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싸우는 우리의 부끄러움

가수 조영남씨는 자신의 책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에서 재치있고, 간혹 통찰력있는 일본관을 드러낸다. 그러나 엉뚱한 이야기도 있고, 틀린 주장도 있다. 가령, 이런 게 대표적이다. 그는 2년 동안 친일파를 자처했는데 아직 맞아 죽지 않았다며 “한국도 많이 달라졌습니다”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성급했다. 그는 이 책을 쓴 지 3개월 만에 (여론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일 갈등에 대처하는 일본의 솜씨가 한국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한 이후 죽어지내고 있다. 그는 한국이 달라지지 않았는데 달라졌다고 우긴 죄를 범했다. 일본이 한국보다 한 수 아래라고 말하면 괜찮고, 한 수 위라고 하면 역적이 되는 한국사회의 관습법을 왜 몰랐을까. ‘한국이 달라졌다’는 것은 허위의식이었고 기껏해야 자만이었다.

-친일성향만 비추면 ‘친일파’-

한 외교부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조용한 외교를 더 했다간 여론 몰매로 외교부가 없어져 버릴 지경이었습니다. 우선 외교부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외교부가 독도에서 손을 떼기로 한 겁니다. 시민이 독도를 방문하든 말든 간여하지 말자, 이렇게 된 겁니다. 외교부가 살아 남아야 나라를 위해 일할 것 아닙니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너나 없이 이렇게 한쪽으로만 내달렸다. 그래서 ‘조용한 외교’는 ‘시끄러운 외교’로 전환했고, 당연한 귀결이지만, ‘독도분쟁화’라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얻은 것은 ‘우리 민족은 하나’라는, 눈곱만큼의 차이도 허용치 않는 가히 폭력적인 동질성이요, 잃은 것은 우리 사회의 다양성, 그리고 ‘독도’였다. 서울의 한 일본인은 독도문제에서 한국이 손해봤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국제 사회는 한국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이번 사태에 실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흥분하면 자기 집 세간을 부수는 사람이 있다. 지금 이 모양이다.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때 3명은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일 갈등이 이런 식으로 발전해서는 안된다고 당당히 나서는 한국의 의원은 한명도 없다. ‘다른 견해’를 대변해야 할 좌파조차 독도에 군대를 파견하라는 국가주의적 선동에 나섰다. 일본에는 있는데, 한국에는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소수견해이다. 진보·좌파라는 게 무언가. 피부색, 영토, 언어, 종교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이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유럽 좌파 정당들이 다른 국가의 노동자계급을 적대시하는 전쟁을 승인했을 때 국제주의는 끝났다고 했지만, 진보·좌파는 그런 가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한국 진보세력은 어떤가. 가엾게도 국경에 갇혀 있다.

얼마전 일본 외상은 “중국과 한국은 역사교과서가 국정교과서 하나밖에 없다”면서 “이런 바보 같은 일은 없다”고 말했다. 역사교과서를 왜곡한 주제에 남 흉보는 게 우습지만, 사실은 중국과 한국에 역사해석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이 더 우습다. 우리가 유일사관으로 역사를 쓰는 북한인가,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인가. 어느 새 우리의 역사인식은 북한·중국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역사왜곡한 일본은 다양한 역사해석을 존중하는 나라로 역전된다. 일본, 정말 한 수 위이다. 그런데도 한국사회에서는 여야, 진보·보수할 것 없이 무조건 국사교육을 강화하라고 목청만 돋운다. 이 정도면 절망적인 것 아닌가.

-소수견해 발붙이기 힘들어-

한·일간 격전 한번 치르고 나니 정부·사회의 실력과 수준이 다 드러난다. 소수견해도, 소수파도, ‘관용’도 민족감정이란 쓰나미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그 말 많고 도도한 좌파들도 여지없이 추락했다. 이 부끄러운 얼굴로 어떻게 일본과 싸우겠나. 우리는 이미 일본에 졌다. 고은 시인은 어두운 시절 ‘다른 견해’를 관용하고, 보편적 가치가 통용되는 사회를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전사이자 대시인이었다. 그가 이번에 시 ‘독도’를 써서 바쳤다. ‘그도 이제 좁은 영토 안에 닫혀있구나’라는 슬픈 생각이 들자 기형도의 시 ‘빈 집’이 떠올랐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이대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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