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안전지키기 내일이면 늦다”읽음

땅에서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시한폭탄을 지고 불섶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특히 딸자식을 둔 부모들은 요즘 외줄타는 광대의 심정이다. 도처에 지뢰고, 도처에 철조망이다. 그런 나라에서 벌어진 초등학생 성추행 살해사건은 온 국민을 경악케 했다. 어린 영혼이 파렴치한 어른의 욕심 앞에 희생당한 데 대한 안쓰러움으로 자식을 둔 부모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또 한편으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불안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지난 2001년부터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해온 청소년위원회 최영희 위원장(54)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3층의 위원장실에서 만났다. 청소년위원회는 지난해 5월 청소년보호위원회와 문광부 청소년국을 통합하여 국무총리 직속 기구로 출범한 청소년정책 총괄기구다.

[사람속으로] “청소년 안전지키기 내일이면 늦다”

-초등학생 성추행사건으로 주무 부처의 수장으로서 충격이 크셨을텐데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을 먼저 보낸 부모 마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비참한 심경입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예방책을 마련하지 못했던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사실 성추행 사건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도 법과 제도가 너무 느슨했던거 아닙니까.

“우리 사회가 성추행에 대해 너무 관대해요. 제가 NGO 활동을 할때 겪은 사례가 그런 경향을 대변합니다. 한 국립대 총장선거에 나온 후보가 성추행으로 벌금형을 받은 이력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피켓시위를 하면서 총장 선출을 반대했죠. 그런데 교수들이 투표를 통해 총장으로 뽑은 겁니다. 또 하나는 초등학교앞 문방구 아저씨가 여학생을 지속적으로 성폭행한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교장선생님을 만나러 가서 선생님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해야겠다고 했죠. 그런데 교장 선생님이 한사코 그 아이가 누구냐고 공개하라는 거에요. 그 이유가 가관이었어요. 그 아이의 평소 품행을 알아봐야겠다는 거였죠.”

▶10대대상 성범죄 ‘빙산의 일각’…취업제한 확대 등 제도보완을

최위원장은 아직도 청소년 대상 성범죄가 드러나는건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했다. 대부분 피해당사자나 부모들이 쉬쉬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훨씬 많다고 했다. 또 의사, 변호사, 공무원, 교수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직업군들도 성 범죄에 연루돼 있다는게 작금의 현실이라고 했다.

-이번 허모양 사건을 계기로 성범죄자 신상의 세부공개안을 내놓으셨습니다. 일부 국민과 야당에서는 ‘화학적 거세’나 ‘전자팔찌’착용 등 극단적 방법으로 성범죄자들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요.

“사실 성범죄자 신상공개까지 오는데도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인권위원회가 지적했듯이 ‘가해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무엇보다도 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예방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도소 내에서의 교육도 강화할 방침입니다. 청소년 성범죄자의 대부분은 정신병적인 치료를 요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밖에도 오는 6월부터는 성범죄자들이 5년간 교육관련 기관등에 취업할 수 없도록 하는등의 법이 시행된다. 그러나 최위원장은 일반 사설학원 등이나 아파트 경비원등 청소년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직업군에도 취업할 수 없도록 하는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최위원장은 평생을 인권문제를 위한 투쟁에 몸바쳐온 현장활동가였다. 70년대초 대학시절 소위 지하서클의 일원이었던 최위원장은 졸업과 함께 여성근로자들을 위해 일해왔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인권을 무시당할 수 밖에 없었던 여성근로자들의 인권을 챙기기 위해 현장에서 함께 일하면서 싸워왔다. 또 도서출판 석탑을 운영하면서 군사정권의 주목을 받으며 노동운동 관련 서적도 발행했다.

