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잠들어 있던 ‘원조 타워팰리스’ 유진상가 지하, 지금은?

올댓아트 김도연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0.11.26 14:04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0.11.26 14:05

유진상가는 1970년대 최고급 주상복합 건물로, 많은 개발과 변화의 역사를 품은 근현대 건축 자원이다. ‘원조 타워팰리스’라고 불리며 군 장성, 중앙정보부, 청와대 직원, 연예인들이 거주하기도 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건물이 땅이 아니라 100여 개의 콘크리트 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남북 대립 상황에서 유사시 남침을 대비한 대전차 방호 목적으로 홍제천을 복개해 지었다고 한다.

현대식 구조로 주목받으며 방공 건축의 의미까지 갖던 초기와는 달리 유진상가는 급변하는 도시 개발 속에서 지역 사회와 끊임없이 존폐의 갈등을 겪어왔다. 유진상가의 건설로 단절된 홍제천부터 1990년 건물의 일부를 자른 내부순환로의 악연까지 배려 없는 관계에 상처만 남았다.

지속해서 무산된 재개발과 건물 부분 철거 등으로 보수 없이 50년간 유지되어 온 유진상가는 과거 서대문구의 랜드마크였으나 오늘날에는 흉물로 인식되는 형국이었다. 주변은 노후한 동네로, 유진상가 하부 산책로는 유동인구가 적어 하루 이용자가 보통 지역주민 100명 내외에 그친다.

홍제유연 입구. 다리 위로는 유진상가와 내부순환로가 보인다. | 올댓아트 김도연

오랜 기간 방치됐다가 2020년 7월 1일 ‘홍제유연’이라는 이름의 예술공간으로 거듭났다. 2019년 지역단위 공공미술 프로젝트 대상지로 선정됐으며, 홍제천 유진상가 하부 약 250m 구간을 새로 조성해 여기에 공감각적 공공미술 작품을 구현했다.

홍제유연(弘濟流緣)은 사람과 시간의 흐름을 연결하고 화합을 이룬다는 뜻을 담고 있다. 홍제천과 유진상가의 새로운 인연을 공공미술로 이음으로써 주민들의 장소 활용은 물론 유입 인구 증가와 충돌의 역사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바람을 담았다.

홍제유연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홍제유연의 과거 모습 | 서울시 제공

시민들이 상시 이용하는 공공장소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것이 완성도 높은 작품을 기획하는 것만큼 중요했다. 안전 등의 심의사항을 미리 조사해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고, 적정 실행예산과 완공기한을 예측해 안정적으로 프로젝트를 관리하며, 설치 기간 동안 시민의 불편을 최소화할 방안을 마련했다.

서울시 공공미술위원회는 분과위원회를 별도 구성해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자문했으며, 유진상가의 지하의 환경 정비와 시설 보완에 서대문구청이 적극 협력했다. 먼저, 산책로 내외부의 접근로 환경을 개선하고 약 1년간 작가 모집과 작품 공모, 사전 프로그램 운영 등의 사업을 실행했다.

홍제유연 작품설치 전경 | 서울시 제공

2019년 유진상가의 하부가 개방되어 건물로 인해 단절됐던 홍제천을 잇는 길이 생기며 낡은 콘크리트 구조들과 자연이 조화된 특유의 지하공간으로 바뀌었다. 지난 현대사의 뒤엉킨 인연이 우연히도 특수한 풍경을 선보이며 앞으로의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는 열린 장소의 배경으로 펼쳐졌다.

자연과 도시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로 상반된 풍경이 교차하고 있다. 일상적인 풍경을 지나 낯선 문명의 유적지를 가로지르는듯한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미지의 과거와 미래로 넘나들며 시공간이 결합된 인상을 전달한다. 과거 홍제천의 기원인 따뜻한 정서와 가치들부터 현재 환경에서 비롯된 생태계 변화의 미래까지. 유연한 사고와 시선에서 공간이 내포하는 다면의 이야기들을 포용하며, 장소에 담긴 의미를 이어가고자 한다.

