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육파이’ 만드는데 이상하게 귀여운 그녀, 러빗 부인을 연기한 역대 배우들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9.10.28 13:24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10.28 13:28

뮤지컬 <스위니토드>엔 타이틀롤인 스위니 토드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 있다. 바로 러빗 부인이다. 러빗 부인은 그야말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인물이다. “악, 손님이다!”라는 대사와 함께 러빗 부인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그전까지 어둡고 무거운 줄만 알았던 극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스위니 토드를 짝사랑하지만 정작 그의 슬픔에는 별 공감을 하지 않고, 인육으로 파이를 만들어 팔자는 무시무시한 제안을 하다가도 갈 곳 없는 고아 소년을 거둬주는 여자. <스위니토드>가 예측불허한 롤러코스터처럼 느껴지는 건 전적으로 러빗 부인의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그렇다면 러빗 부인은 누구일까? <스위니토드>가 19세기 런던의 도시전설이었을 때부터 러빗 부인은 줄곧 스위니 토드의 파트너였다. 구전된 괴담인 만큼 버전에 따라 자잘한 설정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주요 골자는 변함이 없었다. 스위니 토드가 2층의 이발소에서 손님을 살해하면 아랫집 파이 가게 주인인 러빗 부인이 그 인육으로 파이를 만든다는 것. 스위니 토드와 러빗 부인은 급성장한 산업화 사회와 높아진 범죄율에 대한 당시 런던 사람들의 공포가 만들어낸 괴물이었다.

스위니 토드 괴담을 소재로 1850년 출간된 소설 의 삽화 속 러빗 부인

1979년 <스위니토드>가 스티븐 손드하임의 뮤지컬로 만들어지면서 러빗 부인은 보다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 되었다. ‘넬리 러빗’이라는, 흉악한 범죄와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깜찍한(?) 이름도 얻었다. 그의 범죄는 지독히 끔찍하지만 그의 동기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먹고살기 힘들고 고깃값은 비싸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모은 돈으로 이루고 싶은 소망도 소박하기 그지없다. 바닷가에 민박집을 하나 차려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늙어 가는 거란다. 이런 모습에 찰나의 연민을 느끼려는 순간, 러빗 부인은 끔찍한 행동에 걸맞은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극장을 나서면서도 관객들은 도무지 러빗 부인에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무시무시하고 소름이 끼치다가도 어느 순간 귀엽고 짠한 여자. 여러모로 러빗 부인은 전무후무한 독보적인 캐릭터다.

그만큼 러빗 부인은 많은 여성 배우들이 탐내는 캐릭터인 동시에, 아무나 맡을 수 없는 배역이기도 하다. 극과 극을 오가는 인물을 설득력 있게 표현할 수 있는 연기 스펙트럼과 손드하임식 블랙 코미디를 전달할 수 있는 유머 감각, 그리고 가창력까지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러빗 부인을 연기한 배우들론 누가 있을까. 1979년 초연부터 2019년까지, 특기할 만한 역대 러빗 부인들을 모아봤다.

안젤라 랜즈베리의 러빗 부인 (오른쪽은 스위니 토드 역의 조지 헌)|Martha Swope

러빗 부인을 처음으로 연기한 역사적인 배우는 1979년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의 안젤라 랜즈베리(Angela Lansbury)다. 영화 <가스등>, TV 시리즈 <제시카의 추리극장> 등에 출연한 배우로, 국내에서는 무엇보다 디즈니 <미녀와 야수>의 주전자 폿츠 부인 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Beauty and the Beast’를 부르던 친근하고 따뜻한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연기하는 러빗 부인은 잘 상상이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979년 당시에도 이미 연기 경력이 30년을 훌쩍 넘은 대배우였던 그는 발랄하고 코믹한 톤으로 러빗 부인을 찰떡같이 소화해냈다. 그를 캐스팅하기 위해 역으로 손드하임이 곡을 보여주며 오디션을 봐야 했을 정도라고. 안젤라 랜즈베리는 러빗 부인으로 그해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안젤라 랜즈베리가 부르는 ‘The Worst Pies in London’

패티 루폰의 러빗 부인|Pual Kolnik

‘브로드웨이의 전설’로 불리는 배우 패티 루폰(Patti Lupone)은 러빗 부인을 두 번이나 연기했다. 2001년 콘서트 버전과 2005년 브로드웨이 공연이다. 2005년 공연은 <스위니토드>의 두 번째 브로드웨이 리바이벌이었는데, 존 도일(John Doyle) 연출의 지휘 아래 배우 전원이 악기 연주까지 겸하는 액터-뮤지션 형식을 시도해 지금까지도 파격적인 연출로 회자되고 있다. 패티 루폰은 푸근하고 코믹한 안젤라 랜즈베리의 러빗 부인과는 달리 보다 욕망에 가득 찬 러빗 부인을 보여줬다. 일흔이 넘은 패티 루폰은 최근에도 드라마 <글리>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 애니메이션 <스티븐 유니버스> 등 무대 밖까지 아우르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패티 루폰이 부르는 ‘The Worst Pies in London’ (2001년 콘서트 버전)

