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 RM도 다녀갔다...조선 ‘사발’의 꾸밈없는 매력 속으로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10.05 18:12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10.05 18:21

조선 사발의 맛과 멋

임진왜란이 발발할 무렵인 16세기 후반, ‘막 사발’로 불린 조선의 그릇을 우리 선조들은 크게 대접하지 않았다. 일본은 달랐다. 조선 달항아리와 사발의 예술성과 의미를 헤아릴 줄 알았다. 전쟁은 그들이 원하는 걸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야만적으로 착취해갈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98)의 지시로 왜군들은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가고 조선 백자를 비롯해 사발이나 대접을 닥치는 대로 쓸어담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조선 도자의 치장하지 않은 아름다움이 그들의 탐욕을 부채질했다. 포화(砲火) 속에서 한낱 힘없는 전리품으로 전락한 조선 사발의 서글픈 운명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스승이었던 센노 리큐(千利休,1522~91)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조선 사발에 매료돼 이를 기반으로 ‘와비차’(侘び 또는 寂び, 侘茶)를 완성시켰다. 와비차는 일본의 전통 차 문화에 독특한 불교의 선(禪)을 접목시켜 완성한 것으로 간결함과 소박함을 특징으로 했다. 중국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다기는 어울리지 않았다. 와비차의 뜻과 정신을 담아낼 그릇을 찾던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꾸밈 없고 수수한 조선의 사발이었다.

권대섭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박여숙화랑 전시장 내부 모습ㅣ박여숙화랑 제공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이 부족했던 일본은 조선의 그릇 장인들을 우대했고 조선 사발의 작품성을 인정하고 추켜세웠다. 마구잡이로 끌려간 도공들과 무더기로 착취당한 그릇, 도자기들이 일본에 도착한 뒤에는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17세기 일본에선 하급 무사의 토지와 녹봉 전체가 다완 하나의 가치와 맞먹었다 하니 어느 정도로 가치가 있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도 다도를 즐기는 일본인들은 우리네 사발을 ‘다완’이라 부르며 매우 귀히 여긴다.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박여숙화랑에서 작품을 둘러보고 있는 권대섭 작가의 모습ㅣ박여숙화랑 제공

우리는 어떨까. 예나 지금이나 우리네 사발의 참뜻을 정작 한국인들이 제대로 모른다며 ‘조선 그릇’에 천착하고 몰두해 온 도예가가 있다. 권대섭(權大燮, 1952~ ) 선생이다. 권대섭은 대전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인사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조선 백자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뺏겨 도예가의 길로 들어섰다. 1979년 일본 오가사와라 도예몬에서 도자 수학을 하고, 규수 나베시마로 떠나 5년간 조선 도공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조선시대 관요가 있던 경기도 광주에 가마를 짓고 도요지를 찾아다니며, 도자 파편(사금파리)을 수집하는 등 공부에 연구를 거듭했다.

권대섭 작가가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ㅣ박여숙화랑 제공

1995년 전시를 시작으로 현대 도예가로 자리를 잡았다. 2018년 10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달항아리가 52,500 파운드(한화 약 9700만원)에 낙찰되며 ‘달항아리 작가’로 국내에 크게 알려졌다. 요즘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이들이 늘어나면서 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를 굽고, 사발을 만들지만 전통의 재현 차원을 넘어 오늘날의 정신과 감각까지 담아 구워내는 작가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권대섭은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오늘이라는 시간을 더해 우리시대의 정신이 담긴 달항아리와 사발을 만든다.

권대섭의 ‘다완’ 작품ㅣ박여숙화랑 제공

한반도에서 사발은 본래 차를 마시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개밥그릇’으로 사용할 정도로 발길에 차이던 일상 용품이었다. 먹고 사는데 필수적인 도구이다 보니 짝을 이루는 ‘대접’과 함께 ‘사발’(Bowl)이란 말도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다. 동시에 매우 낯선 용어이기도 하다. 사발의 아름다움, 예술성은 고사하고 플라스틱 그릇 등에 밀려 우리네 의식 속의 구석지고 후미진 곳으로 쪼그라든지 오래다. 일본에선 ‘다완’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사발의 명맥을 잇는 찻잔들이 각광을 받아왔지만 한국에선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성장신화’에 매몰돼 초고속질주를 하는 사이 한국의 많은 전통문화가 사라지면서 차를 즐기던 문화도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사발을 그저 낡고 오래된 접시 또는 그릇 정도로 기억한다. 일부가 다도문화와 차 그릇에 관심을 가지면서 장인정신이 배어 있는 도자기 찻잔, 사발, 대접 등 예술 작품들이 세계인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대중화까지는 아직 요원한 상황이다.

미미한 불씨를 피우려는 권대섭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아름다움은 깊고 형식은 푸근하며 색은 은은한 조선 사발의 멋과 맛을 오늘이란 시간에 담아 새롭지만 옛 것인 양, 예스럽지만 새 것인 양 은근하게 빚어낸다.

권대섭의 ‘다완’ 작품 12점을 모았다.ㅣ박여숙화랑 제공

미술사학자인 나선화 전 문화재청장은 “21세기 조선사발 100점이 한자리에 펼쳐진 이곳에서 힘차게 흐르는 조선 사발 500년의 맥을 발견한다”며 “사발의 표면에선 밤 하늘의 별빛처럼 다채로운 빛깔의 은은한 빛점들이 뿜어져 나오고 그 내면은 조선의 선비 문화처럼 청렴하고 단순 소박한 듯하면서도 현대미와 상통하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권대섭 작가의 ‘다완’ 작품들이 석양이 지는 하늘 풍경과 어울려 소박하고 은은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ㅣ박여숙화랑 제공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 등 작품은 국립민속박물관, 호림박물관, 리움 미술관, 본태박물관,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방글라데시 국립박물관, 멕시코 국립민속박물관, 러시아 국립박물관, 파리 기메 뮤지엄 등이 소장하고 있다.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지난해 10월 박여숙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을 둘러본 뒤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 한 점을 구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RM이 이번에도 ‘다완’(사발)을 샀다고 박여숙화랑은 밝혔다.

<권대섭 사발 (Bowl) 展>
KWON DAE SUP SOLO EXHIBITION
2020년 9월 22일(화) ~ 2020년 10월 22일(목)
박여숙화랑(서울 용산구 소월로 38길 30-34)
문의)02-549-7575

자료 및 사진 | 박여숙화랑

<올댓아트 권재현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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