홍제유연에는 어떤 작품들이 있을까?

홍제유연 작품 배치도 | 서울시 제공

홍제유연은 ‘예술이 흐르는 물빛길’이라는 주제로 50년 동안 끊어져 있던 홍제천을 다시 잇고 상부에 위치한 유진상가의 새로운 여정을 떠나고자 했다. 먼저, 과거 군사용 방어 목적으로 설계되어 현재는 지상의 건물과 도로를 지지하는 100개의 기둥이 가로지르는 공간적 특성을 고려했다.

또한, 50년 만에 열린 땅속에 소생하는 빛, 숨, 소리, 온도 등 비물질적 요소들에 주목했다. 자연이 함께 교류하는 소중한 순간들을 일깨워 관객과 공간이 순환하며, 개인과 장소가 함께 회복하는 예술의 본질적인 기능에 집중하고자 했다. 보이지 않는 의미와 가치들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홍제천과 건물이 조화된 환경적 특수성에서 도시 생태계의 친자연적 삶과 기술의 미래에 대해 함께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홍제유연은 공간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고 새로운 형태의 공공미술을 선보인다. 건물을 받치는 회색 기둥 사이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설치미술, 조명예술, 미디어아트, 사운드 아트 등 8개 작품을 설치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팀코워크(Team Co-Work), 뮌(Mioon), 전기종, 윤형민, 염상훈이 다양한 뉴미디어 작품을 설치하고, 일부 작품은 시민 참여로 완성됐다.

토사를 쌓던 공간에서 시민들의 작은 광장으로

염상훈 & 팀코워크(Team Co-Work), 두두룩터, 콩자갈(바닥), 스테인리스 스틸, 레드파인우드, 42m x 20m | 서울시 제공

‘두두룩터’는 도시와 공공미술 사이에 위치한 응접 장소다. 유진상가 지하 홍제천의 비일상적 경험을 연장하고, 내외부의 경계를 연결하는 이음의 공간이다. 이곳에 위치한 원형 언덕은 홍제천 주변에서 유기적인 대지의 일부이자 독립된 쉼터로 기능해 능동적으로 감상하고 쉴 수 있는 역할을 한다. 홍제유연으로 건너올 수 있는 돌다리를 통해 단절됐던 보행로가 연결되면서 두두룩터는 홍제천변을 찾는 주민들이 함께 모이는 터가 됐다.

참여 작가 염상훈은 새로운 건축공간과 디자인 방법을 실험하며 도시적 관점을 반영한 건축디자인과 더불어 디지털 기술에 대한 다양한 전략을 연구하는 건축가다. 도시적 맥락을 고려한 재개발과 재사용 건축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기하학의 공간적 가능성과 설계 방법론 및 건축교육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내 인생의 빛,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

팀코워크(Team Co-Work) & 서울시민 1000여 명, 홍제 마니차, 스테인리스 스틸, 우드, 금속판, 11m x 9m | 올댓아트 김도연

‘마니(摩尼)’는 소원을 들어주는 영롱하게 빛나는 보배로운 구슬을 뜻한다. 티베트에서는 마니를 원통의 바퀴로 만들어 손으로 돌리며 걷는 기도와 명성법을 사용한다. 홍제 유연 초입에 위치한 ‘홍제 마니차’는 ‘내 인생의 빛나는 순간, 내 인생의 빛’을 주제로 1000여 명의 시민이 참여한 아날로그 인터랙티브 작품이다.

‘홍제 마니차’에는 빛에 비유해 사람들의 삶에 소중한 순간들을 담은 1000개의 메시지, 관객과 공간을 비춰내는 거울이 있다. 이곳에서 마니를 돌리며 사람들의 따뜻한 메시지 속에서 삶의 행복을 공유하며, 하루의 마음을 정리하고 기원하는 정서적 안정의 경험을 전달한다.

