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재료·기법 권위자 정종미 작가, 연구성과 모은 책 출간
관련 재료·작품들로 독특한 전시 열어 화제
“미술대·작가들의 재료학 교육·공부 절실”
“한국화든 서양화든 회화에 있어 재료학은 기본이다. 그런데 제대로 가르치지도, 공부도 하지 않으니 문화적 정체성 혼란, 역사와 전통의 상실과 자생적 고유성·주체성 약화, 용어와 개념을 둘러싼 논란이 이는 게 한국미술계다. 미술대학에서 재료학을 기초교육으로 채택하는게 시급하고, 미술계 주체 모두가 재료학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저명한 한국화가이자 전통 안료와 재료·기법 연구 권위자인 정종미 작가(66·고려대 명예교수)는 한국화를 중심으로 회화의 재료와 기법을 분석·연구한 성과를 담은 재료학 기본서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미진사)에서 “재료학이 자리잡아야 한국미술의 발전, 정체성 확립 속에 진정한 글로벌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정 작가는 책 출간에 이어 재료학의 중요성을 알리고, 연구 성과를 공유하기 위한 전시회도 최근 마련했다. 책에 수록된 각종 재료들, 그 재료를 다양한 기법으로 활용한 작품들로 구성한 독특한 전시회는 미술계에서 화제다.
정 작가가 국내 첫 재료 기법서로 주목 받은 <우리 그림의 색과 칠> 이후 20여년 만에 펴낸 후속작인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은 전통 천연안료의 종류와 특성, 입자와 발색, 제조와 사용법 등을 상세하게 싣고 있다. 격동의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사라진 것들을 되살린 것이다.
특히 튜브물감 등 서양화 재료와 비교·분석해 그 특성과 장단점, 활용법 등도 함께 수록했다. 안료에 섞어 화면에 색을 드러내고 막을 형성해 고착하는 역할로 회화의 핵심 재료이자 용매(미디엄)로 불리는 전색제(展色劑)들의 연구성과도 담았다. 한국화의 전색제는 아교, 유화는 아마(린시드)유 같은 건성유, 아크릴화는 아크릴 수지, 수채화는 아라비아검, 파스텔화 등은 왁스, 템페라는 달걀 노른자다.
정 작가는 “음악·문학과 달리 미술은 물질인 재료와 표현법에 기반해 결국 물성으로 완성되고 소통한다”며 “무관심·무지에 따른 재료학의 부재는 우리 교육의 맹점이자 개념과 용어 혼란의 이유”라고 지적한다. 그는 “회화 종류는 전색제를 기준으로 나눠지니 기름을 쓰는 서양 대표 회화양식을 ‘유화’라고 하듯 동양 회화는 아교(교)를 쓰니 ‘교화’(膠畵)라고 해야한다”며 교화란 용어를 쓸 경우 교화의 한 종류인 수묵·채색을 둘러싼 편견·논란도 정리될 수있다고 말한다. 아직 용어의 개념·구분이 정리되지 않은 것도, 미술계 중심을 잡아야 할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채색화 특별전’으로 비판을 부른 것도 재료학 무관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책 속 연구성과에 기반한 전시회는 인문학적 문화공간을 지향하는 ‘정종미 갤러리·카페’(서울 자하문로)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난 정 작가는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은 재료학과 우리 고유 안료·재료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작가들의 작업에서 응용이 가능한 기본서를 마련해야 겠다는 의지로 펴냈다”며 재료학 교육·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료학이야 말로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과 문화적 자긍심 회복, 작가의 질적 성장, 작품의 수명·보존 등 한국회화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중국은 우리와 달리 전통 재료의 연구·개발을 통해 재료의 자생적 고유성과 국제적 보편성을 확보했다. 역사와 전통에 기반한 ‘일본화’, ‘국화’로 서구 미술과 구별되는 문화적 정체성까지 확립한 것이다. 한국은 서구 미술을 좇기에 급급해 역사·전통은 없고 현재·현대만 존재하는 실정이다. 정치적 독립만큼이나 문화적 자생성도 중요한 만큼 서구에 경도된 문화적 사대성을 극복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문화선진국, 한국미술의 글로벌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정 작가는 교육자·미술사가·작가·컬렉터 등 미술계 주체들이 재료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양식사 중심의 우리 미술사는 재료 발전과정이 빠진 반쪽의 미술사에 불과하기에 재료학 관점에서 미술사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재료학 교육의 부재는 실제 창작에도 영향을 줘 재료·질료적 관심보다 양식성에만 치우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다. 튜브물감 등 기성품 안료를 쓰더라도 그것의 재료적 특성을 작가가 제대로 이해하는 지 여부가 작품의 질적 수준 등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 작가는 지속가능한 미래를 고려하는 미술계의 ‘건강하고 착한 미술’을 향한 관심도 강조한다. 인간과 자연·비인간의 균형과 조화라는 시대정신 속에 재료의 친환경화 등 미술도 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 천연안료와 그 채색 기법이 건강한 한정식이라면 튜브물감은 햄버거와 같은 정크푸드라 할 수있다. 회화도 하나의 생명체여서 작품성과 더불어 건강한 재료가 중요하고 이것 또한 감상자·컬렉터들의 즐거움이 됐으면 좋겠다.”
전시장에는 평소 보기 힘든 갖가지 천연 안료·재료와 인공·합성 물감, 기법 연구로 제작한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작품 ‘미인도’ 아래에는 작품 재료들, 쪽물을 들인 푸른 치마와 들기름을 칠하고 1년 건조시킨 바탕재 장지 등의 제작과정을 소개하는 글이 놓였다. 천연염색 재료인 소목으로 염색한 모시 등으로 붉은 색이 돋보이는 다른 ‘미인도’를 비롯해 ‘종이부인’ ‘몽유도원도’ 시리즈, ‘고서’ ‘붉은 소녀’ 등의 작품도 재료와 제작 과정·기법을 역시 확인할 수있다.
각종 재료학의 중요성이 공유되는 전시장은 특히 전통 천연 안료·재료들만이 낼 수 있는 자연스럽고 깊이감 있는 색감과 질감, 작가의 표현기법 등을 이해하는 귀한 자리다. 또 한국화, 색채미학의 지평을 넓힌 작품세계와 연구성과로 주목 받는 정 작가의 내공을 확인하는 기회다.
최열 미술사학자·평론가는 “책과 이번 전시회는 재료학,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뼈 아프게 성찰하게 한다”며 “대학과 작가, 국공립미술관 등 미술계 주체 모두의 각성을 촉구해 의미 깊다”고 밝혔다. 정 작가는 오는 18일·25일 전시장에서, 22일에는 서울대에서 관련 특강도 한다. 전시는 10월 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