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앞둔 인간의 집을 자연에 반환…‘공동체 위한 해체’ 역발상읽음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⑮ 강예린 서울대교수, 2023 베니스건축비엔날레 : 파괴적 창조

‘소멸을 위한 DIT(Do It Together) 워크숍’ 이후의 군산 빈집 모습(왼쪽 사진)과 ‘2023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한국관에 설치된 ‘파괴적 창조’. 텍스처 온 텍스처·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 Agne Raceviciute·2023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추진단 제공

‘소멸을 위한 DIT(Do It Together) 워크숍’ 이후의 군산 빈집 모습(왼쪽 사진)과 ‘2023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한국관에 설치된 ‘파괴적 창조’. 텍스처 온 텍스처·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 Agne Raceviciute·2023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추진단 제공

지난 20일 세계 최고의 건축 축제 베니스건축비엔날레가 막을 열었다. 미술과 건축 격년으로 진행되는 베니스비엔날레가 올해는 건축 비엔날레로 18회를 맞았다. 베니스건축비엔날레는 당대 논쟁적인 이슈들을 시각 언어로 제시하고 교류하는 세계 건축인들의 무대다. 크게 본 전시와 국가관 전시로 구성돼 미술·건축 올림픽으로도 여겨진다.

‘미래의 실험실’ 대주제 따라
한국관 ‘우리는 어떻게’ 전시
군산 빈집 문제 주목한 강예린
도시의 밀도 회복 방법 제안

총감독으로 선임된 레슬리 로코가 제안한 대주제는 ‘미래의 실험실(The Laboratory of the Future)’. 베니스건축비엔날레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감독으로 선임된 그는 아프리카를 건축의 미래가 참조해야 할 장소로 봤다. 성별·지역적으로 편향된 과거 전시구성에 대한 대안으로 레슬리 로코는 그가 직접 지휘하는 본 전시에서 아프리카 출신 젊은 건축가들을 대거 초대했다. 기후위기와 팬데믹 등 작금의 불확실한 시대 상황을 검토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건축을 포함한 건조 환경을 재조명하는 전시로 기획했다.

이번 비엔날레에 참여한 총 63개 국가관 전시에서 한국관도 대주제에 따라 ‘2086: 우리는 어떻게?’라는 제목의 전시를 준비했다. 한국관은 처음으로 박경, 정소익 두 공동감독 체제로 운영된다. 한국관 전시는 세계 인구가 정점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2086년을 겨냥해 소멸과 쇠퇴가 본격화되는 시기 건축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전시는 미래 공동체를 위한 단서를 찾는 장소로 서울이 아닌 지방을 주목한다. 군산, 동인천, 경기도 마을에 대한 건축가와 지역 전문가들의 사례 연구와 영상 작업, 그리고 관객 참여형 게임 작업으로 구성된다. 이 전시는 군산, 동인천, 경기도 마을이 가지고 있는 도시건축 이슈들이 단순히 한국에 국한된 특수 사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지역의 현안들이 세계 여러 도시에서 지속될 보편적인 이슈임을 상기시킨다.

방치된 빈집의 지붕 털어내고
자연이 깃들 수 있는 도구 고안
공동체를 위한 작업 태도 반영
미래 건축이 숙고할 관점 담아

소멸의 디자인을 위한 ‘파괴적 창조’

정소익 감독이 밝혔듯 전시 작가로 여성 건축가가 주축이 된 이번 전시에서 강예린은 군산에 대한 작업 ‘파괴적 창조’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대 건축학부 교수인 강예린은 이치훈과 함께 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를 설립하고 파트너로 일하고 있다. 강예린과 이치훈, 우당탕탕랩이 함께한 ‘파괴적 창조’는 그간 군산에서 지역활동을 해온 윤주선의 연구와 에스오에이의 해석이 복합된 작업이다.

