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클래식은 절제의 예술”…평범함을 거부하는 ‘현의 유전학’

올댓아트 이민정 인턴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03.19 17:24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현의 유전학> 앨범 커버 ㅣ 크레디아

2015년,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세계적 권위의 파가니니 콩쿠르 우승,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던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가 2018년 <파가니니: 24개의 카프리스> 이후 두 번째 앨범으로 청중들을 찾았다. 타이틀은 <현의 유전학>으로, 음악이 시작된 이후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왔고 바이올리니스트에게는 더욱 떼려야 뗄 수 없는 ‘현’이 주제다.

테마도 제목도 범상치 않은 이 앨범의 트랙리스트 구성은 더욱 놀랍다. 중세 시대 음악가인 힐데가르트 폰 빙엔부터 니콜라 마티아스, 아르칸젤로 코렐리, 로디온 셰드린, 할보르센, 아스토르 피아졸라, 라벨, 살바토레 시아리노까지, 설명 없이 트랙리스트만 보면 공통점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 리스트에는 양인모가 세운 규칙이 있다. 연대순으로 펼쳐지는 수록곡들은 양의 창자를 주재료로 쓰던 옛 현이 금속을 재료로 한 단단한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변화를 담고 있다. 말 그대로 현의 유전학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ㅣ 크레디아

이처럼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테마와 구성을 갖고 있다 보니, <현의 유전학>은 발매와 동시에 이목을 끌었다. 특히 앨범의 첫 트랙리스트인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음악은 클래식 앨범에서는 드물게 연주자가 직접 일부 파트를 작곡해 선보이는 곡으로 화제가 됐다. 성악곡이었던 기존 곡에 바이올린 파트를 더하고 본래의 성악 파트는 소프라노 임선혜가 협연했다. 그 외의 트랙리스트에서는 현악기와 현악기, 그중에서도 하프나 기타처럼 기존 무대에서 바이올린과 함께 보기 어려웠던 악기 군과의 하모니를 들어볼 수 있다. 하프시코드 연주자 클레멘스 플릭, 첼리스트 레아 라헬 바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기타리스트 박종호, 하피스트 마리언 레이봇이 현의 유전학을 풀어나가는 연주자로서 양인모와 함께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ㅣ 크레디아

3월 9일 진행된 기자 간담회에서는 양인모로부터 이번 앨범의 제작 과정과 이후로 새롭게 선보일 자신의 음악적 정체성에 대한 방향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클래식이 장르나 시대가 아니라 성격과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으면 한다”며 앞으로 클래식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로서 더 많은 청중들에게 다가가 귀를 열기 위해 노력할 것임도 밝혔다.

한편, 이날 기자간담회에는 오는 앨범 발매 기념 리사이틀 무대에서 협연할 피아니스트 홍사헌도 함께 해 자리를 빛냈다.

*이하 내용은 기자간담회에서 오간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현의 유전학> 앨범 발매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 ㅣ 크레디아

앨범 제목을 <현의 유전학>으로 지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앨범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어려운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이걸 해야겠다.’ 하고 확신을 얻어서 시작한 건 아니거든요. 파가니니 앨범 이후에 저만의 방향성을 찾고 싶었고, 저만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하다가 현이 떠올랐어요. 손가락에 있는 철사 자국이 설명해 주듯이 현은 제게 굉장히 가까운 존재잖아요. 그렇게 현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조사하고 역사를 알아보다가 어느 순간 ‘현의 유전학’이라는 타이틀이 떠올랐어요. 조사하면서 ‘현의 역사’가 곧 ‘텐션의 역사’란 것도 깨달았고요. 옛 현은 지금과 재료도 달랐고 팽팽함도 달랐어요. 그 당시에만 가능한 배음이 있고 주파수가 있죠. 이 앨범에서는 현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그 스토리를 담아냈어요.

파가니니 앨범 이후 본인의 방향성을 찾고 싶었다고 했는데, 이번 앨범에서 그 실마리를 얻었을까요?

저는 클래식이 장르나 시대가 아니라 성격과 라이프 스타일이 되었으면 해요. 클래식이라고 하면 ‘귀족의 음악’, ‘배워야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고 많이들 생각하시는데, 저는 클래식이 그냥 ‘멋있다’고 생각해요. 남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 속에만 느껴지는 어떤 매력이 있거든요. 그리고 ‘클래식함’이란 건 다른 장르에도 있고 저희 주변에도 있어요. 그걸 가장 쉽고 완성도 있게 가공해서 보여주는 형식이 클래식 음악이고요. 전 앞으로 많은 시도를 하고 싶어요. 물론 클래식을 하겠지만, 다른 곳에서도 클래식을 찾고 클래식이란 걸 다시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의 클래식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클래식은 섹시함이죠. 절제의 예술이고요.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지만 적당히 보여주고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는 거예요. ‘클래식함’은 아르마니의 맵시에서도 느낄 수 있고, 힙합 비트, 가사에서도 보인다고 생각해요. 클래식함의 의미에 대한 규정을 하는 것보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소프라노 임선혜씨와 함께한 첫 번째 트랙은 직접 작곡했다고 들었습니다. 왜 중세 시대 음악을 골랐는지, 어떻게 작곡을 하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이 앨범의 첫 트랙은 불에 대한 것으로 하고 싶었어요. 현과 불은 밀접한 관계거든요. 인간이 줄을 처음 사용하게 된 게 불을 지피면서라고 해요. 활비비라는 도구로 불을 지피는 마찰의 이미지가 맘에 들었죠. 불에 대한 곡들이 그렇게 많진 않은데,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쓴 곡 중에 불에 대한 찬양의 곡이 있어요. 물론 이 불은 현상이 아니라 성령을 뜻하는데요. 곡을 접하고 ‘이 곡의 멜로디를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당시 음악은 다 성악이다 보니 자연스레 바이올린 파트를 작곡해서 추가한 거고요. 작곡을 하다 보니 창작욕이 솟더라고요. 그래서 화성을 추가해보는 등 즉흥적인 요소도 많이 넣었습니다.

