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왕국을 세워라’ 발간 이병훈 PD

문주영기자

“조선왕조 시리즈 연출땐 실록 300권이나 읽었죠”

사진 | 레이디경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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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장금> <허준> <상도>의 연출자 이병훈 PD(65)는 국내 사극사에서 새로운 획을 그은 인물이다. <허준>과 <대장금>의 평균 시청률은 각각 48.3%, 46.3%로 역대 드라마 중 시청률 베스트 3위와 5위를 차지했으며, 한류 열풍의 시초인 <대장금>은 지금까지 전 세계 64개국에 수출됐다. 이런 결과를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국내 사극은 실상 1999년의 <허준>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 그 전까지 국내 사극들은 사료에 바탕을 둔 조선왕조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허준> 이후부터는 젊고 트렌디하며 상상력이 풍부해진 ‘퓨전 사극’이 새로운 물꼬를 트게 된다. 이 같은 변화의 전면에 이병훈 PD가 있었다.

내년 1월 MBC에서 방송 예정인 새로운 사극 <동이(同伊)>를 준비 중인 그는 자신의 드라마 인생과 사극 제작의 뒷이야기 등을 담은 저서 <꿈의 왕국을 세워라>(해피타임)를 최근 발간했다. 책에는 <대장금>의 여주인공 이영애가 실은 캐스팅 7순위였다는 것, <허준>의 예진아씨를 비롯해 <서동요>의 선화공주, <대장금>의 장금이 등의 1순위 캐스팅 후보는 송윤아였다는 것, 방청객으로 놀러온 고 최진실을 처음 발굴해 연기자로 데뷔시킨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이산> 이후 책을 집필했다는 그를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책에 보면 사극의 소재를 주로 독서를 통해 찾는다고 돼 있습니다.

“작품 끝나면 항상 하는 일이 독서하고 미국·일본 드라마를 챙겨보는 것입니다. 신춘문예 당선작을 비롯해 각종 수상작도 봅니다. 독서는 사실 (드라마 PD로서) 하나의 일이에요. 소설을 통해 얻은 아이디어는 드라마를 구성할 때 많은 도움이 돼요. 영화를 보면 영상이 머리에 남아 모방하고 싶어지지만 책을 보면 이미지가 마구 펼쳐집니다.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난생 처음 바다에 가 어린애처럼 뛰어노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송영의 성장소설 <꼬마 야등이의 세상보기>에서 따온 아이디어입니다.”

-사극을 연출하면 사료나 역사서적도 많이 접하실 것 같은데요.

“1980년대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8년간 연출할 때 조선왕조실록 300권을 읽으며 했습니다. <서동요> 준비하면서 삼국시대 서적 60권, 백제 서적 30권을 샀고, <이산>하면서는 정조 관련 책 20권을 샀습니다. 책이 많아 이사 갈 때마다 200~300권씩 버리는데 역사책은 아깝고 결국 소설책들을 버리게 되더군요. 하지만 제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는 생각 안 합니다. 소설 <동의보감>의 저자인 이은성씨네 집을 30년 전 간 적이 있는데 집안 전체가 책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55세 때 <허준>으로 현장에 복귀하면서 사극을 만드는 관점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사극을 역사기록 그대로 재연하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80년대 인현왕후 편을 하면서 숙종이 장희빈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어느 처소에 있는 누구냐’ ‘옥정입니다’ 하고 그냥 데려가는 거였어요. 둘은 조선시대 최고의 러브스토리인데 당시에도 뭔가 빠진 듯 아쉬웠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데스크 PD를 거쳐 현장에 복귀했는데 딸이 아빠 사극은 재미없다며 하지 말라고 하는데 충격이었습니다. 또 일본 NHK가 97년 방송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극이 시청률 30%로 히트를 쳤는데, 연출자의 인터뷰를 보니 젊은층이 많이 봐서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허준> 때부터 젊은층을 잡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내·외부적으로 새로움에 대한 반대는 없었나요.

“<허준> 예고편 때 랩음악을 배경음악으로 깔았는데 방송국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간부들이 당장 음악을 바꾸라고 해 이틀만 기다려달라고 간청했죠. 그런데 정말 이틀 후부터 시청자 반응이 좋아지더니 아무 말 없더군요. 극중 배경음악으로 피아노 생음악을 깔았을 때는 네티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사극에 무슨 피아노 음악이냐면서요.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니까 오히려 새롭고 신선하다는 반응이 많아지면서 그 논란 역시 잠잠해졌습니다.”

-재미 넘치는 사극은 좋지만 때때로 심한 상상은 고증 논란에 휩싸입니다.

“사극은 교육적인 면이 있어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면 안 되기 때문에 고증은 아주 중요합니다. 얼마 전 김홍도의 이야기를 다룬 <바람의 화원>이 방영됐는데 저 역시 <이산> 전에 김홍도와 신윤복의 이야기를 검토한 적 있습니다. 그런데 전 신윤복을 여자로 설정하는 건 반대입니다. 드라마를 본 청소년들은 역사적으로 남자라고 돼 있는 신윤복을 여자라고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바람의 화원>은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방송은 어떤 매체에 비해 윤리성과 공익성이 강조됩니다. 전 김홍도와 신윤복의 관계를 사제지간이 아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처럼 경쟁자 관계로 설정하고 싶었습니다. <이산> 방영 중에 <바람의 화원> 소설이 나와 결국 그 소재는 접었어요.”

