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할까.
거짓말 하지 않고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꺼내보인다면... 그에 따른 충격을 감당할 준비는 돼 있는 걸까.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핑계가 명분을 얻는 순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호도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거짓말의 속성이 변하지는 않는다. 어떤 명분으로도 거짓말이 합리화되고 미화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새빨간 거짓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거짓말의 기원을 살펴보고 실태를 돌아보게 하는 전시가 개막했다. 서울미술관 약 800평의 공간에서 진행되는 2019년 하반기 대형 그룹 기획전 ‘보통의 거짓말 Ordinary Lie’ 展이다.
4개의 파트로 전시장을 꾸몄다. 인류의 거짓말은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가(인트로)-거짓말이 내 삶에 미친 영향 탐구(파트1)-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상처(파트2)-국가와 사회의 거짓말(파트3)로 이어진다.
모두 23개 팀이 참여해 회화, 사진, 영상, 미디어아트, 설치, 조각 등 현대 미술 전 분야에 걸쳐 ‘일상 속 거짓말’을 소재로 다룬 작품 100여 점을 소개한다.
서울미술관만의 ‘스토리파이 웨이’(Storify-Way)‘ 형식을 본격화해 관람객들이 보다 쉽게 전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했다. 스토리파이 웨이는 최근 수년간 서울미술관이 새롭게 제시해 온 전시 프레임으로, 관람객에게 감상의 색다른 형식을 제시하고 작품과 자연스럽게 상호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스토리텔링 기반의 전시 기획이다.
■ 인트로
국어사전 형식을 빌린 참신한 인트로 구성으로 전시의 기획의도와 콘셉트를 직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존의 딱딱한 서술방식에서 벗어나 재치있는 감성으로 전시 언어를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젊은 관람객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겠다는 의도다.
전시 디자인도 쉽고 흥미롭게 꾸몄다.
루마니아 작가 릴리아나 바사라브는 구약성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를 주제로 영상을 만들었다. 아담과 이브로 보이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어 붉은 색의 선악과가 이브에게 건네진다. 성서와 달리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않는다. 영상은 30초 단위로 반복된다. 예상을 깨는 아담의 행동을 통해 사회의 관습과 규율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작가 유민정은 부끄러움의 감정을 표현했다. 거짓으로 위장해보지만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렸다. 부끄러움을 알게 된 현대판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담은 에덴동산 작품에서 부끄러운 거짓말을 일삼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발견한다.
■ 파트1
8분43초의 영상에서 중국의 가수 겸 배우 질리안 청은 웃는 듯 울부짖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의 미묘한 감정 변화가 이 영상의 핵심이다. 질리안 청은 스캔들로 강제 은퇴했다가 복귀 후 영상 제작에 참여했다. 작가 장즈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 대중 앞에 다시 선 질리안 청을 통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렵게 만드는 미디어의 실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송유정은 개인의 다양한 감정을 조각이라는 장르를 통해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순간 나타내는 반응은 단지 그 순간의 감정이 아니다. 수많은 경험과 의식이 맞물린 생각의 발현이다. 특정한 반응(노란색 조각)만 보고 개인의 심리나 상황을 섣부르게 재단하려는 인간의 경솔함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진효선의 작품을 보면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해맑은 아이의 유치원 졸업 그림인데 어찌 된 일인지 별로 즐겁지가 않다. 얼굴을 아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사탕으로 표현해놓았지만 더 우울해질 뿐이다. 왜일까. 작가는 졸업이 아이들을 위한 졸업인지, 학부모들을 위한 졸업인지 묻는다. 의젓하고 착한 모습의 졸업 사진에서 획일적인 틀에 맞춘 어른스러움을 강요당하는 아이들의 ‘현실’을 포착했다.
■ 파트2
이해강 작가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인 ‘빠른 년생’을 풍자했다. 몇 달 차이로 나이의 서열이 정해지고 친구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비판한다. 이를 위해 12간지의 동물을 두 개씩 결합해 새로운 동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두가지의 띠가 혼합된 기이한 동물의 이미지는 나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하지현은 현대 사회라는 틀 안에 갇힌, 우리 자신의 모습을 고발한다. 영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보니 주인공의 머리에 뿔이 솟아있었다. 뿔을 감추려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한계를 느낀 그는 결국 피를 흘려가며 뿔을 절단했다. 용기를 내 거리를 나간 주인공 앞에 펼쳐진 거리의 풍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뿔이 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는 것을 못 견뎌하는 나약함과 두려움부터 위선, 편견, 보이지 않는 차별과 폭력, 그리고 사회적 관습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우리가 겪는 내적 고민과 갈등, 고통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를 통해 ‘달라져도 괜찮아’ ‘자신의 생각을 믿으라’는 소통과 긍정적 위안의 메시지를 던지려 했다.
추종완의 작품은 좀 더 직설적이다. 규격화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과 갈등, 상처, 일그러진 자화상을 표현했다. ‘몸은 정신을 대변한다’는 가정 하에 몸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진실하기 위해 껍질을 벗어던지는 일탈을 감행하는 작품 속 인물은 껍질을 깨고 다시 날아오르는 행위가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진실과 마주하는 행위는 고통과 인내를 수반하지만 피할 수도, 피해서도 안 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채정완 작가도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도록 관객들을 이끈다. 사랑이란 외피를 두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그러진 ‘데이트 폭력’은 대척점에 있는 사랑과 폭력이 어이 없게도 하나의 맥락으로 포장되어 일상에서 드러나는 거짓된 모습의 일단이다.