앨범 첫 트랙을 악기가 아닌 소프라노와 함께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론 이 앨범은 현에 관한 음반이지만, 모든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가 없다면 태어날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현 또한 인간다운 것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임선혜 선생님의 목소리로 앨범의 첫 곡을 열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현의 유전학> 앨범 발매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 ㅣ 크레디아

비올라, 기타, 하프, 하프시코드 등 다양한 현을 사용하는 악기들과 협연했어요. 악기 군을 이렇게 구성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스스로 평소에 건반 악기와 하는 곡을 현악기와 하면 어떤 색채와 텍스처를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해했어요. 하프를 예로 들면, 하프가 라벨의 곡을 함께 연주할 경우에는 민첩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악기가 가진 풍성함 덕분에 라벨만의 배음이 들리기 시작하죠. 같은 곡에서 기존에 접해보지 못한 소리들을 느껴볼 수 있었고, 현악기들이 어우러졌을 때만 가능한 효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최대한 다양한 현악기들과 함께 컬래버레이션 하고 싶었습니다.

할보르센의 ‘사라방드’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연주했어요. 두 아티스트가 그동안 자주 협연을 해왔는데, 이 트랙에 담긴 특징이나 특별함이 있을까요?

이전에는 용재 오닐씨와 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라는 곡을 많이 연주했는데. 이번에는 ‘사라방드’를 함께 하게 됐습니다. 여러 번 작업을 해 온 분이라 굉장히 편했어요. 이 곡의 특징이 있다면, 앨범은 연대기 순으로 러프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인데 ‘사라방드’만 그 어떤 시간에도 포함되지 않아요. 할보르센이 헨델의 테마를 가져다가 변주곡을 만든 형식이니 테마는 바로크인데 바리에이션이 지날수록 점점 시대 구분이 모호해지거든요. 3박자의 춤곡 형식도 사라지고 어느 순간 2박자가 되죠. 그런 의미에서 다른 곡들과는 뭔가 다른 트랙이에요.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현의 유전학> 앨범 발매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 ㅣ 크레디아

기타리스트 박종호씨도 피아졸라의 레퍼토리로 녹음에 함께 했죠. 기타와 함께 한 이유가 있다면요? 피아졸라의 레퍼토리를 선정한 이유도 있을까요?

우선 기타는 앨범에 꼭 한번 묶어보고 싶었어요. 피아졸라의 레퍼토리를 고른 건, 피아졸라의 곡 안에 타악기적인 요소가 많아요. 현의 인터스트리얼한 면모나 메탈릭한 면모, 타악기적인 면모 등이 드러나는데요. 이걸 통해서 현의 소리가 얼마나 자극적으로 변해왔고 타이트해져 왔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수록곡인 피아졸라 ‘탱고의 역사’가 4개의 시대를 표제로 붙인 곡인데, 제 앨범처럼 시간 순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현의 유전학> 안에서 피아졸라의 현의 역사도 볼 수 있는 셈이죠.

같은 ‘현의 역사’를 연구한 피아졸라로부터 받은 영감 같은 것이 있을까요?

올해가 피아졸라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죠. 전 피아졸라의 음악은 마이너리티와 메이저리티의 간극이 얼마나 나약한지 보여주는 곡이라고 생각해요. 원래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아프리카 부족이 처음 시작했어요. ‘부족의 음악’이고 ‘노예의 음악’이었죠. 그 음악이 아르헨티나의 클럽, 무도회장, 콘서트홀을 거쳐 카네기 홀까지 간 건 순전히 음악의 힘이에요. 그 음악 안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DNA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멀리까지 갈 수 있었던 거죠. 그 부분이 굉장히 감동적으로 다가왔어요.

오늘 기자 간담회 무대에도 함께했고, 추후 있을 리사이틀 무대에서도 협연할 피아니스트 홍사헌씨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나요?

