 열네 살의 나이에 루이 16세와 결혼하여 고향을 떠나 프랑스의 베르사유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위 기간 중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1793년 37살의 나이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맙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생전은 물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제입니다. 생전엔 루머와 조롱을 담은 팸플릿에서, 사후엔 뮤지컬을 비롯해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2006) 등 수많은 창작물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만큼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실제와 다른 오해나 왜곡, 각색으로 얼룩져있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이야기되는 마리의 삶은 얼마나 사실과 가까운지 한 번 알아보았습니다.

“프랑스 국경에서 옷을 모두 벗어야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13세일 때 프랑스와의 혼담을 위해 그려진 초상화.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가 이미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시점부터 시작됩니다. 이전의 삶은 첫 넘버에서 짧게 요약만 되죠. 그중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 있으니, 바로 마리가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시집 올 때 국경에서 발가벗겨져야 했다는 것인데요. 이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혼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거쳐야 했던 의식이 바로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입고 온 모든 옷을 다 벗고 프랑스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었죠.

프라이버시가 없는 왕족의 삶은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첫 딸을 출산할 때는 당시 관례에 따라 왕족들과 귀족들이 모두 몰려와 구경을 했는데요. 창문이 꽉 닫힌 방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왕비는 질식 위기까지 갔다고 합니다. 이후 루이 16세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 출산하는 방에 들어가도록 제한했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로 잘 알려져 있는 문장입니다. 백성들의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말이 공분을 사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인데요.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장 자크 루소의 자서전인 <고백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느 고귀한 공주가 “농민들에게 빵이 없다면 브리오슈를 먹으라고 하세요”라고 말했더라는 대목인데요. 루소는 이 공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이 일화 자체도 그냥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공연 장면|EMK뮤지컬컴퍼니

뿐만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는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사치가 심각한 왕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물론 검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다른 왕비들과 비교했을 때 평균 수준이었고, 프랑스 왕실 예산의 10%밖에 쓰지 않았죠. 또한 게으르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면은 있었지만 냉혈한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다친 농민의 아이를 발견하고 베르사유로 데려가 씻기고 먹여줬다는 일화도 유명하죠. (물론 구조적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게 아닌 일회적이고 시혜적인 선행에 그쳤다는 것이 그의 한계이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로 알려진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시 만인의 ‘욕받이’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들은 정부(情婦)를 두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러한 정부들은 ‘부도덕의 아이콘’으로서 대중들이 분노를 쏟아내는 표적이 되곤 했는데요. 루이 16세는 숫기가 없고 여자에 관심이 없어 정부를 두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비난의 화살이 향한 것이죠. 게다가 마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오랜 적국이었으니,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었던 셈입니다. 당시 마리에 대한 비난과 루머를 담은 팸플릿이 횡행했는데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도 그런 루머 중 하나였다고 하네요. 뮤지컬에서는 마리가 아닌 왕실 의상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과 헤어드레서 레오나르가 이 대사를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로즈와 레오나르, 실존 인물일까?”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중 레오나르(왼쪽)와 로즈 베르탱|올댓아트 정다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 스틸러라고 하면 의상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과 헤어드레서 레오나르를 꼽을 수 있겠는데요. 만화적인 비주얼과 코믹한 톤 때문에 ‘감초’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 또한 실존 인물에 기반한 캐릭터입니다.

로즈 베르탱과 레오나르는 자수성가한 디자이너와 헤어드레서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눈에 띈 후 1770년대 파리 패션의 유행을 선도하며 베르사유 안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죠. 로즈 베르탱은 파리뿐만 아니라 런던, 베니스, 빈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의 고객들을 상대로 드레스를 판매했고, 레오나르는 오페라 애호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움을 받아 극장을 설립하기까지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두 사람은 프랑스를 떠나 영국, 독일 등지로 몸을 피했습니다. 이후 혁명의 불씨가 사그라든 후 다시 돌아와 60대에 세상을 뜰 때까지 쭉 파리에서 살았죠. 로즈 베르탱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은 후에도 패션 사업을 이어나갔는데요. 패션 트렌드의 변화로 인해 혁명 전만큼 번성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마리와 페르젠의 러브스토리도 실화?”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마리의 하나뿐인 사랑으로 등장하는 한스 악셀 폰 페르젠 백작 역시 실존 인물입니다. 페르젠은 스웨덴의 귀족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1774년 가면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당시 열여덟 살로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점차 친밀해졌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다만 마리에 대한 페르젠의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뮤지컬에서처럼 페르젠은 혁명의 불길이 거세지자 왕과 왕비의 도주를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러나 ‘바렌 도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났고, 왕실에 대한 불신과 분노만 커지게 되어버렸죠.

실제 페르젠의 초상(왼쪽),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중 마리와 페르젠|올댓아트 정다윤

1793년 브뤼셀에서 마리의 처형 소식을 들은 페르젠은 크게 슬퍼했습니다. 이후 죽을 때까지 평생 마리를 애도하며 결혼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7년 후인 1810년, 그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 못지않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습니다. 덴마크 왕자를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군중들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것인데요. 몇 달 후에 누명은 벗겨졌고 페르젠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고 합니다.

“목걸이 사건은 오를레앙 공작의 소행?”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1막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목걸이 사건’.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매했다고 거짓으로 꾸민 뒤 목걸이를 가로챈 사기극인데요. 뮤지컬에선 오를레앙 공작과 마그리드가 왕비의 평판을 훼손시키기 위해 이 사건을 고의적으로 꾸며낸 것으로 나옵니다.

