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학자 최열 ‘옛 그림으로 본 조선 1~3’ 출간
조선후기 명승·도시 그린 실경산수화 1000점 수록
30년 발품으로 쓴 역작…“보고 읽는 재미 가득”
‘역작’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뜻으로는 ‘힘을 기울여 짓는 일 또는 그런 작품’을 말한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역작은 미술이든 음악이든 책이든 진한 감동을 안기기 마련이다. ‘안복’이란 말도 있다. 미술전시회 방명록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로,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며 갖게 되는 즐거움을 뜻한다. ‘역작’이 이성적이라면 ‘안복’은 감성적이다.
최근 출간된 미술사학자 최열(68)의 ‘옛 그림으로 본 조선 1~3’(전 3권/혜화1117)은 ‘역작’ ‘안복’이라는 말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옛 그림으로 본 조선 1-금강’, ‘옛 그림으로 본 조선 2-강원’, ‘옛 그림으로 본 조선 3-경기·충청·전라·경상’의 세권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금강산을 비롯해 우리나라 곳곳을 그린 조선후기 실경산수화를 총망라하고, 그림과 그림을 둘러싼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한마디로 보고 읽는 재미와 정보가 함께 하는 책이다. 저자의 전작이자 출간 이후 뜨거운 호응을 받은 ‘옛 그림으로 본 서울’(2020), ‘옛 그림으로 본 제주’(2021)에 이은 신작이자 시리즈 완결편이다.
신작 세권의 책에는 지난 30여 년에 걸쳐 실경산수화들을 소장한 전국의 박물관·미술관, 개인 소장가들을 찾아 작품을 만난 저자의 땀, 수고로운 발품이 담겼다. 미술사학자로서 다진 학술적 역량이 각 작품의 해설과 행간에 녹아들었다. 방대한 옛 문헌을 살펴봄으로써 작품을 둘러싼 당대 역사와 시대상, 화가와 주변 사람들 이야기까지 풍성하다.
책들에는 무려 1000여 점에 이르는 조선후기 실경화가 수록됐다. 갈 수없는 금강산은 물론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전국 곳곳의 자연과 도시들을 그린 옛 그림이다.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등 이름난 화가의 유명 작품 만이 아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18세기 전후 중국풍을 떨쳐내고 이 땅의 자연과 사람을 주체적·개성적으로 담아낸 여러 작가의 다채로운 작품들이다. 한 시대의 예술이나 문화진흥은 서로 다른 시각과 가치관을 지닌 여러 작가·작품의 다양성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곳곳에 흩어지고 묻혀 있던 그림들을 연구자답게 끈질기게 모으고 또 조명했다. 30여년 작업의 성과물인 책은 문득 추사 김정희의 서예작품 ‘침계’를 생각나게도 한다. ‘침’자 하나를 자신만의 글씨로 써내기 위해 추사는 30년을 고민했고, 결국 역작 ‘침계’는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됐다.
실경산수화가 풍성한 조선 후기는 여느 때보다 이 땅에 관한 관심, 주체적 사상, 경제적 안정 속에 전국 명승과 유적을 찾는 유람·여행이 유행했다. 많은 실경산수화가 그려졌고, 숱한 시와 유람기가 지어졌다.
유람에 나서지 못한 문인들은 방에 누워 그곳들을 담은 그림으로 유람을 대신하는 ‘와유’(臥遊)를 즐겼다. 조선후기 실경산수화는 그런 배경 속에서 그려지고 또 감상되었다. 조선 실경산수화를 총망라한 책은 21세기 현대판 와유를 가능하게 한다. 역작이 낳은 독자의 안복이 아닐 수 없다.
‘옛 그림으로 본 조선 1-금강’은 금강산 실경산수화를 집대성했다. 고려시대에 불교 성지로까지 여겨진 금강산은 조선시대에도 누구나 한번 쯤은 찾아가고자 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산이란 물리적 실체를 넘어 자연을, 역사를 상징했다.
책은 조선 화가들이 남긴 금강산 그림을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의 세 권역으로 나누고 누가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각 작품의 배경과 얽힌 이야기들은 무엇이 있는지 꼼꼼하게 풀어낸다. 이제 금강산, 금강산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이 책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하다.
‘옛 그림으로 본 조선 2-강원’은 강원 지역의 주요 명소·도시를 담은 그림들을 모았다. 총석정·삼일포·낙산사·경포대 등 관동팔경은 물론 설악산과 오대산, 강릉·고성·삼척 등 영동과 춘천·원주·화천·영월 등 영서 지역의 곳곳의 옛 그림을 만날 수있다.
‘옛 그림으로 본 조선 3-경기·충청·전라·경상’은 임진강 이남의 우리 국토 전 지역을 담아낸 실경들이 선보인다. ‘과연 조선은 아름다운 실경의 나라’라는 부제가 잘 어울린다. 지금은 개발·발전된 주요 도시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옛 풍경이 흥미로운 역사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저자는 “이왕이면 책 속의 그림을 마음을 열어서 보고, 나아가 저마다 읽어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보는 것은 선입견 없이 그저 자신의 느낌에 충실한 것이며, 읽는다는 것은 ‘왜 그림 속에서 사람을 이렇게 작게 표현했지?’같은 의문을 품고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생각해보는 것이라 할 수있다. 당시 화가들은 지금처럼 인간중심이 아니라 자연중심이었기에 인간은 자연의 극히 일부로 작게 그려졌다. 그림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 세상을 보는 가치관 등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림을 ‘보고 읽는다’는 것은 한 작품을 보다 예술적·지적으로 충만하게 즐기고 감상하는 일이다.
실제 책은 보고 읽는 것의 즐거움을 위해 갖가지 장치들을 마련해 놓았다. 같은 장소를 그린 여러 작가의 그림을 비교해 보도록 한게 대표적이다. 금강산의 만폭동을 소재로 삼은 정선·심사정·김윤겸·정수영 등의 작품(1권)을 통해 만폭동을 작가마다 어떻게 다르게 그렸는지 파악할 수있다.
관동팔경 중 총석정을 다룬 그림의 경우 정선·김홍도·김응환·이방운·오명현·정수영·이인문·김하종·허필 등 10여 명의 작품(2권)을 실었다. 특히 정선과 김홍도의 작품은 각각 5점, 3점인데 다른 시기에 그린 그림을 통해 화풍의 변화도 살펴볼 수 있다.
저자의 ‘보고 또 읽는’ 세심한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작가들의 서로 다른 구도, 선과 점의 표현기법, 시점, 색감, 나아가 작가의 가치관과 작품철학 등이 쉽게 이해된다. 그림을 보고 읽는 쏠쏠한 재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화가 등 인물들의 소개, 특정 그림의 세부 화면 제시, 그림 속의 옛 지명의 풀이 등도 큰 도움을 준다.
저자는 방대한 작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독자들의 성원”이라고 밝혔다. ‘옛 그림으로 본 서울’, ‘옛 그림으로 본 제주’가 큰 호응을 받았다. 강연회 등에서 만난 많은 독자들은 ‘내가 사는 지역의 그림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저자에게 물었다. 독자들의 관심과 호응이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놓은 저자의 글들을 세상에 나오게 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책으로 화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