-<허준>의 내의원, <상도>의 상단, <대장금>의 수라간, <이산>의 도화서 등 항상 특정 집단이 극중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의도적인 겁니다. 왜냐면 시청자들이 ‘이병훈표 사극은 뻔하다, 주인공 고생시키고 나서 다 해결한다’는 식으로 비판하면 사실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국 다르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보니 새로운 걸 찾아냅니다. 또 역사드라마를 하다 보니까 우리 문화를 알리는 게 참 중요하더군요. 드라마 방영 전에 ‘도화서’ ‘수라간’ 등을 아는 사람은 5%도 안 될 겁니다. 또 우리 사극이 수출된다는 건 한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왕이면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현재 준비 중인 <동이>도 전통음악을 다루는 ‘장악원’이 배경입니다.”

-지금까지의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어느 것입니까.

“18세기 말~19세기 초 경제상황을 다룬 <상도>입니다. 그 시기는 우리 경제가 가내공업에서 시장경제로 바뀐 전환점으로 그 전까지 사극에서 경제를 다룬 적이 없어요. 고려대 경제학과 이헌창 교수에게 당시 500여개의 생활필수품 값을 알려달라고 해 현재의 가치로 환산했고, 이 교수에게 작가·연기자·스태프들을 상대로 특강을 부탁하는 등 정성을 많이 들였어요. 그런데 시청자들은 이야기가 어려웠는지 시청률이 좀 낮았습니다. 당시 경쟁작이 <여인천하> <겨울연가> 등으로 쟁쟁했던 탓도 있었죠. 그래도 그해 방송대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고, 2002년 사극으로는 처음 해외에 수출된 점 등은 다행입니다.”

-<대장금>은 엄청난 한류 바람을 몰고온 드라마였는데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

“신분이 낮은 여자가 역경을 딛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할리우드식으로 사건 전개가 빠른 데다 시각적으로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나라에서든 통합니다. 동양의술이라는 요소도 흥미를 끌었던 것 같습니다. <대장금> 바람 이후 <허준>이 수출됐고, 서동요는 30여개국, 이산은 25개국에 수출됐습니다.”

-책에 연기자 송윤아씨에 대한 애착이 각별했다고 밝혔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드라마 <애드버킷>에서 변호사로 나온 송윤아씨의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또 송윤아씨와 함께 일한 모든 PD들의 칭찬이 자자했어요. 연출자로선 매력 있다고 생각하는 배우가 성실하기까지 하면 최고입니다. 드라마를 하다 보면 전 별로지만 시청자들이 좋아해서 쓰는 배우들이 있는데 사실 좋아하는 배우와 일하는 건 연출자의 행복입니다. 하지만 인연이 없는지 송윤아씨와는 계속 안 되더군요. <서동요>의 선화공주 역으로도 송윤아씨를 생각했는데 나이가 안 맞아 결국 이보영씨가 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가장 인상적인 연기자는 누구였습니까.

“이순재씨입니다. 요새 젊은 배우들은 깐깐하고 엄한 선배들과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순재씨는 쓸데없이 노인성에 의해 야단치는 게 없어요. 후배들이 잘못해도 못 본 척하고 다 귀엽게 봅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배우들이 촬영장에서 이순재씨 앞에서는 장난도 치고 매우 좋아합니다. 이순재씨는 연기준비가 철저하고, 겸손하며 70대임에도 젊은이들의 트렌드에 뒤지지 않는 등 배우로서도 완벽합니다.”

-사극의 캐스팅이 어렵다고 토로하셨는데 요즘 젊은 여배우들이 출연하는 사극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남들은 이요원·정려원 등 젊은 여배우들을 어떻게 캐스팅을 했나 궁금합니다. 전 제가 같이하고 싶었던 (여)배우와 일한 적은 이영애씨가 유일합니다. 제 드라마가 실패한 적이 없는데 캐스팅은 쉽지 않으니 요새 그것 때문에 회의에 빠져 있습니다. 최완규 작가는 제가 배우들을 너무 고생시켜서 그런 거라고 말합니다. 제 드라마 하면 고생이 심하다고 소문이 났다더군요. 제가 나이를 먹어서 절 모르는 배우들은 제가 어렵고 불편한 듯해요. 그래서 젊은 배우들 편하게 하려고 촬영장에서 별 농담 다합니다. <서동요> 때 주인공 조현재씨가 제 아들과 동갑인데 제 앞에서 담배 피우는 걸 어려워해 항상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주인공이 편해야 하니까 제 앞에서 피우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새로 준비하시는 <동이>는 어떤 사극입니까.

“영조의 생모 ‘동이’에 관한 일대기입니다. 훗날 숙빈 최씨가 되는 동이는 영조의 생모로 장희빈이나 인현왕후 이야기를 할 때 ‘최 무수리’로 등장했던 미미한 인물입니다. 영조의 어머니임에도 천민 출신이라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등의 기록이 없습니다. 역사는 냉정해요. 아무리 임금의 어머니라도 천민이면 관심을 갖지 않죠. 전 동이가 장악원 노비로서 궁에 들어가게 설정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장악원을 무대로 아악, 향악, 당악 등 조선의 음악을 보여줄 예정입니다.”

이병훈은 누구

1944년 충청남도 전의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임학과를 졸업한 뒤 PD 공채 2기로 MBC에 입사했다. <113 수사본부> <제3의 교실> <사랑의 계절> 등을 연출했고 이후 <암행어사>를 거쳐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8년간 연출하면서 사극의 매력에 빠져든다.

데스크 PD로 현장을 떠난 지 8년 만에 한국 사극의 이정표를 세운 <허준>을 99년 연출해 국민드라마 감독 반열에 오른다. 이후 <상도> <대장금> <서동요> <이산> 등을 제작했다. 현재는 MBC를 퇴사해 프리랜서 PD로 활동하고 있으며 내년 1월 방송 예정인 새로운 사극 <동이>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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