공간이 지나온 수많은 사연들

뮌(Mioon), 흐르는 빛, 빛의 서사, 고보조명, 30m x 23m | 올댓아트 김도연

‘흐르는 빛, 빛의 서사’는 홍제천과 그 주변이 지나온 시공간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수집해 빛의 이미지로 그려낸다. 장소에 떠돌던 사회·문화적 이야기들은 점멸하는 빛의 잔형들로 전환돼 공간의 기둥과 벽에 중첩된 그림자 흔적들을 이어간다. 만화경(萬化鏡)을 통해 한눈에 들여다보는 것과 같이 사방에 펼쳐지는 빛의 잔상들은 장소가 지나온 이야기들을 다채로운 빛에 담아 공간을 밝혀낸다.

참여 작가 뮌(Mioon)은 네트워크 미디어 시대에 존재하는 군중과 집단, 스펙터클한 사회로 대변되는 이 시대의 풍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문제를 빛과 그림자를 활용해 시각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자연 발생의 입체적인 순간

진기종, 미장센_홍제연가, 3D 홀로그램 펜 22개, 18m x 7.5m | 서울시 제공

‘미장센_홍제연가’는 홍제천과 유진상가가 인위적인 결합으로 탄생한 낯선 자연환경으로부터 예측할 수없이 확장 가능한 자연의 진화를 상상하며 순환하는 생태 환경의 의미를 상기시킨다. 자연의 움직임들로 적막하고 어두운 기둥 사이에서 실제와 가상 사이에 위치한 풍경 속 생동하는 생명의 순간들을 재현했다.

특히, 이 작품은 공공미술 최초로 3D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한 것이다. 중앙부에 설치된 길이 3.1m, 높이 1.6m의 스크린은 국내에서 설치된 야외 스크린 중 최대 크기다. 중앙부를 포함해 크기가 다른 9개의 스크린이 연동돼 홍제천의 생태를 다룬 영상들을 감상할 수 있다.

참여 작가 진기종은 소형 카메라, TV 모니터 등 전자 장비를 활용해 현대사회의 매스 미디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더불어 사회에 내재된 여러 미시적 힘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카메라 앵글 안의 이미지는 언제든지 조작될 수 있는데, 그런 조작은 누가, 왜, 어떻게 하며 또 그것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는지 작업을 통해 다룬다.

따뜻한 온기를 담은 장소

팀코워크(Team Co-Work), 온기, LED, 스테인리스 스틸, 126m x 7.5m | 올댓아트 김도연


‘널리 구제하다’라는 뜻의 홍제천에서 사람 중심의 정서 회복을 기원하는 라이트아트 작품이다. 조선시대 청나라에서 환향한 여성의 몸을 씻었다는 이야기에 비친 홍제천은 사회에서 억울하게 외면받던 이들을 위한 치유의 장소였으며,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가장 따뜻한 하천으로 인해 겨울에도 사람들이 모이는 인기 있는 빨래터이자 만남과 교류의 장소로 구전된다.

과거에 이 장소가 상징하던 온화한 정서의 이야기에서 비롯해 따뜻한 온기를 담은 장소의 상징성은 빛의 향연으로 재현했다. 42개의 기둥을 빛으로 연결해 홍제유연 공간 전체를 이루는 평온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공간을 채우던 조명의 색이 변하는 인터랙티브 기술도 함께 적용돼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온기 작품이 켜져 있는 동안 손바닥 모양 패널에 손을 대고 있으면 빛이 변한다.

참여 작가 팀코워크(Team Co-Work)는 디자인과 아트를 기반으로 우리의 환경을 연구한다. 디자인, 예술, 기술을 공간과 융합해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유익하고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통해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새로운 미래 가치를 제시한다.

깊은 어둠 속 선명한 숨소리

팀코워크(Team Co-Work), 숨길, 고보조명, 172m x 8m | 서울시 제공

팀코워크는 200m가 넘는 깊은 통로에 자연의 빛이 드리운 숲 그림자 산책길이 조성하기도 했다. ‘숨길’은 자연에서 심신을 정화하고 안정을 찾는 산책의 주요한 기능을 재현한 공간이다. 한낮 빛이 아른거리던 숲길을 걷는 평온한 순간을 수집해 빛의 공간을 연출했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반대 측 산책로와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산책의 본질적인 기능인 편안하고 온전한 휴식을 경험하게 하는 사운드 스케이프는 홍초선이 만들었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홍제천 주변의 소리들을 채집하고 심신의 안정을 돕는 파장을 조합했다. 신체적·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는 차분한 공간을 공감각적 방식으로 연출해 분주한 일상 속에서 지워진 깊은숨의 중요함을 일깨운다.

