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下)-미스 포터의 고향을 찾아서

당신에게도 남몰래 품은 도시가 있는지? 저릿한 통증과 함께 먼 과거의 시간 속으로 당신을 돌려 세워 놓는 도시. ‘런던’이라고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 볼이 붉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쓸쓸한 감정에 흔들리던. 2년 전 여름, 런던 지하철역에 서서 미로 같은 노선도를 들여다보던 나는 카프카가 연인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유럽을 걷다](17)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下)-미스 포터의 고향을 찾아서

“오늘은 빈의 시가 지도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단지 방 하나만을 필요로 하는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큰 도시를 건설했는지, 일순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거대한 그 도시에 내가 그리워하는 얼굴은 단 하나,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니! 런던 남부의 시골 길을 혼자 걷던 그 여름,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출근을 하고, 신문을 읽으며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눌러가며,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정착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참을 수 없이 서러워졌다. 멀지 않은 저 도시에 내 마음을 가져간 한 사람도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먼 현실. 어째서 늘 내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저토록 가까워 보이는 자리에 머무는 걸까.’

실패한 사랑보다 가슴 아픈 건 말하지 못한 사랑이 아닐까. 늙은 나무 아래 저 홀로 잎 내고 꽃 피고 열매 맺고 져버린 작은 꽃 같은. 2년 만에 나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감정의 일렁임은 가라앉은 지 오래지만 여전히 추억이 살아있다.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풍경은 늘 상처로 남는 걸까.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로 돌아와 보면 그곳의 빛은 이미 사라지고, 어둡고 쓸쓸한 풍경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기억을 품은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런던을 떠나 레이크 디스트릭트로 오던 날, 나는 베아트릭스 포터를 생각했다. 결혼을 약속했던 노먼이 죽은 후 런던을 떠났을 때, 그녀 역시 상처로 남은 런던의 풍경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유럽을 걷다](17)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下)-미스 포터의 고향을 찾아서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머문 지 닷새째 되던 날, 나는 그녀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하늘은 온통 회색빛이다. 마지막 빛을 쏘아올리던 지난해는 이렇게 지고 있다. 부두에서 배를 타고 보네스(Bowness)로 건너간다. 비가 내린다. 베아트릭스 포터가 처음 구입한 농장 힐톱(Hill Top)은 10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을 기점으로 봄까지 문을 닫았기에 보네스의 ‘베아트릭스 포터의 세계(The World of Beatriz Potter)’로 향한다. 이곳은 그녀의 동화 속에 나오는 온갖 동물들의 모형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호기심 많은 토끼 피터 래빗과 알을 낳기 위해 여우의 소굴로 들어가버린 오리 제이미 퍼들 덕이며 나뭇잎 배를 타고 모험을 떠난 다람쥐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다. 부모와 함께 온 어린이들 곁에서 나는 아이들보다 더 흥분해 발을 돌리지 못한다. 포터는 1866년, 런던 사우스 켄싱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바깥 세상과 접촉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부모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극히 적었고 하나뿐인 남동생도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고독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녀는 옥상에서 키우던 애완동물들-개구리, 두 마리의 도마뱀, 방울뱀, 자라, 박쥐, 벤저민, 피터라 이름 붙인 두 마리의 토끼들-을 관찰하며 보냈다. 포터는 몇 시간이고 이들을 들여다보며 꼼꼼하게 그들을 그리곤 했다. 매해 여름이면 포터의 아버지는 시골집을 빌렸다. 처음에는 스코틀랜드 퍼스셔에서, 포터가 열다섯살 되던 해부터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여름을 났다. 윈더미어에 머물던 1882년, 포터는 목사 캐논 론슬리를 만나게 된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과도한 개발과 관광산업에 우려를 표하던 그는 1895년, 자연과 문화를 보호할 목적으로 내셔널 트러스트를 설립한 인물이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자연과 깊은 사랑에 빠진 어린 포터는 런슬리를 통해 평생 그녀에게 각인되는 자연보호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1893년 포터는 전 가정교사의 앓고 있던 다섯살배기 아들 노엘에게 그림 편지를 보낸다. 피터 래빗의 첫 등장이지만 1902년이 되어서야 피터 래빗 이야기를 출판해 줄 출판사를 만나게 된다. 출판사의 편집자 노먼과 포터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는 르네 젤위거와 이안 맥그리거가 주연한 영화 ‘미스 포터’에 세심하게 묘사되어 있다. 햇볕 아래 드러낼 수 없었던 금지된 사랑이었지만 포터는 용감하게 그 사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결혼을 약속한 노먼이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후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는 마침내 노먼의 동생 밀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노먼은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충만하고 행복한 인생이었어. 나도 내년에는 새로운 시작을 시도해야만 하겠지.”

