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본 것읽음

김창길 기자
2021 포토북 어워즈 선정 도서 ⓒParis Photo, Aperture Foundation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2021 포토북 어워즈 선정 도서 ⓒParis Photo, Aperture Foundation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고릴라의 탈을 쓴 여성 게릴라들이 뉴욕에 나타났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젠더와 인종 문제를 제기하는 익명의 활동가 단체 ‘게릴라 걸스’다. 게릴라들이 손에 든 것은 AK 자동소총이 아니라 포스터였다. 오스만 제국의 하녀였던 ‘오달리스크’의 누드 포스터다. 유난히도 긴 허리, 이와 대비되는 풍만한 엉덩이의 몸매를 자랑하는 그녀는 분명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앵그르가 그린 ‘그랑 오달리스크’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게릴라 걸스의 오달리스크는 고릴라 가면을 쓰고 있다. 게릴라들은 질문을 던진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벌거벗어야만 하나?”

게릴라 걸스의 문제 제기에는 근거가 있다. 포스터에는 198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린 작품들의 통계 수치가 적혀 있다.

“현대 예술 분야의 여성 비율은 5%에도 못 미치지만, 누드화의 85%는 여성이다.”

포스터에 적혀 있지는 않지만 고릴라의 탈을 쓴 오달리스크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때, 이래도 내가 여전히 섹시해 보여?”

열여섯 살 때 하루 종일 벌거벗은 여자를 그리고 싶었다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오달리스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남겨 놓았다. 게릴라 걸스의 1989년 고릴라 퍼포먼스보다 무려 17년 전에 출간된 <바라보기의 방법들(Ways of Seeing)>(펭귄모던클래식)에서 그는 남성과 여성이 바라보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썼다.

“남자는 행동하고 여자는 나타난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남자와 여자의 관계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관계도 결정한다. 여자 내면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감시당한 여성. 따라서 그녀는 자신을 대상화한다. 가장 특별한 시선의 대상화. 구경거리.”

<그들이 본 것(What They Saw: Historical Photobooks by Women)>(2021) 표지 /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그들이 본 것(What They Saw: Historical Photobooks by Women)>(2021) 표지 / 한미사진미술관 제공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한 여성이 바라보는 방식은 남성의 바라보는 방법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일까? 사진 역사의 초창기부터 여성이 만든 200권의 사진집 목록을 시대별로 정리한 <그들이 본 것(What They Saw: Historical Photobooks by Women, 1843~1999)>은 여성이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지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21 포토북 어워즈’에서 ‘올해의 사진 카탈로그’에 선정된 사진책이다. 뉴욕의 ‘애퍼처’ 재단과 ‘파리 포토’는 2012년부터 ‘올해의 사진집’ ‘생애 첫 사진집’ 등 세 분야의 수상작들을 매년 선정한다. 한미사진미술관은 오는 7월24일까지 ‘2021 포토북 어워즈’ 선정작과 출품작들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다. 벽에 걸린 사진을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디자인과 종이의 질감을 손끝에서 느낄 수 있는 사진 전시회다.

<그들이 본 것>은 비영리단체 ‘10X10포토북’이 2018년에 출간한 <우리가 보는 방법(How We see: Photobooks by Women)>의 후속이다. 전작이 2000년부터 2018년까지의 사진집에 대한 목록이라면 <그들이 본 것>은 1843년부터 1999년까지의 사진집을 연대기로 엮었다. <그들이 본 것>의 목록을 읽어 나가면 사진집의 역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음을 목격하게 된다. 신디 셔먼, 다이앤 아버스, 마거릿 버크화이트, 도로시아 랭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잘 모르는, 그러나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사진집들도 발견된다. 가령 안나 앳킨스의 <영국 해조류Photographs of British Algae>는 윌리엄 폭스 탤벗의 <자연의 연필(Pencil of Nature)>보다 1년 앞서 1843년에 제작된 사진집이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초의 사진집을 탤벗이 만들었다고 기억한다. 탤벗의 아내 콘스턴스 탤벗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영국식 사진술인 캘러타이프를 실험했지만, 사진의 역사에서 그녀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다.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의 <왕의 목가>  랑슬로 경과 기네비어 여왕 1874 / 게티 센터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의 <왕의 목가> 랑슬로 경과 기네비어 여왕 1874 / 게티 센터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사진가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은 살아생전 ‘아마추어 숙녀’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당대의 한 비평가는 1865년 저널 ‘사진 뉴스’에 캐머런의 사진이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로 사진을 찍은, 이리저리 밀리고 당겨져서 가려진 것이 명암에 의해 거칠게 휘장 조각으로 묘사된 기묘한 사진술”이라고 적었다. 캐머런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시작됐다. 캐머런의 초상 사진은 스튜디오의 어설픈 무대에서 찍힌 인물 사진들과는 달랐다. 어둠 속에서 극적으로 출현하는 인물들을 부드럽게 포착한 연초점의 사진술은 램브란트의 그림과 비교됐다. 그림과 같은 사진을 찍고자 했던 예술 사진가들은 사후에 그녀를 ‘예술 사진의 선구자’라고 추켜세웠다.