홍제유연이 개방되는 12시간 동안 각 시간대에 맞는 음역을 송출해 자연과 인공의 소리를 구성했다. 편안함을 부르는 ‘쉼’의 소리와 함께 빛의 숲길을 걸으며, 바쁜 하루의 호흡을 가다듬고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휴식의 시간을 제안한다.

상대적인 관념에서 상보적인 관계로

윤형민, SunMoonMoonSun, 스테인리스 스틸, 아크릴, 1.205m x 1.8m(明), 1.5m x 1.8m(音) | 올댓아트 김도연

‘SunMoonMoonSun’, ‘Um…’은 자연과 인공 같은 상대적 관념이 상보적인 관계의 조화를 상징하는 밝을 ‘명(明)’과 소리 ‘음(音)’의 개념에 대응해 문자가 기원하는 의미를 전달한다. 잔잔히 흐르는 물의 잔상과 빛의 소리로 다시 생명을 얻을 홍제유연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설치미술 작품이다.

두 작품은 50년간 어둠만이 존재하던 공간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소리가 채워지고 빛이 닿는 그 순간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머나먼 과거부터 흐르던 홍제천 수면 위에 투영된 글자를 인지하고 읽는 체험은 이곳의 환경을 사유하고 감상하는 특별한 경험으로 전달된다.

참여 작가 윤형민은 실제와 반영의 시각적인 대립, 자연현상의 매개체인 물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언어의 기원에서 출발해 시대적 문맥의 의미들로 확장시키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어린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홍제천

팀코워크(TEAM Co-Work) & 홍제초, 인왕초 학생 20명, 홍제유연 미래 생태계, 측광 페인트, 블랙라이트, 5.8m x 3.3m | 서울시 제공

축관 페인트로 칠한 야광 벽화 ‘홍제유연 미래 생태계’는 아이들의 상상력으로 그려진 홍제유연의 미래상이다. 자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현재의 지하 환경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동식물들의 출몰을 상상하며 앞으로 도래할 홍제유연의 미래 생태계 모습을 그려냈다. 블랙 라이트를 비춰가며 숨겨진 장면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이 작품은 홍제천 인근에 있는 인왕초 학생 10명, 홍제초 학생 10명 총 20명이 참여해 생태전문가와 함께 홍제천을 탐험하고, 현재 홍제유연 환경의 변화를 상상해 완성한 것이다.

홍제천 전경 | 올댓아트 김도연

홍제유연은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커뮤니티 공간은 24시간 개방할 예정이다.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주민 이용 시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고하고, 24시간 보안카메라 및 순찰 인력을 운영 중이다. 홍제유연의 현장 운영과 추가 전시 등은 서대문구청에 문의 가능하다.

한편, 지역단위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매년 공모를 통해 선정된 대상지 ‘단 한 곳’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적 맥락에 맞는 대표 공공미술 작품 설치를 추진하는 사업이다. 공공미술이 꼭 필요한 지역과 시설·장소 등을 찾아내고, 대상지만의 특성을 반영한 공공미술을 구현해 그곳을 시민들이 기억하고 일상 속에서 자주 찾는 장소로 발굴하는 것이 목표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 공식 블로그(blog.naver.com/seoul_is_museum)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홍제유연>

2020.07.01 14:00 ~ (상설 운영)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48-84
홍제교 인근 유진상가 지하
매일 10:00 ~ 22:00 (자율 관람)

※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내부 관람 시 마스크 착용, 사회적 거리 유지하기

사진 및 자료 | 서울시 제공

<올댓아트 김도연 인턴 allthat_art@naver.com >

전시 기사 더보기

이런 기사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