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곳에서 21년 프로야구 선수 마감하는 송진우 한화 투수

오동근기자

“내 자리만 안주하면 도태… 체인지업 배운게 전환점”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역사’ 송진우가 은퇴 후 지도자로서 제2의 야구인생을 걷게 된다. 송진우가 21년간 정든 대전 한화구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전 | 남호진기자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역사’ 송진우가 은퇴 후 지도자로서 제2의 야구인생을 걷게 된다. 송진우가 21년간 정든 대전 한화구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대전 | 남호진기자

올해로 28년째를 맞이하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등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선수는 단 6명. 1986년 사고로 사망한 OB베어스 포수 김영신 선수의 등번호 54번을 시작으로 해태 타이거스 선동열(18), OB 베어스 박철순(21), LG 트윈스 김용수(41), 삼성 라이온스 이만수(22), 그리고 한화 이글스 장종훈(35)이 그들이다. 한국야구의 ‘살아있는 전설’ 송진우(한화·43)가 지난 17일 은퇴를 선언했다. 프로통산 200승, 2000탈삼진, 3000이닝을 돌파한 유일한 선수다. 한화 구단 측은 그의 등번호 21번을 은퇴와 동시에 영구결번시키고 올시즌 내로 고별경기를 열기로 했다. 20일 대전구장에서 만난 그는 유니폼 대신 체크무늬 셔츠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전날부터 내린 비 때문에 이날 경기는 취소됐다. 선수단이 빠져나가 휑한 그라운드를 바라보며 그는 선수가 아닌 야구계의 선배로서 느끼는 소회를 털어놓았다.

- 한화는 현재 최하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소속팀이 부진한 상황에서 떠나는 마음이 무겁지 않습니까.

“빙그레(한화의 전신)에 입단해서 여기서 선수생활을 마감하는데, 진짜 힘듭니다. 한 곳에서만 21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팀 성적이 좋아야 마음도 편한데 하위권에 처져 있으니…저도 그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후배들에게 책임감을 가지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요즘 경기를 보면 매일 지니까 일종의 패배의식 같은 것에 젖어 있습니다. 경기 중반 이후로 지고 있으면 마치 당연하다는 듯 생각하는 것 같고. 질 때 지더라도 자신이 책임감을 가지고 경기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 평소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합니다. 담배는 물론이고 술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목욕할 때 손가락 피부가 물러지지 않도록 왼손은 물에 담그지 않는다든지, 시즌 중에 손톱깎이와 두 종류의 사포, 반창고 등을 필통에 넣어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공을 던지는 검지와 엄지는 매일 사포로 갈았어요. 손톱깎이로 깎다가 자칫 상처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사실 이건 김성근 감독의 영향이 큽니다. 예전 태평양 감독으로 계실 때 선수들에게 얘기하는 것을 TV로 봤거든요. 그걸 보고 나도 따라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 비시즌 중에도 그렇게 생활한다면 삶이 피곤할 것 같은데요.

“물론 시즌이 끝나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거기에서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어요. 익숙해진다면 아무렇지도 않죠. 습관이란 게 무섭습니다.”

- 꾸준한 자기관리뿐만 아니라 항상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는 선수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야구를 시작하고 가장 큰 위기가 1998년 말이었습니다. 97·98년에 각각 2승만을 거두면서 ‘이제 더이상 안되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미국 애리조나 교육리그 캠프에 가서 처음으로 체인지업을 익혔어요. 메이저리그에 제이미 모이어라는 선수가 있는데 그 친구가 던지는 체인지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새로운 구질에 적응하니 자신감도 생기고 일종의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슬라이더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항상 슬라이더를 몸쪽으로 던져야 할까. 바깥쪽으로 던지면 안될까’라는 생각에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던질 때는 국내에 그런 구질이 거의 없었어요. LG 오상민 정도가 의도적으로 구사했죠. 내 자리가 좋다고 생각하면 발전하지 못합니다. 계속 공부를 해야죠. 그런 노력이 저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4월9일 프로통산 3000이닝을 달성했습니다. 그때 왜 표정이 밝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그때 제가 등판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처음 나오는 기록인데 지는 경기에 내보낼까 생각해서 몸도 풀고 있지 않았어요. 팀이 이기고 있어야 폭죽도 터뜨리고 기분이 좋았겠죠. 지나고 나니까 조금 아쉬웠습니다. 3000이닝을 던지려면 150이닝씩 20년을 던져야 합니다. 요즘 같으면 한 팀에 한 명 정도가 한 시즌 150이닝을 넘길까요. 그러니 그 기록이 얼마나 애착이 가겠습니까.”

