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인류는 ‘집단적 뇌’를 통해 진보했다

김지혜 기자
[책과 삶]인류는 ‘집단적 뇌’를 통해 진보했다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슈테판 클라인 지음·유영미 옮김
어크로스 | 284쪽 | 1만6800원

창조성은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다. 동물도 창조적이다. 고릴라는 막대기를 버팀목으로 활용해 강을 건너고, 오랑우탄은 가시덤불에서 열매를 찾을 때 나뭇잎을 장갑처럼 사용한다.

계획적으로 특정 목적에 맞는 도구를 만드는 동물들도 있다. 뉴칼레도니아 까마귀는 나뭇가지와 종려나뭇잎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려 애벌레와 성충을 낚는다. 호모사피엔스의 조상들이 300만년 전 최초의 석기를 만든 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유전자를 해독하고 교향곡을 작곡하며 화상회의로 업무를 하는 우월한 지적 능력으로 지구를 지배한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독일의 과학저술가 슈테판 클라인은 이러한 결과를 책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에서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 배우고 협력하는 인간의 ‘집단적 뇌’에서 찾는다.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시대에 그려진 파시에가 동굴벽화. 이 그림은 호모사피엔스 이전부터 인류종이 소통의 도구로 예술을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어크로스 제공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시대에 그려진 파시에가 동굴벽화. 이 그림은 호모사피엔스 이전부터 인류종이 소통의 도구로 예술을 활용했음을 보여준다. 어크로스 제공

인간만의 ‘창조적 사고’의 원천은
단순히 ‘커다란 뇌’가 아니었다
호모사피엔스가 머리가 좋아진 건
소통·교류를 통한 창조성의 축적과
인구 증가의 ‘폭발적 선순환’ 때문

책은 인간만이 갖는 남다른 능력인 창조적 사고의 비밀을 찾기 위해 330만년 전의 석기 유적지부터 15세기 구텐베르크 인쇄소를 거쳐, 앨런 튜링, 알파고로 이어지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탄생까지 창조의 궤적을 좇는다.

이 책은 창조적 사고의 비밀을 탐사하는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의 통념을 반박한다. 하나는 창조적 사고는 모차르트, 피카소, 아인슈타인 같은 인류의 위대한 지성에게만 주어지는 남다른 능력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식량 부족에 처한 초기 인류종이 육식을 시작한 결과 얻은 ‘커다란 뇌’가 창조적 사고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뇌과학과 고고학, 인지과학의 최신 연구들을 인용하며 “창조적 사고는 집단적 뇌에서 나온다”는 점을 증명해간다. 즉 “문화 속에 녹아든 타인의 경험을 알고 그 토대 위에서 생각하는 사람만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가지며 “집단적 뇌에 축적된 지식은 아이디어를 빚는 재료”가 된다는 이야기다.

책은 우선 창조적 사고의 출발점이 ‘커다란 뇌’가 아니었다는 점부터 밝혀 보인다. 2011년 7월 고고학자 소니아 아르망은 우연히 케냐 투르카나호 기슭 로메크위 유적지에서 놀라운 발견을 한다. 그때까지 알려진 인간 혹은 동물의 유물보다 거의 100만년은 더 오래된, 최소 330만년 전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뗀석기가 발견된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거의 150점의 석기를 발견했는데, 뭔가를 자르는 도구로 보이는 날카로운 발굴물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날을 만들 때 망치와 모루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발굴물들이었다.

즉 이 석기들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인류종인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옵스들은 이미 서로에게 배우고, 아이디어를 내고, 의견을 전달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의 뇌 용적은 오늘날 인간의 3분의 1을 간신히 넘는 수준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인간만이 갖는 창조적 사고의 원천은 단순히 뇌의 크기에서 오지 않는다. 복잡한 의견을 주고받는 행동과 이와 함께 발달한 뇌의 부분인 ‘브로카 영역’ 덕분에 인간은 타인의 활동을 모방함으로써 좋은 아이디어를 공동체에 뿌리내리는 독보적인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초기 인류가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이 브로카 영역은 인간을 어떤 유인원보다 참을성을 갖고, 정확하게, 또 즐겁게 타인을 모방하며 스스로의 착상을 만들어가는 종으로 만들었다. 로메크위의 석기들은 인간의 창조적 사고가 ‘혼자’서는 결코 불가능한 일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책은 330만년 전 석기의 발명 이후 오랫동안 답보 상태를 유지하던 인간의 창조 능력이 약 4만년 전 급격히 발전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주먹도끼와 칼 등 간단한 도구만을 만들어오던 인류는 4만년 전 갑자기 인상적인 그림, 조각, 피리, 새롭고 정교한 도구들을 폭발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앞선 많은 연구들은 이때부터 호모사피엔스가 이름에 걸맞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펼쳐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저자는 호모사피엔스는 이미 30만년 전에 진화한 인류로 4만년 전 당시 전혀 새로운 존재가 아니었다고 반박한다.

