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옛것 그대로 쏙…조율 없는 파격, 쿨하게 툭 ‘K감성’ 포인트가 되다읽음

박정현 건축비평가

모던한 현대 건축에 박힌 한옥, 한옥의 역설과 부활

1980년대 중반 전주시청사. 오른쪽 위 사진은 현재 전주시청사 측면과 후면.

1980년대 중반 전주시청사. 오른쪽 위 사진은 현재 전주시청사 측면과 후면.

한옥은 한옥대로 현대는 현대대로…‘본모습 변형 없이 공존’시켜 보려는 고민
‘맞배지붕을 한 4칸짜리 한옥’ 콘크리트에 끼워넣은 전주시청사에 고스란히 드러나
설계자 김기웅의 ‘포스트모더니즘 실험’ 파격 시도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후계자는 없어
최근 ‘한옥의 형태’ 리조트 외벽에 박힌 모습 등 한국적 느낌 내는 장치로 도처에 등장

한옥은 지난 세기 건축가와 역사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한옥과 양옥은 함께 태어나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한옥은 한국적인 것과 전통을 담고 있는 물건 중 가장 큰 크기로 전국의 도시에 숱하게 남아 있었다. 건축가들은 새로이 조성된 부지에서 한옥이라는 가상의 상대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속이나 도시 외곽에 세워지기 일쑤였던 미술관, 박물관, 공연장 등도 예외 없이 기와지붕과 씨름을 벌였다. 건물의 성공 여부는 한옥의 이미지를 단박에 불러낼 수 있는지에 달렸다. 이와 정반대로 좁은 골목길에서 한옥은 극복의 대상이었다. 재래식 주택으로 치부되어 개량되고 정비되어야만 하는 열악한 환경의 대명사였다. 동시에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보존해야 하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건축가와 행정가들은 전통·한옥·기와와 다양한 방식으로 대결했다.

여기에 20세기에 지어진 한옥은 사태를 조금 더 복잡하게 꼬이게 만들었다. 개량한옥이나 도시한옥이라 불리는 서울 북촌 등에 지어진 한옥은 꽤 현대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권력자 한 사람이 소유한 큰 땅이 일제강점기에 개발업자에게 팔린다. 늘어난 인구와 부족한 주택 사정에 맞추어 수십 개의 필지로 분할된다. 좁은 필지에 적합하게 여러 채로 이루어지곤 하던 이전의 공간구조가 압축적으로 바뀐다. 집마다 다 달랐던 목재도 한번에 수십 채를 짓기 위해 비슷한 규격으로 통일된다. 그리고 일시에 분양 및 판매된다.

다시 말해 서울, 전주 등에서 1930년대 이후에 지어진 도시한옥은 지배계급의 변화, 산업화와 인구 집중, 대량생산을 위한 평면과 부재의 조정, 판매 시스템 등 모든 것이 합리적이며 현대적이었다.

한옥의 생산 과정이 일부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해도, 형태는 도무지 현대적일 수가 없었다. 나무를 재단해 건물의 뼈대를 만들어 세우고, 건물 전체 높이뿐 아니라 건설 공정과 비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거대한 지붕을 덮어 완성하는 한옥의 형태적 특징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이다. 철, 유리, 콘크리트를 기본 재료로 삼고, 군더더기 없는 직육면체를 추구한 현대 건축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한옥은 케케묵은 것으로 치부해 도외시할 수도, 현대와 직접적인 연속성이 있다고 보기도 힘든 것이었다. 한옥을 현대와 공존시키기 위해서는 묘수가 필요했다.

현대적 재료로 한옥의 형태를 재현하는 것이 그 한 가지 방식이었다. 이 연재에서 처음 다룬 종합박물관을 필두로, 경주, 광주 등의 전국 박물관, 경주 통일전과 청와대로 이어지는 이 리스트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갱신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옥에서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공간, 특히 그 공간을 만들고 산 ‘선비들의 정신’이라는 태도다. 이 흐름은 외부 공간, 마당, 비움, 허(虛) 등의 개념을 경유해 지금까지 이어진다. 서로 다른 이 두 입장은 전자는 한옥에서 형태만 남긴 것이고, 후자는 형태를 지워낸 것이다. 다른 길은 없을까? 한옥과 현대를 섞거나 조화시키려 하지 않고, 한옥은 한옥대로 현대는 현대대로 그대로 두고 공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이 김기웅의 설계로 1981년 완공된 전주시청사다. 전주는 한옥이 도시 전체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도시이다.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된 풍남동과 교동 일대는 요즘 전주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다. 온전한 한옥으로 1929년에 지어진 전주역은 1981년까지 지금의 전주시청사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서울과 부산 등지의 역사(驛舍)가 르네상스풍 양식 건물이었음을 감안하면, 한옥의 영향력이 전주에서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1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새로 지어진 지금의 전주역은 구 전주역을 콘크리트로 그대로 재현했다. 1977년 처음 건립된 뒤 도로 확장을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4년 재건된 호남제일문, 1990년 개관한 전주박물관,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앞두고 새롭게 개통한 전주 톨게이트 역시 기와를 올렸다. 예나 지금이나 전주의 공공건물은 기와를 이고 있다. 콘크리트인지 나무인지는 나중 문제다.

