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미술관 전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한·중·일 불교미술 젠더관점 조명 첫 전시
95년 만에 국내 돌아온 금동 관음보살 입상 등 걸작
경전에 ‘여성 성불 불가’ 불구···차별 넘어 탈바꿈
어머니였다가, 시체였다가, 관음보살이 되었다가….
불교의 젠더는 남성이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는 고대 인도의 샤카족의 왕자였다. 법화경에 “여성의 몸에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어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돼 있다. 여러 불교 경전에서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때문에 부처와 보살을 그린 불교미술의 주인공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하지만 불교미술 속에 여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성들은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석가모니를 낳고 기른 어머니·양육자의 모습으로, 썩어가는 육신의 모습으로, 자비로운 관음보살의 모습으로, 여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당대의 성역할 규범과 제약을 반영하는 동시에 차별의 틈새를 빠져나가 탈바꿈했다. 화폭 밖에도 여성들이 있었다. 성불과 왕생을 기원하던 신자부터 불교미술 중흥을 이끈 막대한 후원자로, 불교미술 제작의 주체로 존재했다.
경기도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은 한·중·일 삼국에서 발전해 온 불교미술을 젠더 관점에서 바라보는 전시다. 동아시아 불교미술 속 여성들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조망한 세계 최초의 대규모 전시인 동시에, 해외에 있어 볼 수 없었던 진귀한 작품들을 직접 볼 수 있어 기획과 내용 면에서 놓치면 아까울 전시다. 95년 만에 국내에 선보이는 백제 금동 관음보살 입상을 비롯해 국내 일반 관람객에게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 9건, 해외에서 들여와 한국에 최초로 전시되는 작품 47건 등 불교미술 걸작 92점을 젠더의 맥락으로 재배치했다. 조선시대 15세기 불전도 가운데 한 세트였던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를 세계 최초로 동시에 전시한 점도 눈길을 끈다.
전시를 기획한 이승혜 책임연구원은 “미술계에서 여성을 조명하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불교미술에도 여성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는데, 한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전시를 기획했다”며 “불교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여성은 불교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처의 어머니, 부정한 몸···
무려 얼마만의 만남일까. 조선시대 15세기 불전도(석가모니의 일생 주요 장면을 그린 그림) 중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가 일본과 독일에서 바다를 건너와 나란히 걸렸다. 일본 혼가쿠지에서 빌려온 ‘석가탄생도’, 독일 쾰른 동아시아미술관에서 빌려온 ‘석가출가도’가 한 자리에 전시된 것은 세계 최초다. 두 그림은 석가모니의 어머니 또는 아내의 모습으로 그려진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태자를 나으신 후에) 부인이 나무 아래에 있으셨는데…” 석가모니 일대기인 ‘석보상절’의 구절이다. 석가탄생도에선 출산 직후 마야부인이 나무 아래 대좌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정수리 위에 네 마리 봉황이 달린 장식을 얹고 그 위에 가체를 올린 모습이 조선 왕실 여성의 ‘큰머리’를 연상시킨다. 앞에선 금빛으로 빛나는 석가모니가 오른손으로 하늘을,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탄생게인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고 있다. 마야부인의 모습에서 조선 왕실 여성들의 권위와 마야부인처럼 위대한 어머니가 되고자 했던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석가출가도’에선 남편의 출가를 알게 된 아내 구이가 바닥에 쓰러져 울부짖는 비통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한국에 처음 전시되는 중국 원나라 14세기 작품인 ‘이모육불도’에선 마야부인의 여동생이자 석가모니의 양모였던 대애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애도는 석가모니에게 수차례 청한 끝에 교단에 들어간 여성 최초의 출가자이지만,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이모육불도’에선 어린 석가모니를 돌보는 양육자로서의 면모가 그려진다. 여성 최초 출가자란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불교미술 속 대애도는 주로 양육자의 모습으로 묘사됐다.
일본 무로마치시대인 1501년 제작된 ‘구상시회권’도 흥미롭다. 출가한 이가 육체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기 위해 육체의 부정적인 모습을 바라보는 수행법에서 유래한 불화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시신이 부패해 뼈와 가루만 남게되는 과정을 그렸다. 적나라하게 묘사된 여성의 신체는 시신을 관찰하고, 그림을 감상한 주체가 남성이었음을, 여성의 신체는 정념의 대상이자 부정한 몸으로 그려졌음을 보여준다.
관음보살, 여신이 되어
매혹적인 ‘백제의 미소’를 보여주는 금동 관음보살 입상으로 시작하는 ‘관음 : 변신과 변성’ 섹션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다. 일제시대 일본인에 팔린 뒤 자취를 감췄다 95년 만에 국내에 전시되는 금동 관음보살 입상을 시작으로 33가지 모습으로 자유자재로 변신했던 관음보살의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최고의 화제작 금동 관음보살 입상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관음보살은 본래 남성형 신격이었지만, 자비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여성적으로 묘사되다 나중엔 여성으로 묘사되기에 이른다. ‘백제의 미소’가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중국 명청대에 그려진 관음보살상은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명나라 시대 제작된 ‘송자관음보살도’는 임신과 출산을 관장하는 송자관음을 그린 그림으로, 그림 속 아이를 안고 있는 관음은 마치 ‘삼신할매’와 같이 인자한 모습을 띤다.
중국 명청시대에 제작된 백자 관음보살상들을 전시한 공간은 새하얀 관음보살들이 파도를 타고 일렁이듯 배치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중국 복건 지역의 덕화요에서 생산된 백자상은 머리카락을 두건으로 가리고 있거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게중에 오뚝한 코에 곱슬머리를 한 여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입상은 성모마리아상을 연상시킨다. 유럽 시장을 겨냥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미술의 후원자, 창작자 여성의 모습에 주목
“이전 겁의 불행으로 여자의 몸을 받았으니…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고려시대 최고위층 여성이었던 김씨 부인이 ‘감지금니 묘법연화경1-7’의 발원문에 적은 내용이다. “여성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경전 내용에 좌절했던 여성들에게 여덟 살 난 용왕의 딸이 남성으로 몸을 바꾸어 성불했다는 법화경의 이야기는 희망이었다. 남성의 몸으로 변해야 출가할 수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성불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많은 여성들로부터 환영받았다. 전시에선 까만 감지에 금으로 섬세하게 그려넣은 ‘감지금니 묘법연화경1-7’이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불교미술 최대 후원자였던 조선왕실 여성들의 발원으로 제작된 작품들도 인상적이다. 어린 아들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했던 문정왕후가 임금과 자신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후사를 기원하며 발원한 ‘영산회도’는 자색 비단 위에 금선으로 석가모니와 보살, 십대제자, 팔부중을 섬세하게 그려넣었다. 이 역시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창작자로서의 여성’의 존재에도 주목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들에 의해 제작된 자수 그림, 복식 등을 전시했다. 일본의 ‘자수 아미타여래삼존내영도’는 여성의 머리카락을 부처와 보살의 머리카락을 수놓는데 사용했다. 부정한 몸으로 여겨졌던 여성의 신체 일부가 부처의 형상을 구현하는 재료가 된 것이다.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물’은 1662년 나인 노예성이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부부의 장수를 바라며 불상 안에 봉안한 것으로, 저고리와 배자를 포함한 556점의 복장물이 13년 만에 모두 선보인다. 전시는 6월16일까지. 1만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