- 요즘은 부상방지를 위해 선수들에게 많은 이닝을 맡기지 않는데요.

“일반적으로 공 100개를 기준으로 선발투수를 내리는데 전 이해를 못합니다. 저는 120~140개까지 던졌습니다. 아마 이닝당 15개 정도의 공을 상정하고 7이닝 던지면 된다고 계산해서 100개를 한계로 보고 부상을 막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저는 오히려 투수의 밸런스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좋은 투수들은 1회부터 9회까지 공의 속도는 좀 떨어져도 구위는 여전합니다. 컨디션이 좋으면 오히려 5회 이후에 속도가 더 나오기도 하지요. 반면 안 좋은 투수들은 기복이 심합니다. 힘으로 던지기 때문이에요. 리그 최정상급의 모 투수는 던질 때마다 머리가 옆으로 떨어집니다. 그런 경우는 부상 가능성도 있고 오래 던지지 못할 거예요. 예전 선동열 투수를 보세요. 하체의 균형이 있으니 공에 위압감이 있습니다.”

- 올해 선수협이 노조를 추진했지만 잘 되지 못했습니다. 초대 선수협회장으로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저는 노조에 대해 선수들이 모두 공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선수협의회는 협상권이 없습니다. 파업을 한다고 해도 불법이죠. 결국 노조가 있어야 협상의 파트너로서 인정받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데 지금은 법적으로 보호를 못 받고 있습니다. 일전에 선수협과 KBO가 여러가지 제도나 보완해야 할 점에 관해 상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도 이에 대한 후속조치가 없었다고 합니다. 대화상대로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요. 올해도 월요일 경기 등에 대해 선수들과 협의를 했으면 시즌 중 바뀌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구단도 노조에 대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 프로야구도 노조가 있는데 야구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이번에 필요성을 느껴서 추진을 했는데 시즌 중이라서 그런지 잘 안됐습니다. 그렇지만 시기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될 거라고 봅니다.”

- 21년간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동안 가장 발전이 덜 됐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구장 문제가 가장 큽니다. 대전구장도 2006년에 잔디를 새로 깔았는데 그때 제가 조사해보니까 전국에 잔디가 깔린 축구장이 400개 정도 되더라고요. 야구장은 50개도 안됐습니다. 대전에는 대전구장 딱 하나였지요. 서울 같은 큰 도시에서도 잔디 깔린 야구장을 얼마나 볼 수 있습니까. 요즘 직장 야구인도 많이 늘었는데 구장이 없어서 못한다고 합니다. 축구는 일주일에 2번 하나요. 야구는 6번이나 하는데 보러온 관중이나 경기하는 선수들이 낙후된 구장에 오고 싶겠습니까. 문학이나 잠실, 사직 정도를 제외하고 지방구장들은 아직도 너무 안 좋습니다. 구단이 적자라고 하니까 무조건 주장할 수도 없고, 입장 수입료를 구단이 전부 가질 수 없는 문제가 해결돼야 합니다.”

- 두 아들이 야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소질이 있습니까.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는 그 누구도 파악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정민철 선수는 처음 프로에 들어와서 전지훈련도 함께 못 받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공을 예쁘게 던졌어요. 결국 노력과 재능 등이 모두 맞물려서 잘하는 거죠. 우리 아들들에게는 항상 재미있는 생각을 가지고 운동을 하라고 합니다. 그럼 나머지 성적은 자연스럽게 따라와요. 즐거워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일전에 토끼와 거북이 얘기를 하면서 거북이 같은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거북이라고 하기엔 너무 빠르지 않았나요.

“제가 선동열이나 최동원 선배들처럼 한 시즌에 20승을 달성한 적도 없고 19승을 딱 한 번 했습니다. 프로생활 21년 중 19승 한 번이면 결코 많은 게 아니죠. 화려하진 않았지만 성적을 꾸준히 유지하며 오래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복이 있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송진우는 누구

충북 증평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글러브를 잡았다. 세광고 시절 당시 동국대 감독이던 한화 김인식 감독이 집으로 찾아와 스카우트를 제안해 이에 응했다. 동국대 졸업 후 1988년 서울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하기 위해 실업야구팀인 ‘세일통상’에 입단했다. 89년 한화 이글스의 전신인 빙그레에 입단해 한 팀에서만 21년간 프랜차이즈 스타로 활약했다. 프로 데뷔 첫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등 21년간 210승(153패), 2048탈삼진, 3003이닝, 103세이브, 평균자책점 3.51이라는 숫자를 남겼다. 2000년 프로야구 선수협회를 창립하며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꾸준한 자기관리와 모범적인 생활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고, 이로 인해 ‘회장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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