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지구시계 남은 시간은 60초, '암전의 시간'을 상상하다...'기후비상사태 : 리허설' 전윤환 연출

선명수 기자
지난 11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전윤환 연출의 신작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은 기후 문제를 전면에 다룬 연극이다. 지구의 수명을 24시간으로 가정했을 때, 마지막까지 60초가 채 남지 않은 현 상황을 조명한다. 국립극단 제공

지난 11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전윤환 연출의 신작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은 기후 문제를 전면에 다룬 연극이다. 지구의 수명을 24시간으로 가정했을 때, 마지막까지 60초가 채 남지 않은 현 상황을 조명한다. 국립극단 제공

어둠 속, 날카로운 카운트다운 소리로 공연은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서서히 밝아지는 무대 위 “이 어둠을 밝히며 인류는 시작되었다”는 말과 함께 관객은 줄지어 등장한 배우들이 만든 어떤 형상을 목도한다. 사족보행하는 인류의 조상부터 어깨를 펴고 걷는 최초의 인간까지. 인류의 시원과 진화 과정이 배우들의 몸짓으로 그려진다. 흥미로운 것은 배우들의 손에 들린 물건이다. 스마트폰부터 태블릿, 노트북까지 전자기기와 함께 인류는 ‘진화’했다.

우리가 진화 내지 진보라 믿었던 것들이 ‘재앙’으로 휘몰아치고 있음을 확인하는 징후 중 하나가 기후위기일 것이다. 지난 11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전윤환 연출(36)의 신작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은 제목처럼 기후 문제를 전면에 다룬 연극이다. 지구의 수명을 24시간으로 가정했을 때, 마지막까지 60초가 채 남지 않은 현 상황에 대해 조명한다. 지난 13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전 연출은 “기후재앙이 인류의 턱밑까지 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하는 이런 비상사태가 마치 실제가 아닌 영화 같은 가상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는 현대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물건들이고 때로는 인간 몸의 확장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동시에 이런 장치들을 통해 접하는 기후 재난이 ‘나의 위기’로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먼 나라 혹은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인식되는 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의 전윤환 연출. 김영민 기자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의 전윤환 연출. 김영민 기자

그의 말처럼 작품에는 ‘기후비상사태’를 ‘나의 비상사태’로 체감하지 못했던 한 개인의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이 담겼다. 배우 11명은 전윤환을 대리하는 ‘작가’이자 배우 자신인 ‘나’로 출연한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전윤환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극이다. 섬에 살고 있는 ‘작가’는 기후위기에 대한 연극을 의뢰받은 뒤 온갖 자료를 조사하며 작품을 준비하지만, 글을 쓰는 데는 계속 실패한다. ‘작가’는 관객들의 뇌리에 남을 역작을 쓰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면서도, 곧이어 “나의 위기에 기후위기는 없었다”고 고백한다. “기다려라 명동예술극장!”이라며 한껏 들떠있다가도 성공을 향한 투명한 욕망을 마주하면서 자조하기도, “어쩌면 부자들은 이미 지구를 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라며 절망하기도 한다.

전 연출은 “처음 국립극단에서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 명동예술극장이란 큰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다는 게 기쁘면서도 인류의 이 거대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고 말했다. “기후위기보다 내 작품이 망할 것 같은 위기가 더 심각했던 나,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누구나 일상 속 나의 위기가 전 인류의 위기보다 중요하게 다가오잖아요. 그래프나 숫자가 아니라, 감각과 감정으로 접근하는 게 연극의 역할이라고 봤습니다.”

이렇듯 개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연극이지만, 작품은 결국 ‘우리는 욕망을 꺾고 탈성장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전 연출은 작품을 준비하며 시민단체 ‘기후위기 비상행동’과 전국 곳곳의 기후위기 현장을 찾는 4박5일간의 투어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만난 한 농민의 말을 작품 속에서 전한다. “건강하고, 싸고, 빠르고, 많고, 아름다운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게 있다면, 그런 상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무리했겠습니까.” “미래는 선착순”이라는 작품 속 대사처럼, 연극은 더 빠르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질주하는 세상의 속도, 그 속도에서 뒤처진 이들의 자리까지 신랄하게, 또 세심하게 비춘다.

연극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의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의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의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의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지난 1월 발생한 광주 아파트 공사장 붕괴 참사도 극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대본 작업이 안 풀려서 지구가 망하기 전에 내가 망할 것 같다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쯤 광주에 갔는데, 그때 그 사고가 났어요. 자본주의 속도전의 욕망이 기후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고 봤습니다. 사람들을 끝없이 욕망하게 하고, 경쟁하게 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탈취와 혐오들…. 그것들이 다 연결돼 있고 우린 이미 그런 재난들 속에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극에서 참사 현장을 찾는 장면이 두 번 반복됩니다. 두 번째 장면은 이 연극으로 그 현장에 함께 가자는 제안이에요. 저에게도 참사 현장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가자고 제안해준 동료가 있었는데, 그런 마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곳에 가자고 제안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먼저 울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싶었습니다.”

공연엔 암전 장면이 몇 차례 중요하게 나온다. 전 연출은 “연극에서 암전은 장과 장 사이, 막과 막 사이 극적 전환이 필요할 때 사용되는데 지금 우리의 상황이 암전이 필요한 상황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삶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지 못할 때, 삶에도 암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고민을 감각적인 차원에서 관객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연극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의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기후비상사태 : 리허설>의 공연 장면. 국립극단 제공

극단 앤드씨어터의 대표인 전윤환은 연극 무대가 감상의 차원을 넘어 극장이 곧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다수의 다큐멘터리극 작업을 해온 연출가다. <강화도 산책 : 평화도큐멘트> <극장을 팝니다> <창조경제> 등의 작품을 연출했고, 지난해 발표한 <자연빵>은 세종문화회관이 동시대성을 화두로 내건 새 시즌 프로그램 ‘싱크 넥스트 22’의 일환으로 오는 8월 다시 관객과 만난다. 전 연출이 공연자로 무대에 올라 비트코인에 투자하고 빵을 굽고 막걸리를 마신다. 경쟁과 효율로 점철된 도시의 삶과 거리를 두기 위해 강화도로 이주했지만, 가상통화 투자 열풍에 휩쓸렸던 연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전 연출은 “동시대의 이야기를 가장 날카롭고 빠른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큐 장르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기후위기’를 이야기하는 연극인 만큼 제작과정에서부터 이 공연이 환경에 미칠 영향도 고민했다고 한다. 환경친화적인 제작 방안을 조사해 프로덕션에 공유·조율하는 ‘에코드라마투르그’를 배치했고, 연습 및 공연 과정의 탄소발자국과 폐기물을 산정해 기존 공연 대비 절감률을 비교해보는 ‘기후 노트’도 제작한다. 전 연출은 “지금의 ‘기후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치와 기업이 바뀌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쳤다”면서 “기존의 공연 작업 방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공연은 6월5일까지.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의 전윤환 연출. 김영민 기자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의 전윤환 연출. 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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