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산불의 상처를 보듬는 ‘치유·쉼의 예술’

도재기 선임기자

대지미술 기반 지나 손 ‘인왕목욕도’

‘4월 산불’ 피해 입은 서울 인왕산

자하미술관·주변 숲에 작품 전시

발화 지점에 금색 욕조 설치 등

향후 1년간 자연과 더불어 완성

대지미술 기반의 현대미술가 지나손 작가의 개인전 ‘인왕목욕도’가 1일 자하미술관과 주변 인왕산 숲에서 개막한다. 사진은 인왕산 숲속에 설치된 작품 ‘여름에 피는 색’(위)과 작가가 땅을 일궈 심은 ‘여름에 피는 색’ 작업 과정 장면. 자하미술관 제공

대지미술 기반의 현대미술가 지나손 작가의 개인전 ‘인왕목욕도’가 1일 자하미술관과 주변 인왕산 숲에서 개막한다. 사진은 인왕산 숲속에 설치된 작품 ‘여름에 피는 색’(위)과 작가가 땅을 일궈 심은 ‘여름에 피는 색’ 작업 과정 장면. 자하미술관 제공

지난 4월 산불이 난 인왕산 자락이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과 아름다움, 인간과 자연의 본질·공존을 성찰하는 현대미술로 거듭났다. 시커먼 산불 상처에도 풀들이 돋아난 현장에는 치유와 소생을 기원하는 오브제 욕조가 놓였고, 건너편에는 설치작품들이 우거진 숲과 어우러져 있다. 인왕산 자락의 자하미술관(서울 창의문로) 안팎이 예술을 통해 치유와 정화, 새 생명력을 온몸으로 체감하는 신선한 예술공간이 된 것이다.

1일 자하미술관과 주변 인왕산 숲에서 개막하는 현대미술가 지나 손(58)의 개인전 ‘인왕목욕도’ 덕분이다. 지나손은 대지미술에 기반한 설치와 사진·회화·영상·퍼포먼스 등의 작업으로 주목받는 현대미술가다. 바다와 산·강 등 대자연과 교감하며 예술과 인간 삶의 본질, 사물의 실존에 질문을 던지는 개념작업으로 유명하다.

이번 ‘인왕목욕도’전도 특유의 작품들로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안긴다. 우선 산불 불화 지점 인근인 미술관 왼쪽 숲속에 ‘황금연못’이란 오브제 설치로 황금색 욕조가 놓였다. 동양 전통사상이 녹아든 주역에서 불이 흙 속으로 들어가 새 생명으로 솟아나는 내용 등에서 영감받은 작품이다. 또 암 투병을 한 작가가 목욕할 때마다 병도 씻겨나가길 간절히 기원한 경험도 담겼다. 3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원래는 코로나19로 살아온 답답함을 ‘예술로 샤워하자’는 생각으로 왼쪽 숲속에 대중목욕탕을 설치할 생각이었다”며 “그런데 산불이 났고, 그 상처난 숲을 예술로 품어야 한다는 동시대 작가로서의 소명감이 일어 전시가 좌우 숲속까지 확장됐다”고 밝혔다.

지난 4월 발생한 산불의 흔적이 아직 시커멓게 남아 있는 자하미술관 왼쪽의 인왕산 숲속에 황금색 욕조가 놓였다. 상처의 치유와 소생을 기원하는 지나손 작가의 설치작 ‘황금연못’이다. 도재기 선임기자

지난 4월 발생한 산불의 흔적이 아직 시커멓게 남아 있는 자하미술관 왼쪽의 인왕산 숲속에 황금색 욕조가 놓였다. 상처의 치유와 소생을 기원하는 지나손 작가의 설치작 ‘황금연못’이다. 도재기 선임기자