‘목걸이 사건’의 원흉이 된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모조품(왼쪽),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중 오를레앙 공작과 마그리드|올댓아트 정다윤

그러나 실제론 가상인물인 마그리드는 물론이고 오를레앙 공작 또한 이 사건과 큰 관련이 없었습니다. 사건의 주범은 이 목걸이를 탐냈던 라모트 백작부인인데요. 그는 목걸이를 얻기 위해 평소 왕비의 신임을 얻고 싶어 했던 로앙 추기경을 끌어들였습니다. 왕비가 목걸이를 사고 싶어 하지만 금액이 비싸 몰래 구입하고자 하니 추기경이 대신 구입해 전달해달라고 속인 것이죠. 추기경은 목걸이를 할부로 구입하고 밤늦게 마리 앙투아네트를 몰래 만나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리 앙투아네트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백작부인이 고용한 매춘부였습니다. 목걸이는 백작부인의 손에 넘어갔고, 분해되어 이곳저곳에 팔리게 되었죠.

사건의 전말은 보석상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목걸이 대금 지불을 요청하면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용당했을 뿐인 추기경은 무죄 판결을 받았고, 라모트 백작부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이 사건이 추기경을 음해하려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기극으로 소문이 나버렸고, 프랑스 왕실의 명예는 더더욱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녀는 몇 명?”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선 왕비의 자녀가 딸, 아들 한 명씩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마리 앙투아네트는 총 네 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첫 딸인 마리 테레즈는 1778년 태어났습니다. 결혼한 지 8년 만에 태어난 첫아이였는데요. 오래도록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항간에서는 루이 16세가 성 불구자라거나 마리가 동성애자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네 자녀 중 유일하게 성인까지 살아남은 자녀입니다. 프랑스 혁명 중에도 딸이라는 이유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되어 목숨을 부지했기 때문인데요.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일가족이 처형당한 후에는 오스트리아, 영국 등으로 망명하며 생활하다가, 72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총애한 궁정화가 비제 르브룅이 그린 왕비와 세 자녀들. 왼쪽부터 마리 테레즈, 루이 샤를, 루이 조제프. 루이 조제프가 가리키고 있는 요람엔 원래 막내딸 소피 엘렌이 그려져 있었지만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완성본에서는 지워졌다.

훗날 루이 17세가 되는 셋째 아이 루이 샤를은 1785년 태어났습니다. 루이 샤를은 혁명이 일어나자 어린 나이에 일가족과 함께 탕플 탑에 감금되었습니다. 혁명가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씌운 혐의 중에는 아들과의 근친상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루이 샤를은 이들의 협박에 못 이겨 이 혐의가 사실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후 루이 샤를은 차기 군주로 선포되었지만,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명목상의 군주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루이 샤를은 열악한 환경의 감옥에서 학대당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요. 이후에도 감옥에서 죽은 건 사실 평민 소년이고 진짜 루이 17세는 탈옥해서 살아있다는 루머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루이 17세라고 사칭했지만, 현대에 와서 DNA 검사를 통해 생존설은 사실이 아니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둘째 아이인 루이 조제프와 막내딸인 소피 엘렌은 각각 7살, 11개월 때 병으로 요절했습니다.

“랑발은 정말 그렇게 죽었을까?”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2막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아마 랑발의 죽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군중들이 랑발 공작부인을 죽이고 자른 머리를 나무에 꿰어 들고 행진하는 장면인데요. 끔찍하게도 이 역시 역사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실제 랑발 공작부인의 초상(왼쪽)과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랑발|EMK뮤지컬컴퍼니

랑발 공작부인은 결혼한 지 일 년 만인 19살 때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프랑스에 시집온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시게 되었는데요. 두 사람 모두 불행한 결혼생활을 겪었기 때문인지 마음이 잘 맞아 절친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폴리냑 백작부인에게 왕비의 총애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끝까지 왕비의 곁을 지킨 것은 랑발이었습니다. (폴리냑 백작부인은 혁명이 일어나자마자 왕비를 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했습니다. 레아 세이두와 다이앤 크루거가 나오는 영화 <페어웰, 마이 퀸>이 이 사건을 다루고 있죠.)

그러나 왕비에 대한 충심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1792년 랑발은 왕비와 함께 투옥되었고, 같은 해에 왕실을 비난하도록 강요당했으나 거부하자 끔찍하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때 랑발뿐만 아니라 1300여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는데요. ‘9월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혁명에 대한 회의와 공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형 직전 진짜로 머리가 하얗게 셌을까?”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직전 모습을 그린 일러스트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장면에서 마리는 흰 가발을 쓰고 등장하는데요. 이는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기 며칠 전 머리가 백발로 변했다는 증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라는 말도 생겼는데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짧은 시간 안에 머리가 하얗게 세는 증상을 가리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외에도 이런 일화가 종종 전해져 내려옵니다.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토머스 모어도 사형을 선고받고 머리가 백발로 변했다고 하고요. 중국 양나라의 주흥사는 황제로부터 천자문을 하루 만에 완성하라는 명을 받고 머리가 하얗게 셌다고 합니다. 천자문이 ‘백수문(白首文)’이란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하루아침에 머리 전체가 백발이 될 수 있는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게 아니라, 색깔이 있는 머리카락만 선별적으로 빠져 백발이 된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고 하네요.

■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2019.08.24 ~ 2019.11.17
서울 디큐브아트센터
기본가 7만 ~ 15만 원
8세 이상 관람 가능
김소현, 김소향, 장은아, 김연지, 박강현, 정택운, 황민현, 민영기, 김준현, 이한밀, 최지이, 윤선용, 김영주, 주아 등 출연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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