그렇다면 호모사피엔스의 머리가 갑자기 좋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가 찾아낸 답은 간명하고 명확하다. 4만년 전을 전후로 세계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점이다.

사람이 많을수록 더 많은 소통과 교류가 일어났고, 아이디어도 더 많이 등장했다. 그렇게 등장한 새로운 아이디어는 다시금 생존을 돕고 인구가 다시 늘어나며 폭발적 선순환을 가능케 했다. 다시 말해 “약 4만년 전에 커진 것은 호모사피엔스 개개인의 뇌가 아니라 집단적 뇌”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집단적 뇌’의 성장은 예술이라는 상징의 발명에 힘입었다. 저자는 2017년 물리학자 디르크 호프만과 함께 스페인 북부의 파시에가 동굴에서 본 네안데르탈인의 벽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소 6만4000년 이상 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인 이 벽화는 호모사피엔스만의 전유물로 여겨진 예술적·정신적 능력이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책은 파시에가 동굴의 벽화를 통해 인류의 소통과 교류를 가능케 한 ‘상징’의 발명을 이야기한다. 오늘날 예술은 흥미로운 여가활동 정도로 여겨지지만, 태초의 예술은 “상징을 만들어 인간 무리를 생존에 유리하게 하며, 인간을 서로 뭉치게 하는” 용도로 고안됐다.

가령 조개껍데기가 신분과 개성을 상징하는 장신구로 다시 태어날 때 이는 “단순히 연체동물의 석회질 껍데기이기를 중단하고 공동생활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상징은 이성의 도구다. 처음엔 나무에 문양을 새기고, 바위벽에 그림을 그리고, 나아가 석판에 문자와 그림을 새기고, 훗날에는 파피루스에 붓으로 문자를 쓰면서 사람들은 정보를 자신의 뇌 밖에서 다루고 축적하는 데 익숙해졌다.

인류의 지적 진보는 상징을 이용한 추상적 사고의 오랜 축적 위에서 가능했다. 목욕탕에서 넘치는 물을 보고 불현듯 “유레카!”를 외친 고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발견 역시 마법처럼 번뜩인 천재적 발상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 저자는 아르키메데스가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적게는 5만권 많게는 50만권의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소장돼 있었을 것이라는 연구를 인용하며, 아르키메데스의 발견 역시 그의 정신적 풍경을 확장해 준 ‘집단적 뇌’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1492년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표정 연구. ‘모나리자’의 신비롭고 독창적인 얼굴 묘사는 다빈치가 체계적으로 감정 표현을 연구하며 탐구한 창조성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1492년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표정 연구. ‘모나리자’의 신비롭고 독창적인 얼굴 묘사는 다빈치가 체계적으로 감정 표현을 연구하며 탐구한 창조성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소수 권력자가 독점하던 ‘지식’은
인쇄술 발명 후 보편적 상징이 돼
세계적으로 뇌가 연결되는 시대로
인류의 ‘탐구적 창조성’도 급성장

소수 권력자가 독점하던 지식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후 세계인의 것이 되었다. 바야흐로 전 세계적으로 뇌가 연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시기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 바로 ‘탐구적 창조성’인데, 저자는 이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해법을 발견하기 위해 기존 가능성을 토대로 탐구하는 창조성”이라고 정의한다. 마치 콜럼버스가 천문학자이자 출판업자인 레기오문타누스가 펴낸 <천체위치추산표>를 들고, 신대륙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항로를 개척한 것과 같은 창조를 말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와 같은 신비로운 얼굴을 그려낸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신내림처럼 찾아온 영감 때문이 아니라, 기괴한 초상화를 연속적으로 그리며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 표현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던 선행 작업 덕분이라는 예시도 등장한다. 인류가 구축한 탐구적 창조성이란 기존에 알려진 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를 변주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셈이다.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인공지능이 그린 가상의 초상화로 “인간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는 평을 받았지만, 책은 오히려 컴퓨터 연산을 작품화한 인간의 정신을 높이 산다.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인공지능이 그린 가상의 초상화로 “인간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는 평을 받았지만, 책은 오히려 컴퓨터 연산을 작품화한 인간의 정신을 높이 산다.

인공지능 등장에 위기를 맞았지만
인간에게는 기존 판을 초월하는
‘변혁적 창조성’의 능력이 있다

탐구적 창조성은 인간보다 더 빨리, 많은 가능성의 범위를 검토할 줄 아는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게 됐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곧 인간의 창조적 사고의 ‘끝’이 아님을 강조한다. 인간에게는 기존의 판을 초월하는 ‘변혁적 창조성’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르셀 뒤샹의 ‘샘’이 다빈치 등이 구축한 고전적 회화의 세계를 초월했듯이, 양자역학이 고전물리학을 뒤집었듯이 인간은 여전히 ‘집단적 뇌’를 활용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가 “인류의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서로에게서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됐음을 강조하면서도 “인류가 우리 시대에 당면한 도전을 극복하려면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책은 기후위기라는 초유의 위기를 겪고 있는 현재,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세상을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보는” 변혁적 창조성임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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