1874년 제작된 <왕의 목가(Idylls of the King)>는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동명 서사시를 사진으로 해석한 캐머런의 사진집이다. 아서 왕, 랑슬로 경, 기네비어 여왕 등 서사시의 등장인물은 캐머런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연기했다. 중세 시대의 옷차림을 한 아마추어 연기자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을 생각을 했을까? 당시 부유한 계층에서는 고전 미술작품의 등장인물을 흉내내서 포즈를 취하는 ‘타블로 비방’이라는 문화가 유행했다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 그림이나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해서 찍는 타블로 사진은 한 세기가 흐른 뒤 현대 사진에서 다시 유행한다.

프랜시스 벤저민 존스턴의 <햄프턴 앨범>(1899) ‘트레져 레지던스 빌딩의 계단과 일하는 학생들’ / 미국 의회도서관

프랜시스 벤저민 존스턴의 <햄프턴 앨범>(1899) ‘트레져 레지던스 빌딩의 계단과 일하는 학생들’ / 미국 의회도서관

연출 사진은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 프랜시스 벤저민 존스턴은 흑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연출해서 찍은 <햄프턴 앨범>을 1899년에 남겨 놓았다. 1900년 파리박람회 전시를 위해 촬영된 사진집이었다. 존스턴의 사진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만 쏟아내는 검둥이들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다면 선량한 미국 시민이 될 수 있다’고 관람객들을 설득했다. 미국 문학과 사진들을 연구하는 제임스 귀몬드 교수는 <햄프턴 앨범>이 “미국의 소수민족들에게 번영과 발전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기록한 최초의 시도라고 평가했다.

<햄프턴 앨범>은 흑인과 인디언을 위한 직업 훈련 학교 햄프턴을 촬영한 것이다. 앨범에는 한 건물 내부에서 목조 계단을 만들고 있는 흑인들을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의 구도는 찍힐 때부터 관람객을 염두에 둔 연극 무대 같다. 학생들의 포즈는 다소 어색하다. 직업 훈련만 받는 흑인 학생들이 연기를 잘할 턱이 없다. 교양 교육이 아닌 기술만 가르치는 학교의 설립 목적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존스턴은 정부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존스턴의 사진에는 흑인에 대한 어떤 희망이 감지된다. 학생들이 만들고 있는 계단이 완성되면 그 계단을 밟고 올라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아메리칸 드림이다.

앨리스 오스틴의 <뉴욕의 거리 유형> ‘이민자와 프레첼 상인’ 1896 / 미국 의회도서관

앨리스 오스틴의 <뉴욕의 거리 유형> ‘이민자와 프레첼 상인’ 1896 / 미국 의회도서관

앨리스 오스틴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뉴욕 엘리스 섬의 이민자 입국소를 찍은 사진가로 많은 사람들이 루이스 하인을 기억하지만 오스틴은 그보다 먼저 이민자 입국소를 기록했다. 보건국의 요청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찍은 19세기 말 뉴요커의 모습은 지금처럼 세련되지 않았다. 행상꾼, 구두닦이, 신문배달원, 생선 장수, 청소부, 우체부…. 독일 민족의 초상을 유형화했던 아우구스트 잔더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의 사진집 <뉴욕의 거리 유형(Street Types of New York)>(1896)은 잔더의 사진집 <시대의 초상>(1929)보다 30여년 앞선 것이다. 앨리스 오스틴은 스튜디오 밖에서 사진을 찍은 최초의 동성연애자 사진작가로도 거론된다.

오스틴보다 50여년 늦게 뉴요커가 된 헬렌 레빗은 거리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찍은 사진집을 1965년에 출판했다. 낯선 사진가에게 경계심을 느낄 필요가 없었던 시절이겠지만 헬렌 레빗이 포착한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은 유난히도 친근감이 느껴진다. <바라보는 방법(A Way of Seeing)>이라는 사진집 제목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살펴보니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제임스 에이지가 서문을 썼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워커 에번스와 함께 대공황 시절 미국의 소작농에 대한 르포르타주 <자, 이제 유명인들을 칭송하자(Let Us Now Praise Famous Men)>를 작성했던 그는 사진에 대한 이해가 깊다. 에이지는 헬렌 레빗의 사진집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사진 예술의 경우, 작가의 역할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미적인 리얼리티를 알아보고 가장 풍성한 결과물을 얻기 위한 창조의 결정적인 순간을 믿음직스럽게 기록하는 것이다.”

제임스 에이지가 쓴 ‘바라보는 방법’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헬렌 레빗은 브레송 밑에서 사진을 배웠다.

여성 사진작가들의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흐름을 지금까지 살펴본 4권의 사진집만으로 요약하자면 ‘거울과 창’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사진을 담당했던 존 사코우스키가 명확하게 표현한 ‘거울과 창(Mirrors and Windows)’이라는 사진의 두 갈래다. 사진은 창문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진과 작가 내면의 세계가 반영된 거울 같은 사진이 있다. 제임스 에이지가 보았던 헬렌 레빗의 <바라보는 방법>은 존 사코우스키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본 것>의 첫 부분에 소개한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의 <왕의 목가>는 거울 같은 사진집이다.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사진 카탈로그 <그들이 본 것>에 수록된 바바라 쿠르거의 사진들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사진 카탈로그 <그들이 본 것>에 수록된 바바라 쿠르거의 사진들

여성 사진작가들의 ‘바라보는 방법’은 거울 같은 사진에서 비교적 쉽게 포착된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작가의 내면이 거울처럼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본 것>의 마지막 목록에 수록된 바버라 크루거는 사진 위에 글자를 적어 명료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한 여성의 흑백 초상 사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Your body is a battleground).”

메시지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22년 전에 선전포고를 했던 크루거의 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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