-80년대까지 주로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병행해 오셨는데 청소년문제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사람속으로] “청소년 안전지키기 내일이면 늦다”

“여성운동을 하다보니까 종착점이 일하는 여성들의 자녀 문제더군요. 그래서 청소년을 위한 내일운동센터를 만들었죠. 그곳에서 상담을 하다보니까 청소년들의 70%가 성고민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청소년 성 상담소를 만들었죠. 제가 회장이었고 구성애씨가 부회장이었습니다. 물론 구성애씨가 훨씬 유명했지만 말이죠.”

최위원장은 청소년위원회의 통합에 산파역할을 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취임후 그는 현장운동가 출신답게 직원들을 현장 속으로 투입시켰다. 또 본인도 청소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최위원장이 주목한 것은 그 많은 청소년단체나 청소년을 위한 공간들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선 시스템을 개편하는데 주력했다.

청소년들을 상담하고 지원하기 위해 운영돼온 청소년상담원과 청소년종합지원센터를 통합하여 원스톱 케어 서비스(one-stop care service)를 구축했다. 1388이라는 전화번호만 기억하면 청소년들이 전국 어디서든 자신에게 필요한 상담과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지역 청소년수련관에 가보면 정작 청소년은 없고 동네 주부들의 헬스클럽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부처 담당국장들을 채근하고 있죠. 저 때문에 요즘 관련부처 국장들이 시어머니 잘못 만났다고 난리에요. 말로는 청소년 보호 운운하면서 독자적으로 청소년과를 갖고 있는 지자체는 서울시와 경기도뿐입니다.”

-현장에서 만난 요즘 청소년들은 어떤지요? 학교폭력이나 인터넷 중독, 또 과도한 학업등 사회적으로 걱정스런 목소리가 많은데요.

“아이들끼리 ‘너는 방목이냐, 나는 사육이야’라고 얘기한답니다.그만큼 우리 청소년들이 양극단에 처해있는거죠. 저소득층 자녀나 일부 결손가정 자녀들은 방목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부모들의 지나친 관심 속에 사육되고 있습니다. 제가 만나본 요즘 청소년들은 공동체 의식은 부족하고 자신들의 권리의식은 강합니다. 그들에게 동료들의 인권을 존중할 줄 알고, 민주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갖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방목과 사육’ 극단적인 자녀교육…게임중독·가출 심각성 과소평가

또 그가 청소년위원장으로 취임해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청소년들의 게임중독이었다. 최위원장은 게임중독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일단 청소년정신의학회에 요청해서 서울대 연대 중앙대 한양대 등 정신과 의사들과 8개의 개인병원들에 의뢰하여 게임중독 치료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갔다. 완성단계에 있는 프로그램 개발을 앞두고 세계 각국의 교육단체들이 주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터넷 최강국이자 청소년들의 게임중독이 가장 심각한 우리의 현실을 볼 수 있는 단면인 셈이다.

또 하나는 가출청소년 문제였다. 정확한 통계조차 없지만 어림잡아 연간 10만명의 가출청소년, 9만7천건의 청소년 범죄가 발생한다.

“최근 조사를 해보니 청소년의 11%가 가출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가출은 청소년 범죄와 미성년자 성매매 등과 곧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입니다. 가출이 곧 범죄로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가족적 위기상황과 학교내 교육상황입니다. 가출 청소년의 대부분은 가정문제나 공부에 대한 중압감을 견딜 수 없어 뛰쳐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의 1년은 그들의 10년을 좌우하는 시간이라는 인식 아래 공동대처해야 합니다.”

지난 30여년간 여성노동자와 청소년 등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해온 최위원장은 지금도 여전히 현장활동가처럼 느껴졌다. 권위를 가지고 얘기하기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며 법과 제도개선에 앞장서고, 현장 속에서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듣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눈만 뜨면 이 나라 모든 부모들이 자식걱정을 하는 나라에서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자랄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을 뒷전으로 미뤄두고 있는 건 아이러니다. 최위원장은 “그런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초석을 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면서 당정회의 참석을 위해 자리를 떴다.

〈인터뷰/오광수 기획취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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