홍사헌씨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구사하는 분이에요. 저와 비슷하게 악기만 연주하는 게 아니라 음악 전반적인 데에 관심도 많고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고요. 첫 만남은 미국 어떤 파티에서 같이 베토벤 소나타 리딩을 해본 거였는데, 처음이지만 템포도 경향도 너무 잘 맞았었어요. 단숨에 ‘아, 나랑 동족이구나!’하고 느꼈죠.(웃음) 사실 이번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발매 기념 리사이틀은 제게 있어서 ‘저는 이런 연주자고, 이런 음악을 할 것이고, 제 출발은 이렇습니다.’라고 하는 선언이에요. 그 자리를 함께 할 사람은 저와 스스럼없이 서로 피드백도 주고받고 농담도 할 수 있는 사이의 연주자였으면 했죠. 사헌씨는 제게 있어 굉장히 든든하고 편한 아티스트다 보니 함께 하게 됐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현의 유전학> 앨범 발매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 ㅣ 크레디아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면서 이번 앨범을 녹음했다고 들었어요. 녹음 과정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베를린에서 녹음을 마치고 들었던 특별한 감상이 있었다면요?

작년 10월에 베를린을 처음 갔는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앨범에 함께 할 연주자를 찾아야 하는데 하피스트만 7명에게 추천을 받았을 정도로 막막했죠. ‘코로나19’때문에 장소도 제한이 있었고요. 지난 11월 30일이 한국에 오는 날짜였는데, 11월 29일에 아슬아슬하게 녹음을 끝낸 기억이 납니다. 작업하면서는 베를린이 클래식 음악을 하기에 정말 좋은 곳이라는 감상이 들었어요. 굉장히 실력 있는 연주자도 많고, 서로 연주자를 추천해 주는 문화도 좋았고요. 베를린만의 아우라가 있는 것 같아요. 2달 밖에 안 있었지만 그곳의 역사와 정취에 취해서 녹음했습니다.

‘코로나19’로 연주 환경이 많이 변화했습니다. 음악을 대하는 태도나 음악과 나의 관계와 같은 부분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해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객석에 사람은 없고 카메라만 있고, 인사해도 박수소리는 없다 보니 ‘나는 누구를 위해서 연주하는가?’란 질문을 하게 됐죠. 그리고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오래 머물면서 한국 청중분들이 클래식을 원하고 좋아한다는 걸 여러 플랫폼을 통해 많이 느꼈어요. 음악가의 역할이 생각보다 크구나, 하고요. 앞으로 상황이 잠잠해지면 원래대로 돌아가기보다 어떻게 하면 연주자도 청중도 더 좋은 예술 문화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소나 레퍼토리 등 모든 측면에서요.

국내 청중들이 클래식을 원하고 있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기회를 통해 느끼게 되었나요?

‘코로나19’로 생중계, 팬미팅 등 비대면 플랫폼이 많이 활성화됐죠. 이런 콘텐츠를 더 원한다는 DM을 많이 받았어요. 제가 팬미팅 같은 자리를 많이 갖는 연주자가 아니었는데, 이번에 그런 것들을 하면서 직접적인 소통을 한 느낌을 많이 받았고 피드백도 받을 수 있었죠. 이런 상호작용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해요. 아티스트가 추구하는 예술과 청중이 추구하는 예술 사이엔 당연히 거리가 있겠죠. 하지만 청중들이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음악에 열광하는지 아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나마 팬분들의 생각과 느낌 등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 <현의 유전학> 앨범 발매 기자간담회 현장 사진 ㅣ 크레디아

앨범 커버의 이미지가 매우 독특해요. 촬영하거나 이미지를 고를 때 신경 쓴 점이 있나요?

제가 누구인지 바로 보여드리기보다 ‘어, 저게 누구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어요. 이 앨범의 구성처럼 다 나타내는 것보다 가리는 게 저를 보여드리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이미지를 보시면 제가 유리를 잡고 있는데 손 모양이 제가 바이올린을 잡는 손 포지션이에요. 무의식적으로 나온 건데 여러모로 평범하지 않은 느낌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그리트의 그림 같은 느낌도 들어서 좋았고요.(웃음)

마지막으로, 앨범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 있을까요? 타이틀곡을 꼽는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제가 알기로 이번 레코딩을 통해 처음 녹음된 곡이 세 곡이 있어요. 제가 작곡한 첫 트랙이랑 ‘집시 멜로디’, 라벨 ‘치간느’ 하프 버전이요. 이렇게 세곡이 저에겐 특별하죠. 특히 라벨 ‘치간느’는 새로운 편성을 시도해 보면서 템포나 제스처 등 많은 것들을 조율한 곡이에요. 옛날부터 알고 있고 연주하던 곡인데 이번에 새로운 곡으로 거듭난 거 같아서 애착이 더 갑니다. 코렐리 ‘라 폴리아’도요. 이 곡을 작업하면서 평소 생각하던 비브라토의 개념도 깨졌고, 즉흥적인 요소들도 많이 넣었다 보니 기억에 남아요. 굉장히 신선한 작업이었어요. 모두 애정이 담긴 곡이지만 그중에서 타이틀곡을 꼽는다면 이 두 곡으로 정하고 싶습니다.

자료|크레디아

<올댓아트 이민정 인턴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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