일종의 시각적 연구에 가까운 이 작업은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여러 환경적·건축적 문제들을 새삼 일깨운다. 군산은 인구가 빠르게 감소하고 있는 대표적인 지방 도시로 빈집 문제가 뜨거운 곳이다. 이러한 빈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부터 출발한 작업은 ‘소멸의 디자인’을 주제로 잡았다. 빈집을 억지로 다른 용도로 운용하기보다 자연의 일부로 돌리는 방법을 고민했다. 방치된 공간에 자연과 만나는 물리적 균열을 만드는 방식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 균열은 인간의 거주 공간을 다시 자연의 서식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강예린을 비롯한 군산팀은 군산의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고, 도시의 느슨한 밀도를 회복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파괴적 창조’는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 실제 군산에 있는 빈집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고 그 결과를 전시했다. 방치된 빈집의 지붕을 털어내고 자연이 깃들 수 있는 적정 도구를 고안하고 그 과정을 기록했다. 강예린은 실제 작업했던 빈집 지붕을 군산에서 베니스 자르디니 공원 안에 있는 한국관 전시장으로 옮겨 한쪽에 전시했다.

사회문화적 조건의 분석에서 출발

흥미롭게도 이 작업은 지리학을 전공한 강예린의 개인적 여정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지리학 석사를 받고 서울연구원 등에서 활동했던 그는 건축을 공부하고 실무를 하면서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장소를 읽는 작업들을 해왔다. 특히 그는 신문화지리학자 데니스 코스그로브의 경관 연구로부터 영감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강예린은 건축이 물리적인 건물로 자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물이 놓이는 장소의 사회문화적 맥락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하고 보는 일도 중요시했다.

‘창조적 파괴’처럼 인간의 거주 공간을 다시 자연의 서식지로 풍화시키는 일은 앞으로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건축가들에게 주어진 도전적인 과제가 될지도 모른다. 버려진 공간을 다시 고쳐서 쓰는 리노베이션뿐 아니라 버려진 공간에 개입해서 자연으로 돌리는 역방향의 디자인에 대해 고민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번 비엔날레의 여러 다른 국가관들도 한국관처럼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건축적 실천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강예린이 이치훈과 함께 설립한 건축사사무소 에스오에이의 활동 기조도 반영한다. 에스오에이(SoA)는 ‘소사이어티 오브 아키텍처(Society of Architecture)’의 단어 첫 글자들을 따온 이름이다. ‘건축의 사회’를 뜻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강예린은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작업의 방식들을 탐구해왔다. ‘파괴적 창조’는 건축가로서 무언가를 짓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체하는 역발상의 디자인 작업이지만, 미래의 건축 공동체가 숙고해야 할 관점을 담고 있다. 이 작업은 그간 에스오에이가 추구했던 함께 살아가는 일, 사회적 틀에서 건축을 생각하는 태도를 자연스레 반영한다.

사무실 기록 담은 연감 발간 등
전시·글쓰기로 단련한 상상력
실제 설계의 실천력으로 작동
또 다른 공동체 위한 활용 기대

전시, 출판, 글쓰기가 이끄는 상상력

강예린은 이번 비엔날레뿐 아니라 여러 예술기관에서 초대를 많이 받아 전시 경험이 풍부한 작가다. 작가로 참여한 일뿐 아니라 전시 기획과 디자인 등 그가 독립한 뒤 진행한 전시 관련 프로젝트만도 50개가 넘는다. 또한 출판과 글쓰기 등 건축가가 주로 하는 업무와 다소 먼 작업들을 적극적으로 해왔다. 매번 자기 작업을 책으로 기록하는 일을 미루지 않고 여러 책의 공저자나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보통 젊은 건축가들이 초반에 전시나 연구 등을 많이 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건물 설계에 집중하는 것과는 다르다. 에스오에이의 작업 포트폴리오는 건물(Building), 도시계획(City), 공간(Space), 사물(Object), 보이지 않는 것(Things invisible)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건물만큼 다른 영역들이 비등하다.

경계를 넘나드는 강예린의 유연하면서도 지적인 작업들은 큐레이터나 다른 예술가들의 관심을 끈다. 그는 전시나 출판과 같은 무대를 그의 또 다른 공동체로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작품과 글을 묶어 내보내는 것이 전시와 출판이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공간에서 펼쳐지는 전시와 지면에서 펼쳐지는 출판은 집합 풍경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강예린에게 이러한 일들은 새로운 협업을 시도하고 공동의 성취를 맛볼 수 있는 자리가 되는 듯하다. 나아가 이 작업들은 실제 물리적으로 세워지는 건물 설계를 위한 다채로운 상상력을 기르는 토대가 된다.

