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을 이용한 예술’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총천연색 물감이 시시각각 대형 스크린에서 쏟아지고 분출하는 듯한 환상적 이미지를 만들어낸 레픽 아나돌의 작업이 대표적으로 떠오른다.
AI 기반 미디어 아티스트 아나돌의 작품이 2022년 11월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1층 벽을 가득 채운 것은 미술계에서 ‘사건’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현대미술관 벽면 전체를 AI가 만든 이미지가 채우고, MoMA를 찾은 관람객이 홀린 듯 영상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AI가 현대미술의 진지한 창작 도구가 됐음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아나돌은 MoMA가 200년간 수집한 예술품 13만8000여 점을 AI에게 학습시켜 몽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그날의 빛과 관객의 움직임·소리·날씨 등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반영해 ‘살아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아나돌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10월 서울 여의도 63빌딩 로비에 아나돌의 작품 ‘머신 시뮬레이션: 라이프 앤 드림스-희로애락’이 설치됐다. 행복을 느낄 때 나타나는 뇌파, 불꽃놀이, 한국 전통 음악, K팝 뮤직비디오 등 각종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AI가 인간의 고유한 영역인 창작 분야까지 침범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AI는 이미 미술관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작가들은 AI를 ‘새롭고 재미난 도구’로 인식하며, 이를 이용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AI가 만든 오류가 작가에게 영감을 제공해 작품으로 탄생하거나(노상호), AI가 수집한 데이터가 언어와 목소리가 되어 전시를 조율한다(필립 파레노). AI로 구동되는 게임을 만들어 관람객이 개인화된 감상을 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이안 쳉). 현재 서울 미술관과 갤러리에선 AI를 이용한 전시 세 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오는 4월 AI를 소재로 한 전시 ‘예측(불)가능한 세계’를 연다. 이안 쳉을 비롯해 히토 슈타이얼, 김아영 등 8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AI가 만든 오류가 작가에겐 영감
불타오르는 눈사람, 머리가 두 개인 사슴, 여섯 개 손가락이 달린 손.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노상호 작가의 개인전 ‘홀리(Holy)’에서 볼 수 있는 기이한 이미지다. 미디어 환경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작업해 온 노상호는 이번에 이미지 생성 AI 미드저니가 만든 오류를 캔버스로 옮겼다. 온라인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미드저니에 입력해 재해석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의도치 않은 오류가 작가에겐 ‘영감의 순간’이었다. 전시를 대표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불타는 눈사람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장면이지만 AI는 그럴싸한 이미지로 만들어냈다. 노상호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2022년 말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AI가 생성한 이미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흥미를 느껴 AI를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던 중 발생한 오류에 끌려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눈은 액체였다가 고체가 되고, 뭉쳐서 눈코입을 붙이면 ‘사람’이 됐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면 사라져 버리기도 하죠. 사슴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오가는 영물로 여겨집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세계를 오가는 존재를 은유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생성된 이미지를 대형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에선 에어브러시를 사용했다. AI가 생성한 이미지의 매끄럽고 인위적인 느낌을 재현하고, 포토샵에서 그림을 그릴 때 쓰이는 에어브러시 기능에 착안했다. 디지털 이미지의 매끄러운 질감을 살리는 동시에 눈사람 형상 위에 석고를 발라 회화의 질감을 살렸다. 반짝이는 안료를 사용해 그림을 눈으로 직접 봤을 때만 빛에 따라 반짝임을 볼 수 있게 했다.
노상호에게 AI는 예술의 수단·도구이자, 협업의 상대다. 노상호는 “AI는 세상을 바라보는 카메라, 필터 같은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AI에 천착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이 AI를 왜 많이 사용하는지, 끌리는지에 관심을 두고 작업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생’을 기억하는 AI 거북이
대형 스크린을 가득 채운 영상의 주인공은 거북이, 무대는 거실 바닥이다. 거북이는 먹이를 먹고, 장애물에 부딪히며, 심지어 주인에게 밟히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돌연 죽는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거북이는 환생해 다시 거실을 탐험하기 시작한다. 이전 생의 기억(데이터)을 20%만 지닌 채, 80%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서울 강남구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안 쳉의 개인전 ‘사우전드 라이브즈(Thousand Lives)’에 선보인 신작이다. 게임엔진, AI 등 기술과 예술을 결합한 작품을 선보여 온 쳉은 뉴로-심볼릭(neuro-symbolic) AI모델에 의해 구동되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선보였다. 거북이 사우전드는 거실을 탐험하며 환경과 관계성을 인식하고 추론해 행동하며 학습한다. 죽게 되면 이전 데이터의 20%만을 보존한 채 다시 짧은 생을 시작한다. 게임은 관람자의 시점을 인식해 관람자의 시선과 움직임에 따라 화면이 움직여 개인화된 감상이 가능하다.
‘사우전드 라이브즈’는 번외편과 같다. 2022년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쳉의 개인전 ‘세계건설’에서 선보인 장편 애니메이션 ‘BOB 이후의 삶 : 찰리스 연구’이 함께 전시되고 있는데 애니메이션을 통해 쳉의 총체적인 세계관을 볼 수 있다. 신경계에 결합한 인공지능 ‘BOB(Bag of Beliefs, 신념의 가방)’이 나를 대신해 인생의 최적경로를 알려준다는 설정의 애니메이션은 ‘인공지능이 나보다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삶에도 최적경로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사우전드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찰리스의 반려 거북이로, 이번에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 ‘천개의 삶’을 살아간다.
목소리가 된 AI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 ‘목소리(Voices)’에서 AI는 주요한 설치작품이자 작품 전체를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미술관 야외에 설치된 13m 높이의 타워 ‘막’은 미술관 외부의 온습도, 풍향, 소리 등을 수집해 이를 새로운 언어 ‘델타에이’로 변환하고,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전시의 청각적 요소를 차지한다. ‘델타에이’의 목소리는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를 학습해 만들어 화제가 됐다. AI ‘막’은 전시장 전체의 다양한 조명과 소리를 조율하며 실시간으로 전시를 움직인다. 파레노는 “AI는 구성을 위한 훌륭한 도구, 작곡을 위한 악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술 기반 작품 “빨리 낡아버리기도”…기술 통한 메시지가 중요
홍이지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을 때, 예술가들은 새로운 미래를 앞서보는 선구안을 갖고 적용해 본다”라며 “기술이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발전하면서 사용하는 입장에서도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아 실험해 보고 들여다보는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술 확산 속도 너무 빨라 저작권 문제와 같은 부작용이 AI 기술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확산돼 걱정과 우려가 된다”고 덧붙였다.
홍 큐레이터는 “기술을 활용한 예술작품의 경우 굉장히 빨리 늙어버린다는 단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작품이 완성되면 이미 다음 모델이나 기술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며 “‘시간의 낡음’을 극복하고 동시대성을 어떻게 간직해서 작품으로 남길 것이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철학적 사유를 하게 되는 것 같다. 기술의 최첨단성을 말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기술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에 훨씬 더 관심을 두고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