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향하는 노동자들의 분노, 빈자들만의 아귀다툼읽음

선명수 기자

국립극단 신작 ‘SWEAT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

국립극단이 지난 18일부터 한 달간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는 <SWEAT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은 부품화된 노동과 서열화된 인종 등 첨예한 동시대 이슈를 통해 인간 존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연극이다.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이 지난 18일부터 한 달간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선보이는 <SWEAT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은 부품화된 노동과 서열화된 인종 등 첨예한 동시대 이슈를 통해 인간 존엄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연극이다. 국립극단 제공

미국의 한 쇠퇴한 철강도시 레딩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땀 흘린 대가는 해고라는 눈물
공장폐쇄·노노갈등·이주노동자…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은 현실

증오와 적대는 안정적이었던 삶이 뒤흔들릴 때 비로소 그 얼굴을 드러낸다. 분열시켜 통제하는 것이 유구하고도 효과적인 지배 전략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박탈당한 이들의 분노는 자주 위가 아니라 옆으로 향한다. 지난 18일 막을 올린 국립극단의 신작 <SWEAT 스웨트 : 땀, 힘겨운 노동>은 신자유주의 파도에 노동의 자리가 하나둘씩 지워질 때, 개인의 삶이 어떻게 뿌리 뽑히고 반목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연극이다. 미국의 극작가 린 노티지의 2017년 퓰리처상 수상작을 국내 무대 위에 올렸다. 시스템의 지배자들이 빠져버린, 빈자들만의 아귀다툼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철강산업 도시 ‘레딩’의 한 낡은 선술집. 산타나의 라틴 록 ‘스무스’의 흥겨운 리듬에 맞춰 두 여자가 몸을 흔든다. 기분 좋게 취해 춤을 추는 트레이시와 신시아, 탁자 위에 얼굴을 박고 뻗어버린 제시까지, 셋은 20년 넘게 한 공장에서 ‘기름밥’을 먹은 오랜 친구다. 같은 공장에서 산업재해를 입고 퇴직한 스탠이 바텐더로 일하는 술집은 하루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마음 편히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다. 아버지와 그 아버지 세대부터 이제 갓 성인이 된 자식까지, 공장 소유주가 대를 이어 계승됐듯 이 철강도시에서 노동자들도 대를 이어 일해 왔다.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세 친구 가운데 흑인 여성 신시아가 관리직으로 승진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미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 빌어먹을 나프타라는 게 대체 뭐야? 발음상으론 꼭 변비약 같아. 나프타.” 극의 초반,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인근 공장의 소식을 전하는 스탠의 말에 스테이시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어넘긴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들에게도 같은 일이 닥친다. “엄지발가락 옆에 박힌 옹이가 사과만 해질” 정도로 하루 10시간씩 수십년을 서서 일해온 이들에게 회사는 문을 걸어 잠근다. 60% 임금 삭감 등 최악의 조건에 서명하지 않으면 일터로 돌아갈 수 없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경영진에게 새로운 칼을 쥐여줬다. 노조의 저항이 계속되면 공장을 국경 너머로 통째로 옮기면 된다. 거기엔 “지금 네가 받는 임금의 일부만 받고도 기꺼이 하루 열여섯 시간씩 서서 일할” 사람들이 즐비하다. 말단 관리직이 된 신시아는 임금 삭감을 받아들일 것을 친구들에게 권유했다가 사이만 틀어지고, 결국 친구들과 옛 동료, 자신의 아들의 해고를 직접 통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안식처였던 술집은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반목하는 싸움터로 변하고, 급기야 예기치 못한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파국의 공간으로 치닫는다.

연극은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불어닥친 2000년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 2008년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보여주는 뉴스가 무대 위 화면에 흘러나오는데, 이 뉴스들은 스탠의 술집이란 작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의 배경이 된다. 극작가 린 노티지는 한때 철강산업의 요지였으나 이제는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로 전락한 레딩의 주민들을 2년반 가까이 인터뷰했고, 이들의 실제 이야기를 작품 속에 담아냈다고 한다.

작품의 한 축에 노동이 있다면 다른 한 축엔 인종이라는 첨예한 문제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대를 이어 지켜온 일자리를 잃은 이들은 ‘피켓 라인’(출근 저지 투쟁을 위해 파업노동자들이 늘어선 줄)을 넘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히스패닉계 임시직 노동자들에게 증오의 날을 세운다. 같은 작업복을 입고 있지만 흑인이란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신시아는 부모 세대는 차마 꿈꾸지 못했던 ‘다른 삶’, 관리직 승진 기회를 놓칠 수 없지만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다. 풍요로운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만 남고 희망은 사라진 철강도시, “미국은 원래 이렇지 않았다”고 분노하는 백인 트레이시와 ‘투명인간’ 취급을 받다가 피켓 라인을 넘자 ‘내 자리를 빼앗은 쓰레기’가 되어버린 콜롬비아계 청년 오스카, 꿈꾸던 관리직이 됐으나 다른 것들을 잃어버린 신시아에게 그 ‘미국’은 ‘같은 미국’이 아닐 것이다.

연극은 러스트벨트 백인 노동자들의 압도적 지지로 트럼프가 당선된 2016년 미국 대선 닷새 전에 초연됐다고 한다. 트럼프 시대를 알리는 일종의 ‘예언적’ 작품이었던 셈이다. 러스트벨트의 이야기지만 한국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장 폐쇄와 노노 갈등,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은 한국사회의 몇가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안경모 연출은 “노동 상실이 단지 경제활동의 중단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문화적 활동을 파괴해 결국 문화적 공황 상태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며 “금융자본주의가 가속화되는 시스템에서 인간의 노동은 어디로 가는지, 우리 사회에도 무거운 주제를 던져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극이 인종을 표현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별도의 분장 없이 특정한 피부색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다가, 극중에서 인물에게 인종적 모멸이 안겨지는 순간 얼굴색이 칠해지는 연극적 표현으로 구현했다. “관객이 인종을 인식하는 순간의 충격을 인물의 모멸감과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의도한 장치다. 지난해 1인극 <콘트라바쓰>를 선보인 배우 박상원이 바텐더 스탠을, 강명주·송인성·문예주가 각각 트레이시와 신시아, 제시를 연기한다. 공연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7월1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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