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멈춰서도 털털 흔들려도 괜찮아···청소년극 ‘트랙터’

선명수 기자

국립극단 청소년극 ‘트랙터’ 단막극 세 편 모아 한 무대

재난 이후 삶, 잃어버린 것 찾는 여정, 멈춤의 순간 다뤄

우연한 마주침으로 이해와 위로 공간 만드는 공통점

연극 <트랙터>는 세 명의 작가가 쓴 30분 남짓의 단막극 세 편을 연작 형태로 한 무대에 올린 청소년극이다. 사진은 ‘7906버스’(한현주 작) 중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트랙터>는 세 명의 작가가 쓴 30분 남짓의 단막극 세 편을 연작 형태로 한 무대에 올린 청소년극이다. 사진은 ‘7906버스’(한현주 작) 중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트랙터는 길이 아닌 곳을 간다. 매끄럽고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는 승용차,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바이크와 달리 울퉁불퉁한 산이나 들판, 농지를 누비며 땅을 일군다. 빠르고 세련되진 않지만, 털털털 흔들려도 자신의 땅을 단단히 다지는 이 작업차는 연극 <트랙터> 속 인물들과 닮았다. 작품 속 청소년들은 자꾸만 시동이 꺼져버리는 일상에 당황하기도, 오래된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하며 흔들리기도 하지만 트랙터처럼 우직하게 서로를 위로한다.

아동극과 성인극으로 양분된 공연계에서 모처럼 청소년을 위한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의 <트랙터>는 ‘뜻밖의 마주침’을 주제로 단막극 세 편을 한 무대에 올린 청소년극이다. ‘7906 버스’(한현주 작), ‘빵과 텐트’(허선혜 작), ‘하얗고 작은 점’(나수민 작) 등 세 작가가 쓴 단막극을 극단 파불라토르의 대표 권영호가 연출했다.

흰 바위로 둘러싸인 무대는 소품 없이 텅 비어 있다. 몽환적인 분위기의 무대는 흰모래로 덮인 광활한 사막 같기도, 거대한 빙하들의 세계 같기도 하다. 극의 흐름에 따라 이곳은 종점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이 되기도, 캠핑장과 병원 진료실, 수영장의 물속이 되기도 한다.

막이 오르면 늦은 밤, 버스 안에 고등학생 세영과 은호, 운전기사 자영이 있다. 종점을 향해 가던 버스가 갑자기 고장나며 멈춰선다. “왜 하필 여기서”라며 세영은 불안해한다. 사흘 전, 인근 공사현장에서 타워크레인이 쓰러져 이곳을 지나던 버스를 덮쳤다. 운전기사 자영을 포함해 셋 모두 그 버스에 타고 있었다. 돼지갈비 냄새를 풀풀 풍기던 술에 취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다 버스에서 내렸는데, 간발의 차이로 100㎏이 넘는 크레인이 아저씨가 앉았던 자리를 덮쳤다. 세영은 바로 뒷자리에 타고 있었다. 은호는 전국 공사장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사고라며 온갖 뉴스에서 검색한 크레인 사고를 읊는다. 짐짓 침착하게 사고 원인을 말하지만 그런 은호 역시 그날의 사고 이후 이명에 시달린다. 자영은 시동이 꺼지자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사라져 남몰래 울음을 터뜨린다.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세 단막극 중 가장 먼저 관객과 만나는 ‘7906 버스’는 재난 이후 일상을 다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극 속에는 사흘 전 발생한 타워크레인 사고 외에도 1995년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 2년 전 중학교 앞 음주운전 교통사고가 소환된다. 사흘 전 사고에서 인명 피해는 없었고 사고 현장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정리되었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끊임없이 사고를 복기할 수밖에 없다. 만약 버스가 좀 더 일찍 출발했더라면, 아저씨가 조금만 늦게 내렸다면…. ‘죽음’의 자리에 ‘나’를 자주 대입해보게 되는 것은 예고없이 찾아온 사고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새겨진 상흔이다.

연극 <트랙터> 중 ‘빵과 텐트’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트랙터> 중 ‘빵과 텐트’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이어지는 작품 ‘빵과 텐트’와 ‘하얗고 작은 점’은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일종의 판타지다. ‘빵과 텐트’는 기아체험 24시 행사가 열리고 있는 캠핑장에서 적당한 유명세를 갖고 있는 배우와 이 배우의 ‘팬’을 자처하는 한 아이의 특별한 동행을 그린다. 배우가 텐트에서 몰래 챙겨온 빵을 먹으려는 순간, 길을 잃은 아이가 텐트 안으로 들어온다. 단식을 해야 하는 행사장에서 취식 현장을 딱 걸린 셈인데, 아이는 이를 눈감아주는 대신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함께 찾아달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가 찾아달라고 한 것은, 황당하게도 아이의 ‘몸’이다. 잃어버린 ‘몸’을 찾기 위해 텐트 지퍼를 열 때마다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배우와 아이는 시칠리아의 해변, 무너진 성당의 돌무덤, 연필의 나무와 흑연 사이를 헤맨다. “좀 힘드시죠?”라는 아이의 말에 배우는 “아니요, 많이 힘들어요”라며 억울해하는데, 어느 순간 이 모험은 아이가 아니라 배우가 잃은 어떤 것을 찾기 위한 여정처럼 느껴진다.

연극 <트랙터> 중 ‘하얗고 작은 점’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연극 <트랙터> 중 ‘하얗고 작은 점’의 한 장면. 국립극단 제공

‘하얗고 작은 점’은 어떤 멈춤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열네 살 강준은 유방암 의심 진단을 받은 엄마와 함께 암센터에 왔다. 강준은 엑스레이 사진을 띄운 모니터를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그대로 X선을 뚫고 들어가버린다. 그곳에서 물속에서 잠수를 하고 있는, 마치 엑스레이 사진 속 흰 결절처럼 보이기도 하는 지오를 만나게 된다. 엄마가 유방암 절제술을 받은 지오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자신의 변화하는 몸을 보고 불안해한다. 강준도, 지오도 혼란스럽기만 한 일상에서 잠시 시간을 멈추고 싶다.

세 작품은 각각 개별적인 이야기지만 우연한 마주침들을 통해 이해와 위로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묘하게 연결된다. 사고로 딸을 잃은 운전기사 자영에게 꼬깃꼬깃하게 간직해온 지폐를 선물로 건네는 세영, 혼란스러워하는 배우에게 “잠깐 머물러 있는 게 실패는 아니”라고 말하는 아이 등 작품 속 인물들은 투박하지만 따뜻하게, 또 편견 없이 서로를 위로한다. ‘밴드 트랙터’의 공연이 각 단막극 사이를 연결하며 경쾌하게 극을 채운다. 관객 눈물을 빼놓다가도 금세 엉뚱하고 유쾌한 대화로 웃게 만드는 공연이다. 배우 박은경·송석근·신윤지·최상현이 극중 10대에서 40대까지 여러 역할을 맡아 호연한다.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1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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