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기계와 노동자 ‘유령’이 점령한 터빈홀···“기괴한데 끌리네”

런던 | 이영경 기자

영국 테이트모던 터바인홀 ‘이미래: 열린 상처’

한국인 작가 최초·최연소 작가 전시로 주목

‘내장’ 드러낸 거대한 터빈에서 흘러내리는 액체

공중에 매달린 100개의 ‘유령’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서정적

“상처와 함께하는 삶이 아름다워”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 전경. 테이트모던 제공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 전경. 테이트모던 제공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 모습. 테이트모던 제공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 전시 모습. 테이트모던 제공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Turbine Hall)에서 열리고 있는 이미래의 전시엔 수식어가 여럿 붙는다. 터빈홀에서 전시를 여는 최연소 작가이자 첫 한국인 작가의 전시….

‘첫’과 ‘최연소’란 수식어는 영광스럽지만 의구심도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동안 터빈홀에서 전시를 연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의구심은 커진다. 루이스 부르주아, 아니쉬 카푸어, 올라퍼 엘리아슨 등 세계적 작가들이 터바인홀을 자신의 무대로 삼았다. 앞선 작가들의 명성이 드리운 그림자에 겁먹을 법도 하지만 이미래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신났다”고 말한다.

8일(현지시간) 확인한 이미래의 터빈홀 전시 ‘현대 커미션: 이미래: 열린 상처(Open Wound)’는 의구심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이미래는 3300㎡ 면적, 35m 높이의 거대한 터빈홀을 ‘신나게’ 자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내장을 드러낸 듯 촉수를 늘어뜨린채 느리게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분홍색 액체, 공중에 유령처럼 매달린 천으로 가득한 기괴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매혹을 지닌 ‘이미래 월드’로.

테이트모던 터빈홀에 설치된 이미래의 ‘열린 상처’의 핵심 작품인 터빈의 모습. 테이트모던 제공

테이트모던 터빈홀에 설치된 이미래의 ‘열린 상처’의 핵심 작품인 터빈의 모습. 테이트모던 제공

지난 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미래 작가 (오른쪽)가 앨빈 리 큐레이터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런던|이영경 기자

지난 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미래 작가 (오른쪽)가 앨빈 리 큐레이터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런던|이영경 기자

이미래는 테이트모던 미술관의 전신이었던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1891~1981)의 역사성과 건축적 구조를 정면으로 다룬다. 발전소의 터빈을 전시장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공간의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어서 공간을 채우는 큰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발전소에서 돌아가던 터빈을 되살려 전시의 심장같은 중심 오브제로 두고 싶었어요.”

이날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미래가 말했다. 이미래는 발전소가 문을 닫은 뒤 40년 넘게 잠자고 있던 크레인을 처음으로 움직였다. 터빈홀의 크레인을 전시에 활용한 작가는 이미래가 처음이다. 크레인 아래엔 과거 터빈의 모습에 가깝게 제작한 터빈을 달았다.

전시의 ‘심장’과도 같은 터빈이 느리게 회전하면서 산업혁명기 화력발전소의 유령이 본격 소환된다. 내장을 드러낸 동물의 신체를 연상시키는 터빈에선 탁한 분홍색의 끈적이는 액체가 흘러내리고, 액체는 터빈 아래 철골구조물에 걸린 천을 적신다. 염색된 천은 건조된 후 공중에 매달린다.

터빈은 작품인 동시에 전시를 생산하는 기계장치가 되는데 이는 산업혁명기의 생산 시스템을 전시 속에 재현한 셈이다. 천장에 걸린 54개의 쇠사슬엔 현재 100개의 천이 걸려있는데, 전시가 끝나는 내년 3월 무렵엔 150개로 늘어날 예정이다. 전시 과정에서 작품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증식한다. 이미래는 “커튼 뒤에 숨어 있던 작업과정을 처음으로 전시장 밖으로 꺼내놓았다”고 말한다.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에서 열리고 있는 ‘이미래: 열린 상처’에서 공중에 ‘가죽 조각’들이 매달려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에서 열리고 있는 ‘이미래: 열린 상처’에서 공중에 ‘가죽 조각’들이 매달려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터빈에서 흘러내린 액체가 ‘가죽 조각’을 적시고 있다. ‘가죽 조각’은 건조 과정을 거치면 공중에 매달리게 된다. 런던|이영경 기자

터빈에서 흘러내린 액체가 ‘가죽 조각’을 적시고 있다. ‘가죽 조각’은 건조 과정을 거치면 공중에 매달리게 된다. 런던|이영경 기자

흥미로운 것은 공중에 걸린 유령과 같은 천 ‘가죽(skin) 조각’이다. 철골 구조물에 걸쳐진 탁한 분홍색의 천은 마치 사람의 피부를 연상시킨다.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가기 전 옷과 소지품을 도르래를 이용해 천장에 매달아 보관하던 ‘탈의실’에서 영감을 얻었다. 거대한 터빈이 산업혁명기 기계를 재소환했다면, ‘가죽 조각’을 통해 산업혁명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의 신체(피부와 같은 옷)와 영혼도 함께 불러온 것이다. 이미래는 “기념물(monument)을 봤을 때 느끼는 아름다움이나 경외감의 저변엔 무수한 노동력과 일꾼들이 있다. 익명이 되어 사라지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미적경험에 융합돼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대한 터빈은 철로 만들어진 강력한 기계인 동시에, 내장과도 같은 속을 훤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취약함도 느끼게 한다. 공중에 매달린 천 또한 연약한 피부를 닮았다. 때문에 작품의 첫인상은 기괴하고 공포스럽지만, 지켜볼수록 묘한 서정성이 느껴진다. 이는 전시명 ‘열린 상처’와 연결돼 있다.

“산업주의 자체가 일종의 흉터라고 생각합니다. 열린 상처에 대한 이미지는 작가가 예술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지만 사실은 바꿀 수 없다는데서 좌절감을 느끼는 ‘예술가의 상처’에서 출발했어요. 열린 상처는 세상을 바꿀 없다는 무기력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라 상처가 열린 채로 닫히지 않는다는데 방점이 있습니다. 상처와 함께 사는 것, 굳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전시에서 ‘소리’ 또한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터빈에서 떨어지는 액체의 소리, 터빈이 회전할 때 내는 철커덩 하는 기계 소리가 홀을 가득 채운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청량한 소리와 육중한 기계음이 대조를 이룬다.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에 전시중인 이미래의 ‘열린 상처’ 전시 전경. AP연합뉴스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 터빈홀에 전시중인 이미래의 ‘열린 상처’ 전시 전경. AP연합뉴스

현지 언론은 다가오는 할로윈데이와 연관시켜 전시를 해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가디언은 “촌스러운 할로윈 장식만큼이나 키치한 공간”이라며 박한 평가를 내놓은 반면, 타임스는 “끔찍하지만 천상적인 터빈홀 쇼”, 텔레그래프는 “할리우드 최고의 무대 디자이너도 이보다 더 화려한 작품을 만들 수 없다”고 호평했다.

가디언은 “이미래의 예술은 비참하고 슬픈 것, 무섭고 역겨운 것을 목표로 한다…지나치게 익혀버린 비참함은 충분히 비참하지 않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미래의 작품에서 ‘비참함’만을 읽는 것은 절반의 해석이다. 이미래는 기괴함을 통해 아름다움 또한 보여주고자하기 때문이다. 이미래는 “저에게는 아름다움이 가슴아픈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감동한다는 건 심장이 움직인다는 뜻인데, 이는 역경과 비극을 함께 겪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3월1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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