헬레나 본햄 카터의 러빗 부인

<스위니토드>를 팀 버튼 감독의 영화(2007)로 처음 접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영화에선 헬레나 본햄 카터(Helena Bonham Carter)가 러빗 부인을 연기했다. 이미 <빅 피쉬>의 마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악당 벨라트릭스 등 독특하고 기괴한 캐릭터의 ‘장인’이었던 그에게 러빗 부인의 옷이 찰떡같이 잘 맞았던 것은 당연지사. 뮤지컬의 코믹한 톤을 빼고 팀 버튼 감독 특유의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살린 영화에 맞게 헬레나 본햄 카터도 보다 시니컬하고 우울한 러빗 부인을 보여줬다. 물론 가창력은 뮤지컬 배우들만 못했지만, 자기만의 스타일로 넘버를 소화해냈다. 헬레나 본햄 카터는 이후에도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2012)에 출연했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부르는 ‘God, That’s Good!‘

이멜다 스턴튼의 러빗 부인 (오른쪽은 스위니 토드 역의 마이클 볼)|Johan Persson

공교롭게도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는 헬레나 본햄 카터 외에도 러빗 부인을 연기한 배우가 두 명이나 더 출연한다. 바로 엄브릿지 교수 역의 이멜다 스턴튼(Imelda Staunton)과 점성술 과목의 트릴로니 교수를 연기했던 엠마 톰슨(Emma Thompson)이다.

이멜다 스턴튼은 2012년 런던 공연에서 러빗 부인을 연기해 올리비에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상대역으로는 <레미제라블> 10주년 기념 공연의 마리우스로 유명한 뮤지컬 스타 마이클 볼이 함께 무대에 섰다. 이멜다 스턴튼은 영화 외에도 연극, 뮤지컬 무대에서 꾸준히 활약하고 있는데, <스위니토드> 외에도 <숲속으로(Into the Woods)> <집시(Gypsy)> <폴리스(Follies)> 등 스티븐 손드하임의 작품에 다수 출연한 바 있다.

엠마 톰슨의 러빗 부인 (왼쪽은 스위니 토드 역의 브륀 터펠)|Tristram Kenton

엠마 톰슨은 2014년 링컨 센터에서 공연된 콘서트 버전에서 러빗 부인을 연기했다. 당시 공연에서 스위니 토드 역은 성악가인 브륀 터펠이 맡았는데, 성악가와 영화 배우라는 신선한 조합으로 화제를 모았다.

레아 살롱가의 러빗 부인|Atlantis Theatrical Entertainment Group

이보다 러빗 부인 역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배우가 있을까. 현재 필리핀 마닐라 공연에서 러빗 부인을 연기하고 있는 레아 살롱가(Lea Salonga)의 얘기다. 필리핀의 국민 배우인 레아 살롱가는 18살의 나이에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오리지널 킴으로 발탁됐다. 이후 디즈니의 <알라딘>과 <뮬란>에 노래 더빙으로 참여했고,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에포닌과 판틴을 연기한 최초의 아시아계 배우라는 기록도 세웠다. 맑은 음색과 디즈니 프린세스 이미지로 각인된 그에게 러빗 부인은 어마어마한 연기 변신인 셈이다. 본인의 SNS에 “내가 출연한다고 전부 어린이가 보기에 적합한 공연은 아니다. 제발 <스위니토드>에 어린 자녀를 데려오지 말라”고 호소했을 정도니 말이다. 레아 살롱가가 출연하는 <스위니토드>는 10월까지 마닐라에서, 11월부터 12월까지는 싱가포르에서 공연된다.

홍지민, 박해미의 러빗 부인|뮤지컬해븐

그렇다면 한국에선 누가 러빗 부인을 연기했을까. <스위니토드>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총 3번 공연되었는데, 그중 2007년 초연에선 홍지민박해미가 러빗 부인을 맡았다. 당시 공연은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모차르트!>(2014), <햄릿: 얼라이브>의 아드리안 오스몬드가 연출했는데, 음울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잘 살려내 마니아들의 호평을 호평을 받았지만 흥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전미도의 러빗 부인 (왼쪽은 스위니 토드 역의 조승우)|오디컴퍼니

이후 국내 관객들이 다시 <스위니토드>를 만나는 데까지는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16년 오디컴퍼니가 새롭게 선보인 <스위니토드>에서는 옥주현전미도가 러빗 부인을 연기했다. 2016년 공연은 ‘말맛’을 살리고 유머를 강조한 김수빈 작가의 새로운 번역으로 대중성을 보다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전미도는 “뮤지컬의 여주인공은 아름답고 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는 심사평과 함께 2017년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옥주현, 김지현, 린아의 러빗 부인|오디컴퍼니

돌아온 2019년 공연에선 옥주현이 다시 한 번 참여해 ‘장인’의 경지에 이른 러빗 부인을 보여주는 한편, 김지현 린아가 새롭게 합류해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옥주현이 사랑 많고 푼수 같은 하이텐션의 러빗 부인이라면 김지현은 그와 정반대로 냉소적이고 지능적인 러빗 부인을, 린아는 그 두 사이를 오가는 러빗 부인을 보여준다. (물론 에디터의 주관적인 감상이며, 공연의 특성상 매일매일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표만 구할 수 있다면 3인 3색의 매력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이번 <스위니토드>의 쏠쏠한 재미이지 않을까. <스위니토드>는 2020년 1월 27일까지 공연되며, 10월 25일 4차 티켓오픈을 앞두고 있다.

■ 뮤지컬 <스위니토드>
2019.10.02 ~ 2020.01.27
서울 샤롯데씨어터
공연시간 165분 (중간 휴식 20분)
중학생 이상 관람가
조승우, 홍광호, 박은태, 옥주현, 김지현, 린아, 김도형, 서영주, 임준혁, 신주협, 신재범, 최서연, 이지수 등 출연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

뮤지컬 기사 더보기

이런 기사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