그녀는 “사랑하지 못한 나의 고향 런던”을 떠나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연인을 잃고 기댈 곳 없던 그녀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눈물을 닦아준 건 말없는 자연이었을 것이다. 1903년부터 1913년까지의 10년은 그녀가 가장 왕성하고 활발하게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만든 기간이다. 고양이, 다람쥐, 집오리, 고슴도치 등 숲 속이나 농장에 사는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그림을 그리고 산책하고 밭을 갈거나 양들을 키우며 그녀는 다시 현실에 뿌리를 박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변호사인 윌리엄 해리스의 도움으로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농장들을 하나씩 구입하고, 마침내는 마흔 일곱의 나이에 그와 결혼한다. 그녀는 빼어난 동화작가였을 뿐 아니라 전통방식의 농업을 지키고 장려한 진정한 농부이기도 했다. 사라져가던 토종 허드윅양들을 직접 길러 양경연대회에서 상을 휩쓸기도 했다. 1943년에 그녀는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허드윅 양목업자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는데 농부로서 지역사회에서 거둔 성공을 뜻하는 일화다. 나에게도 깊은 산자락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고픈 꿈이 있다. 그때 내 일상이 몸만 산 속에 둘 뿐 삶의 방식은 서울에서와 같은 그런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한 농부로 거듭났던 포터처럼 나 역시 밭을 일구고, 먹거리를 생산하며, 숲의 동식물들을 관찰하는 일들에 기껍게 몸과 마음을 쓰고 싶다. 또 포터는 그녀에게 영감을 주고 삶을 고양시킨 자연을 사랑하고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대상이 본연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애쓰는 게 아닐까. 논어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살게끔 하는 일(愛之欲其生)’임을 포터는 알고 있었다. 1943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포터의 몸은 그녀가 사랑했던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숲에 재로 뿌려졌다. 그녀는 4000에이커의 땅과 몇 채의 집들과 15개의 농장에 이르는 대부분의 재산을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증했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그녀의 유언대로 지역 농부들과 힘을 모아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옛모습 그대로 지키고 가꿔가고 있다.

상처로 남은 추억은 때로 살아갈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실패한 사랑이 삶을 긍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실패와 상처 속 절정과도 같은 생의 한 순간을 지나온 사람들은 그 순간의 영원성에 기대어 남은 생을 견뎌갈 힘을 얻기도 하는 법이다. 노먼의 죽음이 그녀에게 독립적인 새 삶을 시작할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고독한 어린 시절이 그녀에게 그림을 그리고 동화를 짓게 만들었던 것처럼. 외로움이 무언가를 낳기도 하는 법이다. 내 외로움도 무언가를 낳을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어본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보낸 지난해 말, 나는 달콤한 외로움에 빠져 있었고 쓸쓸한 행복으로 충만했다. 한없이 고요하고 단아하고 평화로웠다. 호수를 낀 숲과 언덕을 거닐며 이끼 낀 돌담에 기대어, 호젓한 길목의 벤치에 앉아, 수도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내 운명이 다른 사람의 그것보다 나은 것에 대해 조금은 불안해했던.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 공원

잉글랜드 북서부 쿰브리아주. 동서로 50㎞, 남북으로 40㎞의 레이크 디스트릭트 내셔널 파크의 소유권을 가장 많이 가진 단체는 역시 내셔널 트러스트다. 잉글랜드 최대 규모의 호수인 윈더미어를 비롯해 수십개의 호수와 산과 계곡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워스워드와 베아트릭스의 자취로 가득한 이곳에서는 포터의 농가인 힐톱(Hill Top)과 호크셰드(Hawkshead)에 위치한 베아트릭스 포터 갤러리 등도 볼 수 있다.

■참고 사이트

www.english-lakes.com : 레이크 디스트릭트 지역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www.peterrabbit.com : 포터의 동화를 영어로 들을 수 있고, 포터의 생애와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한 정보도 있다.

<시리즈끝>

〈김남희 도보여행가 www.skywaywalker.com〉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