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내일’이 없다읽음

〈강성보 논설위원〉

우리말에는 ‘내일’이 없다. 그제, 어제, 오늘, 그리고 모레, 글피까지 있는데 가장 가까운 미래를 나타내는 순 우리말은 없다. ‘내일’은 한자어일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계림유사 등의 기록을 근거로 ‘하제’라는 음가의 우리말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뫼’와 ‘가람’이 ‘산(山)’과 ‘강(江)’에 밀려나듯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일본 고전 연구가 이영희씨는 일본 지명 ‘아스카’에서 종적을 감춘 우리말 ‘날새’를 찾아냈다. 일본 고대 문화의 이름이기도 한 ‘아스카’는 한자로 ‘비조(飛鳥)’로 쓴다. 그런데 우리말 한자읽기, ‘날 비(飛)’자와 ‘새 조(鳥)’자로 풀이할 때만 그 작명 경위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즉 옛날 아스카 일대로 이주한 백제인들은 이곳이 ‘내일이 있는 땅’이란 뜻에서 ‘날새’를 이두식으로 ‘飛鳥’로 표기한 뒤 그 뜻을 담은 일본어 ‘아스카’로 발음했다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실제 ‘아스카’는 내일을 뜻하는 일본어 ‘아스(明日)’과 땅을 뜻하는 ‘카(香)’를 붙여 ‘明日香’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 객관성 담보 신속히 추진 -

이와 관련, 이어령 교수는 ‘날새’가 없어진 곡절에 관해 흥미로운 학설을 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 땅에는 전란이 많았다. 삼국시대엔 고구려·신라·백제로 나뉘어져 끊임없이 싸웠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엔 크고 작은 외침이 잦았다. 백성들이 다대한 고통을 겪은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날만 새면 또 무슨 괴로움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긋지긋해 했고, 결국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되어 ‘날새’라는 말까지 외면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지금 우리말에 ‘날샜다’라는 어휘가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것도 이 학설을 뒷받침하는 단서다.

과거사 문제가 요즘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가 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군사정권까지의 숨겨진 과거를 밝혀내 정리해야 한다는 측과 여기에 정치적 음모가 게재되어 있다며 저항하는 측의 싸움이 흉흉하다. 이미 여당 의장 등 ‘정치적 전사자’도 발생했다. 초반전이 이럴진대 본격적인 과거사 규명 작업에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전사자, 부상자가 발생할지 모를 일이다.

우리 현대사에는 아직도 규명되어야 할 사건들이 많다. 반민특위 해체로 청산의 기회를 놓친 채 반세기 이상 덮여져온 친일문제는 물론이고 폭압적 군사정권의 피냄새 나는 잔혹한 만행, 곰팡내 나는 음험한 비리들도 낱낱이 드러내 햇볕에 말려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비뚜로 기록된 한국 현대사 전체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처럼 올바른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라도 왜곡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문제는 객관성의 담보다. 과거사 위원회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있는 사실을 그대로만 쓰겠다는 춘추필법의 역사가들로만 구성되어야 한다. 정략이 끼어들어선 안된다. 애써 정리된 역사가 다음 정부에서 다시 뒤집힌다면 그만한 국력낭비가 없을 것이다. 공과 과를 공평하게 취급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정인을 평가하면서 과오만 헤집어 부각시킨다면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들 선조 중 살아남을 자 몇이나 되겠는가.

- ‘어제’마저 사라진다면 -

무엇보다도 경제불황 속에서 하루하루 먹고 사는데 신경을 쓰는 것도 벅찬 국민들은 과거사 규명 작업이 가급적 신속하고 조용하게 추진되기를 바란다. 숨기고 싶은 과거가 많은 저항세력의 물귀신 작전, 필리버스터 전술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넘어야 할 산임에도 과거사 얘기가 나오면 피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러다가 ‘과거’를 대표하는 순 우리말 어휘인 ‘어제’마저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다소 엉뚱한 생각까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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