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돼야 부모가 된다

늦장가를 가 어렵사리 낳은 아들이 이달초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틈] 3월이 돼야 부모가 된다

2000년 ‘밀레니엄 베이비붐’ 당시 태어난 이른바 즈믄둥이다. 아내는 입학식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쳤다. “여느 해보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는데 순둥이 녀석이 잘 적응할까요. 한글과 영어 공부는 어느 정도 시켰는데 수 개념이 조금 달려 걱정이에요. 혹 왼손으로 글씨를 쓴다고 야단맞지는 않겠죠.”

밥상머리에서 끊임없이 걱정을 늘어놓는 아내에게 “이 세상에서 당신 혼자 학부모가 된 것 같다”며 결국 핀잔을 주고 말았다. 속으론 같은 고민을 하고서도 말이다. 아내의 염려와 달리 요즘 아들 녀석의 표정은 즐거워 보인다.

“아빠 운전 조심하고 잘 다녀오세요.” 출근길 현관 문밖으로 들려오는 아들의 애교섞인 목소리는 행복의 메아리처럼 느껴진다. 작은 키에 커다란 책가방을 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항상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는 녀석이 마냥 대견스럽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아들의 생활리듬이 2주일 만에 완전히 바뀌었다.

낯선 교실에서 40명에 달하는 새로운 친구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다 보니 다소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그 좋아하던 컴퓨터 오락도 마다한 채 오후 8시쯤이면 어김없이 잠든다. 퇴근이 늦은 아빠는 그래서 꿈속에 잠긴 아들의 얼굴만 바라보기 일쑤.

아내는 준비물을 귀띔하지 않은 채 잠든 아들을 원망하며 책가방을 뒤지는 데 여념이 없다. 녀석이 삐뚤 삐뚤한 글씨로 알림장에 적어 놓은 준비물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야, 일어나봐 이거 뭐라고 적어 놓은 거야. 당장 내일 갖고 갈 거면 말을 했어야지. 그냥 자면 어떻게 해.” 아내는 이내 문구점으로 달음박질친다.

그야말로 ‘3월이 돼야 한 해가 시작된 것을 안다’는 학부모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계절이다. 아내와 아들의 숨바꼭질을 보노라니 문득 한 여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난해 7월 집중호우로 집을 잃었던 조모양(19·강원 인제군). 당시 고3 수험생이던 조양의 사연은 ‘물에 잠긴 진학꿈’이란 타이틀로 경향신문에 기사화되면서 제주도에서까지 온정이 답지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유치원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잠시 접을지도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렸던 착한 여학생. 그녀의 얼굴은 9개월이 지났으나 여전히 뇌리 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

조양의 진학 여부가 너무 궁금해 출근 즉시 기자실 서랍 속에 쌓아 두었던 취재수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약간 희미해진 전화번호가 한눈에 들어오자 걱정이 앞섰다. 힘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 뭐라고 말할까. 잠시 머뭇거리다 다이얼을 돌리자 밝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저씨 저 대학 갔어요. 유아교육과…. 부모님 부담 덜어 드리려고 아르바이트 준비하고 있어요.” 괜시리 기분이 좋아져 “그래 잘됐다. 잘됐어”를 연발했다. 학부모가 된 올 3월엔 두 가지 소망이 생겼다. 철부지 초등학생과 어엿한 대학생. 물론 격이야 다르지만 새내기가 된 아들 녀석과 조양의 가슴 속에 희망이 가득 찼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승현기자|전국부〉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