공동체를 만드는 건축

백송터와 서촌 골목길을 연결하는 브릭웰의 중정 모습. 신경섭 제공

백송터와 서촌 골목길을 연결하는 브릭웰의 중정 모습. 신경섭 제공

강예린은 전시, 출판, 글쓰기로 단련한 건축에 대한 상상력이 현존하는 건물을 설계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해왔다. 에스오에이가 설계한 건물 중 그들을 대중에게 알린 것은 서울 서촌에 있는 통의동 브릭웰이다.

최근 MZ세대들이 즐겨 찾는 이곳은 한국건축역사학회 작품상 수상을 비롯해 평단의 인정도 받았다. 전시 공간(그라운드시소 서촌)으로 사용되는 브릭웰은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 터에 자리한다. 2020년에 완공된 건물은 대지 서쪽에 인접한 백송터와 잘 연결되는 배치를 고민하면서 시작됐다. 주민들에게 보호수 같았던 백송터는 공동체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였다.

에스오에이는 백송터를 막지 않고 1층을 띄워 골목길과 이어진 정원을 구상했다.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서촌 일대에서 이렇게 지층부를 비워두는 것은 과감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선택은 건물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됐다. 인근 주민들뿐 아니라 전시를 보러온 외지인들도 뻥 뚫린 중정을 통해 교류하게 됐다.

이 건물의 빈 공간을 설계했던 일은 이후 ‘가든 콜렉티브’(2021)라는 연구 작업으로도 확장됐다. 도시의 보호수를 추적하는 이 작업에서 브릭웰은 도시 경관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중요한 사례가 됐다. 강예린은 무엇보다 이 정원이 사람뿐 아니라 도심에서 보기 힘든 새와 고양이 같은 동물들이 잠시 머무는 장소가 됐다는 점에서 만족을 표했다.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머물 수 있는 어떤 공동체가 잠시나마 만들어졌다.

작업 공동체의 기록

지난 1월 강예린은 이치훈과 함께 지난 1년간의 사무실 기록을 담은 연감을 발간했다. 기획의 글에서 그는 이 책이 “작업 공동체의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건축가의 작품집이나 설계사무소의 모놀로그가 아닌 실무 건축가들을 기록하고 기념하기 위한 책”이라고 명시했다. 건축가가 자기 실천을 이렇게 책으로 묶는 건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건축 설계업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강예린 서울대 건축학부 교수

강예린 서울대 건축학부 교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비평가 이종건의 말처럼 “건축가는 스스로 작업의 내러티브를 구성해내야” 하는 일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이렇게 자기 서사를 만드는 전략은 강예린이 계속 살펴온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는 방법 중 하나로 보인다. 지속 가능한 사무실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첫 관문일 것이다. 국내 아틀리에 사무소 중 비교적 빨리 성장한 에스오에이는 사무실 직원들의 만족도가 높아 이직률이 낮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자기 조직을 비롯해 작업을 통해 만나는 다양한 공동체를 돌보기 위해 강예린은 ‘건축의 상상력’을 말해왔던 것은 아닐까. 그가 강연에서 강조한 건축의 상상력은 몽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미래를 분명하게 그리기 위한 실천적인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강예린이 전시, 출판, 글쓰기 등을 통해 꿰어온 건축의 다양한 상들이 또 다른 공동체를 위해 쓰일 것이라 믿는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건축을 향해] 소멸 앞둔 인간의 집을 자연에 반환…‘공동체 위한 해체’ 역발상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부활절 앞두고 분주한 남아공 초콜릿 공장 한 컷에 담긴 화산 분출과 오로라 바이든 자금모금행사에 등장한 오바마 미국 묻지마 칼부림 희생자 추모 행사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황사로 뿌옇게 변한 네이멍구 거리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