독일에서 미디어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장연호의 ‘마지막 밤’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을 애도하는 작품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차갑고 무서운 거짓말에 눌려 소중한 생명들은 깊고 차가운 바닷물에 웅크린 채 잠기고 말았다.
가만히 있는 건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장연호는 차디찬 바다 위에 별이 된 아이들의 혼을 어루만지고자 이 영상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일까. 엄익훈이 그림자 조각 작품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다. 괴상하고 형태를 알 수 없는 조각품이지만 빛에 의해 벽에 투사된 그림자는 사랑하는 연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믿는 이미지가 실은 추악한 내면을 담고 있다’ ‘언뜻 봐선 흉측한 철제 쇳덩이가 실제로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등의 사실은 끊임없이 섣부른 판단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 파트3
많은 텔레비전과 거대한 안테나가 전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TV로도 모자라 이동하면서 스마트폰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수많은 채널의 동영상 콘텐츠를 시청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미디어의 발전은 인간의 사고를 확장시켰지만 영화 ‘트루먼 쇼’에서 꼬집었듯이 미디어가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선전, 선동의 도구로 악용될 위험성은 늘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심지어 ‘가짜뉴스’라는 단어가 미디어 수용자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오늘날이다. 김태은의 작업은 거짓말로 가득 찬 ‘욕망’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조성현은 정사각 입방체를 거울 공간에 배치해 무한히 같은 거리와 공간으로 증식시켰다. 작가가 만들어낸, 일종의 무한 루프 공간이다. 10명의 역대 대통령 취임사 첫 구절을 중첩한 목소리들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작가는 대통령의 역대 대통령 취임사가 모두 동일한 문구로 시작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무한한 공간 속에 연속 재생시켰다. 허공으로 퍼져가는, 기계적이고 반복적이며 형식적인 음성을 들으면서 과연 어떤 진실이 담겨 있는 건가 묻게 된다.
■ 연계전시
설은아 작가의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를 통해 관람객의 감성을 극대화한다. 공중전화 부스와 아날로그 전화로 관람객들이 그동안 미처 말하지 못했던 진실과 가슴에 담아왔던 속마음을 털어놓는 인터렉티브 감성 미디어아트 작품이다.
전시장에 진열된 아날로그 전화기의 수화기를 들면 과거에 녹음된 누군가의 솔직한 음성메시지를 랜덤 방식으로 들을 수 있다. 시공간을 넘어 전해지는 누군가의 절절한 사연을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무장해제’되는 순간과 맞닥뜨린다.
설 작가는 미디어아트와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구현 중인 인터렉티브 스토리텔러이자 웹디자이너다. 칸 광고제 사이버 부문 황금사자상 수상을 비롯해 각종 국제 수상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019년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 최고 영예인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 이벤트
서울미술관은 도서출판사 <열린책들>과 함께 ‘석파정 독서로드’를 마련했다. 신간 장편소설 <핵을 들고 도망친 101세 노인> 속 문장들을 발췌해 독서로드를 구성했다. 많이 쌀쌀해졌지만 아름답게 물든 단풍길을 걸으며 이야기로 가득한, 다양한 풍광의 석파정을 만날 수 있다.
서울미술관 야외공원 내 위치한 석파정은 흥선대원군의 별서(別墅)로 사용됐던 곳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돼 있다. 빼어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경관과 수려한 건축미를 자랑한다. 관람시간은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월요일 휴관)이며, 매일 오후 2시에 문화 해설사가 문화재 해설에 나선다.
■ 전시명 : <보통의 거짓말 Ordinary Lie> 展
기간 : 2019년 10월 29일(화) ~ 2020년 2월 16일(일)
장소 : 서울미술관(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201번지) 본관 M1 제 1전시실과 제 2전시실
※매일 2회(낮 12시, 오후 4시) 큐레이터와 도슨트의 정규 해설, 단체의 경우 사전 예약시 원하는 시간에 전시해설
출품분야 : 회화, 조각, 사진, 일러스트, 영상 등 현대미술 전 분야
참여작가 : 김태은, 김현주 ex-media, 릴리아나 바사라브(Liliana Basarab), 박정은, 송유정, 스테판 슈미츠(Stephan Schmitz), 안나 페티나(Anna Petina), 엄익훈, 유민정, 艾? 이주연, 이해강, 장연호, 장즈(Jiang Zhi), 전지윤, 조성현, 지혜, 진효선, 채정완, 추종완, 콰야(Qwaya), 하지현, 로돌포 로아이자(Rodolfo Loaiza), 홍성철 등 모두 23명
작품수 : 모두 100여 점
주최·주관 : 서울미술관(www.seoulmuseum.org)
관람안내 : 전시장-오전 10시~오후 6시(전시마감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석파정-오전 11시~오후 5시
관람요금 : 성인-11,000원. 학생(초/중/고)-7,000원(학생증 지참). 미취학아동(3~7세)-5,000원. 우대(65세 이상, 군인, 국가유공자, 장애인 복지법에 의한 장애인 및 장애 3급 이상 장애인의 동반자)-7,000원. 단체관람-20인 이상 20% 할인
문의 : 02-395-0100 또는 info@seoulmuseum.org
사진 |올댓아트 권재현, 서울미술관
<올댓아트 권재현 allthat_ar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