미술관 오른쪽 숲에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 인간과 자연의 관계, 개인 삶을 사유하게 하는 작품들이 설치됐다. 특히 ‘여름에 피는 색’은 둥근 꽃 같은 지름 5m의 대작이다. 자세히 보면 놀랍게도 다양한 색의 천들을 곶감호두말이처럼 말아 땅에 심어 놓았다. 작가가 오랜 시간 구한 원단과 자투리 천 5㎞를 재단해 나무를 심듯 땅을 일궈 심은 것이다. 새 생명이 움트는 아름다운 상상의 꽃, 신화 속 꽃 같은 작품은 숲과 하나돼 빼어난 조형미를 선보인다. 작가는 “햇볕과 바람, 비, 이슬을 맞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어떤 감동을 주고, 어떻게 변화될지 궁금하다”며 “척박한 시기 잠시나마 위로와 기쁨, 긴 호흡을 하며 답답했던 생의 숨을 터놓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숲에는 추상적 동그라미가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자연과의 소통을 상징하는 듯한 대형 캔버스 설치작들도 있다. 작가는 “이 작품들은 바람과 이슬, 날벌레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결국 자연이 완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안면도 바다와 어민들의 시간·삶이 밴 부표들도 숲으로 들어와 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부표들은 부유하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미술관 1층 전시실에서는 ‘월하만물도’ 등 평면작업과 작가가 천착해 온 허공·비물질에 대한 개념작업인 ‘허공에 그리다’란 퍼포먼스 영상·캔버스 작품들이 나와 있다. 2층 전시실에선 작가의 풍부한 미적 상상력을 엿보며 즐길 수 있는 기존 작품들, 관련 자료 등을 만난다.

자하미술관 오른쪽 숲속에 설치된 대형 캔버스 작업들은 바람과 햇빛, 이슬, 날벌레 등 자연이 완성하게 된다. 자하미술관 제공

자하미술관 오른쪽 숲속에 설치된 대형 캔버스 작업들은 바람과 햇빛, 이슬, 날벌레 등 자연이 완성하게 된다. 자하미술관 제공

31일 오후 벌써 돼지감자 새싹은 물론 다양한 식물들이 생명력을 드러내듯 돋아나고 있는 설치작 ‘여름에 피는 색’ 세부 모습(왼쪽)과 작품 옆에서 저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는 지나손 작가. 도재기 선임기자

31일 오후 벌써 돼지감자 새싹은 물론 다양한 식물들이 생명력을 드러내듯 돋아나고 있는 설치작 ‘여름에 피는 색’ 세부 모습(왼쪽)과 작품 옆에서 저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는 지나손 작가. 도재기 선임기자

대지미술은 자연과 함께하는 특성상 짧은 시간 선보인다. 작가도 예술적 표현만 하고 이 땅에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정신을 갖고 있다. 미술관 내부 전시는 11일까지 열리지만 외부 설치작품들은 1년여 선보일 예정이다. 작가는 “예외적으로 1년여를 두고 장마가 지나가고, 낙엽이 지고, 눈이 쌓이는 등 자연이 개입해 변화시킨 제3의 물성을 지켜볼 생각”이라며 “우리 모두도 결국 작품과 같이 한때 아름다웠고, 혼란했고, 고요한 시간을 지나 우주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느냐”고 되묻는다.

전시기획자인 키미 킴 독립큐레이터는 “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보다 ‘어떤 화두를 던질 것인가’라는 의지가 작동한 전시”라며 “작가가 자연과 하나돼 기운생동하는 거대한 동시대 풍경화를 그린 이번 전시를 보다 많은 관람객이 즐기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평론가 김남수는 ‘불타버린 인왕산 생명계 접속’이란 글을 통해 신화적 관점 등으로 전시를 해석한다.

전시기간 동안 다양한 부대행사도 마련됐다. 1일 오후 ‘개막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작가와의 대화’(2일), ‘아트포럼’(3일), 관객 체험 프로그램 ‘염소똥 드로잉’(4·6일), ‘강연회’(9일), 작가와 함께하는 ‘비질하다’ 퍼포먼스(10일), ‘작가와의 미술 산책’(11일) 등이 예정됐다.

자연의 생명력을 다채로운 색 추상으로 표현한 캔버스 작업 ‘월하만물도’가 전시된 모습(왼쪽)와 지나손 작가의 개인전 ‘인왕목욕도’ 포스터. 자하미술관, 도재기 선임기자

자연의 생명력을 다채로운 색 추상으로 표현한 캔버스 작업 ‘월하만물도’가 전시된 모습(왼쪽)와 지나손 작가의 개인전 ‘인왕목욕도’ 포스터. 자하미술관, 도재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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