김승회가 설계한 부여롯데리조트. 오른쪽 아래 사진은 부여 롯데아웃렛. 박정현 제공

김승회가 설계한 부여롯데리조트. 오른쪽 아래 사진은 부여 롯데아웃렛. 박정현 제공

그러니 전주시청사 역시 한옥의 자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기웅의 선택은 파격적이다. 서울의 남대문, 전주의 풍남문을 연상시키는 아치문이 있는 마름모꼴 기단을 두고 그 위에 짧은 당간지주처럼 수직 매스를 올렸다. 이 사이에 맞배지붕을 한 4칸짜리 한옥, 콘크리트로 모방한 것이 아닌 나무와 기와로 만든 진짜(?) 한옥이 그야말로 ‘끼워져’ 있다. 기와지붕의 양끝은 좌우 매스에 파묻힌 수준이다. 이곳에 한옥이 있어야 할 기능적, 미적, 조형적, 구조적 이유는 당연히 없다. 한옥을 온전하게 앉히기 위한 배려도 없다. 건물 최상부에 한옥 한 채를 올려 정자처럼 사용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한옥 위로 열린 공간 최상부에는 스페이스프레임(삼각형을 반복해 만드는 구조물)이 배치되어 있었다(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시청의 업무 공간은 측면과 후면에 배치했다. 오른쪽 측면 1층에 위치한 민원실에 기와지붕을 제외하면, 측면과 후면은 철저히 기능적이고 현대적인 오피스 빌딩의 문법을 따른다. 창문을 내고 외벽에 돌을 붙인 방식에서 섬세한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러나 측면과 후면은 한옥이 박힌 정면과 어떤 연결고리도 갖고 있지 않다. 당대 한국에서 이처럼 전후좌우의 논리가 제각각인 건물은 무척 드물다. 서로 긴밀히 얽힌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는 유기적 전체, 관습적인 비례 체계 등을 완전히 배제하는 일은 지금이라고 해서 그리 쉬운 선택지가 아니다. 한옥을 빼놓더라도 전주시청사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별다른 조율 없이 서로 맞닿아 있다.

서로 다른 것, 복합적인 것,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충돌하는 것을 중화하거나 조절하지 않고 나란히 둔다는 생각은 모더니즘의 강령에 반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기하학이라는 이념, 합리적 계획에 따라 기능을 추구하면 형태는 저절로 도출된다는 믿음, 이런 가치는 복잡한 형태나 다채로운 색이 아니라 단순한 형상과 흰색으로 가장 잘 드러난다는 미학이 모더니즘의 기초였다. 이에 대한 반격을 처음 본격적으로 개진한 이가 로버트 벤추리(1925~2018)다. 건축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물꼬를 튼 벤추리는 역설적이게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19세기 고전주의를 근거로 한 보자르(Beaux-Arts) 교육을 받았다. 변화하지 않는 미적 기준,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형태 규범, 부분과 전체의 조화를 중시하는 보자르 교육 체계에는 우등 졸업생에게 로마로 유학을 보내주는 전통이 있었다. 서양 예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이 전통을 자국으로 전파하는 목적으로 시작된 제도다(1968년 학생운동의 여파로 폐지된다). 벤추리는 이 장학금으로 1950년대 이탈리아에 머물며 건축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벼려냈다.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된 국가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구식 교육 체계가 모더니즘에 균열을 내는 이론을 촉발한 셈이다.

이탈리아에서 벤추리는 고전주의의 온전함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일상생활의 필요에 따라 덧대고 고쳐나간 흔적들을 발견한다. 도시의 모습은 순수한 것보다는 혼성적인 것에, 깨끗한 것보다는 복합적인 것에, 정형보다는 비정형에, 명확한 것보다는 뒤틀어지고 복잡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벤추리는 모순, 애매모호함, 불합리성, 이중성을 건축이 배척하지 않고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이 정리된 책이 1966년에 출간된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김기웅이 이끈 삼정건축은 다른 어느 곳보다 빨리 적극적으로 벤추리를 읽은 곳이었고, 김기웅은 당대 누구보다 미국발 포스트모더니즘 흐름을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실험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파동으로 전 국민의 열기와 관심 속에서 진행된 독립기념관 현상설계(1983)에서 김기웅은 당선된다. 동양에서 가장 큰 기와지붕을 얹은 독립기념관은 전통 건축을 모티브로 삼은 숱한 건물 중에서도 가장 퇴행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듬해 김기웅은 독립기념관을 로버트 벤추리의 이론으로 옹호했다. 보편적 문명과는 대비되는 지역적 문화의 사례라는 입장이었다. 1980년대 김기웅의 작업은 어떤 면에서는 반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가장 앞선 전선을 개척해나가기도 했다.

이질적이고 대립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병치하는 전략이 전주시청사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건물은 드물다. 이 건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라도, 현대 건축이 한옥을 대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전주시청사의 파격적인 시도는 이렇다 할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건축계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전통 건축의 정수는 형태가 아니라 외부 공간에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졌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진지한 건축가라면 피해야 한다는 정서가 만연해졌기 때문이다. 그사이 한옥은 남루하고 낡은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가장 쿨한 장소로 거듭났다. 이제 누구도 리조트 외벽에 박힌 한옥을 낯설게 느끼지 않는다. 한옥은 매끈한 최신 건물에 한국적인 느낌을 더하는 장치로 도처에 등장한다. 지난 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험한 건축가들 가운데 백제풍 용마루 곡선을 과시하는 콘크리트 한옥 아웃렛 매장이 등장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박정현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3)옛것 그대로 쏙…조율 없는 파격, 쿨하게 툭 ‘K감성’ 포인트가 되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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