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열풍에 주눅 든 국어교육 살려야”

정리 김진우기자

한글학회 창립 100돌 기념 대담

“한글은 우리 문화·정신의 집약 영어마을에 수백억씩 쓰듯 우리말교육 관심 쏟은적 있나”

“훈민정음 창제 혁명적 사건 한국어 자체를 소중히 해야 ‘한국의 가치’ 알릴수 있어”

한글학회(회장 김승곤)가 31일 창립 100돌을 맞는다. 이를 기념해 30일 창립 100돌 기념식을 비롯, 다양한 행사가 마련된다. 특히 29~30일 서울 건국대에서 열리는 국제학술대회가 한글학회 100돌의 의미를 되새기는 의미 있는 행사로 국내외 학자 18명의 다양한 글들이 발표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한글학회의 출판사업’을 발표하는 리의도 춘천교대 교수와 ‘언어를 배우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를 발표하는 노마 히데키 도쿄외국어대학대학원 교수의 대담을 통해 우리 말글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봤다. 리의도 교수(이하 리의도) = 주시경 선생이 한글학회의 모태인 국어연구학회를 결성한 게 한일합방 2년 전인 1908년 8월31일이다. 나라의 기울어짐을 보면서 나라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한 일이다. 명칭 때문에 한글학회가 한글이라는 문자에만 정성을 쏟는 걸로 알려졌는데, 우리말을 지키고 연구하고 보급·교육하는 게 목적이다. 한글학회로 명칭이 바뀐 건 남북 분단 때문이다. 분단 전에는 조선어학회였는데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기면서 북쪽과 같은 뜻을 지닌 학회로 오해받고 매도당했다. 그래서 바꾸었다.

리의도 <춘천교대 교수>

리의도 <춘천교대 교수>

노마 히데키 교수(이하 노마) = 일본은 1944년 설립된 국어학회를 2004년 일본어학회로 명칭을 바꿨다. 일본에서 ‘국어’라는 개념은 아시아 침략에 나서려는 시절에 생겼다. 근대 국가로서 언어를 통일하면서 방언이나 소수민족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국어’는 국가의 언어라는 뜻인데 국가가 언어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면이 있다. 그게 한국에 유입돼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리의도 = 우리나라는 국어를 무척 신성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국어라는 게 보통명사이지 특정 언어의 명칭일 수 없다. ‘한글’이라는 말도 한국어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순수한 한국어를 한글이라고도 한다.

노마 = 국가와 국가 사이가 아니라 모든 개개인이 서로 어울리는 세계라는 관점에서 한국어를 생각했으면 한다. 한민족 언어로서의 한국어도 중요하지만, 한국어도 수많은 언어 중 하나이고 개인의 언어로서 있을 수 있다는 넓은 시야가 필요한 것 같다.

리의도 = 한국어의 세계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일본은 어떤가.

노마 = 일본어의 세계화는 사실 ‘일본 침략’과 많이 겹친다. 패전 이후 그런 경향이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순수하게 언어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입장들이 다양하다.

리의도 = 일본에서의 한국어 교육은 어떤가.

노마 히데키 <도쿄외국어대학원 교수>

노마 히데키 <도쿄외국어대학원 교수>

노마 = 해방 후 재일교포들이 한국어교육의 주체였다. 민족학교의 역할이 컸다. 일본 학자들이 한국어를 연구할 때 한국만 생각하는 게 아니다. 북한도 있고 옌볜도 있고 중앙아시아도 있다.

리의도 = 남한뿐 아니라 북한, 옌볜, 사할린, 중앙아시아에서 쓰는 말도 한국어다. 적어도 8000만명이 한국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영어 교육을 강화하고 더 나아가 공용어로 쓰자는 주장까지 있다.

노마 = 일본도 없지 않아 있다. 국립국어연구소를 없애자는 말이 있는데 그런 움직임과 관련되지 않겠나.

리의도 = 한국에선 아이든 어른이든, 국가든, 기업이든 영어 열풍에 빠져 있다. 영어가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에 비례해 한국어에 대한 투자나 관심이 줄어든다. 영어 교육을 강화하는 만큼 한국어 교육열도 올라가면 좋은데… 항상 반대다.

노마 = 일본은 한국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 사견이지만 일본이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해왔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그런 면이 있으니까 그런 것 같다.

한글학회의 모태인 국어연구학회를 만든 주시경 선생의 초상화 아래에서 리의도 춘천교대 교수(왼쪽)와 노마 히데키 도쿄외국어대학 대학원 교수가 지난 28일 대담을 하고 있다. 김세구기자

한글학회의 모태인 국어연구학회를 만든 주시경 선생의 초상화 아래에서 리의도 춘천교대 교수(왼쪽)와 노마 히데키 도쿄외국어대학 대학원 교수가 지난 28일 대담을 하고 있다. 김세구기자

리의도 = 민족적 기질인 것 같기도 하다. 월드컵 경기 응원하는 걸 봐도 뭔가 사회적인 문제가 떠오르면 휩쓸려가고 거기서 빠지면 낙오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국어교육의 문제는 영어교육 열풍 앞에서 주눅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국어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수능시험 언어영역도 그냥 외국어 공부하듯이 하고 있다. 생각을 심어주고 정신을 계승하는 측면이 소홀하다. 영어마을에는 몇 백억원씩 투자하지만 한국어교육에 얼마 투자했다는 뉴스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영어교육에 반대하자는 게 아니다. 영어교육도 정도에 맞게 제대로 하고 그에 비례해 우리말 교육도 가지런히 제대로 하자는 거다. 엄청난 외세 앞에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 내던진 선배들이 있었다는 걸 한 번 생각해봤다면 영어라는 외세 앞에 정신 차려야 하지 않겠나.

노마 = 영어하는 건 좋지만 한국어 자체를 소중히 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의 제일 깊은 것을 세계로 알릴 수 있지 않겠나.

리의도 = 한국어를 지키고 알리는 게 단순히 언어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 문화, 정신, 산업 등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집약돼 있다.

노마 = 훈민정음 창제 당시 최만리 같은 분은 굉장히 반대했다. 그걸 사대주의라고만 할 수 없는 게 모든 지(知)가 한자로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개짖는 소리 같은 것을 표기할 수 있느냐고 했다. 언어학적으로 다양한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할 수 없었다. 그런 것까지 관찰하고 있었다. 훈민정음 창제는 지성에 대한 혁명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냥 문자가 없으니까 만들어봤다가 아니다. 지 자체를 바꿔야 했다. 게다가 한자는 전부 붓으로 쓰면서 왕희지 서체를 정점으로 한 체계가 있었는데 훈민정음은 붓으로 표현하기 굉장히 어렵다. 문자를 형성하는 형태의 미학까지 바꿔놓는 것이었다. 지성에서 감성까지 모든 것에 도전하는 굉장한 혁명이었다. 정리 김진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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