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날엔 압구정이 아니라 서울역에 가요”읽음

김희연 기자

노숙인·재소자·쉼터 찾아 인문학 강의하는 최준영 교수

낮은 곳으로의 인문학

‘성 프란시스 대학’에서 5년 전 노숙인들을 모아놓고 인문학 강의를 시작했을 때 세상은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 ‘노숙인’과 ‘인문학’은 이벤트 거리로 충분했다. 폭발적인 관심은 곧 사그라졌지만 그들의 강의는 계속됐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서 노숙인들의 인문학 사랑은 씨를 뿌렸다. 씨앗은 사회와 격리된 재소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소외된 차상위계층에게도 옮겨갔고 문화센터의 일반인, 직장인과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퍼져나갔다.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돼 ‘시민 인문학’이란 새로운 문화흐름까지 낳았다.

최준영 교수는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 강단에서 쉼 없이 활동하고 있다. 그는 “힘든 여건 속에서 공부하는 선생님들(노숙인 학생 등)을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웃음이 껄껄 나온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최준영 교수는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 강단에서 쉼 없이 활동하고 있다. 그는 “힘든 여건 속에서 공부하는 선생님들(노숙인 학생 등)을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웃음이 껄껄 나온다”고 말했다. 김영민 기자

그 중심에는 ‘거지 교수’로 불리는 최준영씨(45)가 있다. 그는 지난 5년간 가장 낮은 곳에서 ‘인문학’이란 이름 아래 별난 학생들과 눈물 콧물을 빼며 부대껴왔다. 노숙인 쉼터, 교도소, 자활센터 등을 찾아다니며 지칠줄 모르고 문학과 글쓰기 등을 강의했다. 강의실을 벗어나 노숙인의 거리의 죽음에서는 기꺼이 상주로 나섰다. 그는 이 시대의 인문학에 대해 “인간과 인간이 아무런 조건 없이 마주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개강을 앞두고 인생에 지쳐있는 학생들과 낭독할 시를 모으며 행복해한다. 그를 만나 ‘낮은 곳으로의 인문학’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 ‘거지 교수’란 명칭이 마음에 듭니까.

“그렇게 안 불렸으면 합니다. 저와 함께 공부한 ‘선생님’들을 ‘거지’로 표현한 것이니까요. 그분들이 마음 상할까 염려돼요.”

- 인문학 강의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요.

“성 프란시스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로 시작했어요. 노숙인 인문학 강의를 처음 만든 ‘성공회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전 임영인 소장(성공회 사제)이 제안했습니다. 석·박사 학위는 고사하고 대학 졸업장도 없는 제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처음엔 거절했죠.”

최 교수는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으로 등단한 작가다. 신문에 칼럼을 쓰며 2004~2009년 교통방송과 SBS 라디오 <이숙영의 파워 FM> 등에서 책소개 코너를 맡아왔다. 임 신부는 자신이 발행하는 후원회지에 칼럼을 쓰던 최 교수에게 노숙인들을 위한 작문 강의를 부탁한 터였다.

- 그런데 왜 마음을 돌렸나요.

“임 신부가 ‘솔직히 급(級)이 되는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모두 안 하겠다고 한다. 변변한 강의실도 없고, 강사료가 많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노숙인들을 데려다 놓고 강의한다니까 모두 고개를 내젓더라’는 거예요. 강의할 사람을 못 구해 애를 먹는 상황에서 저라도 해야겠다고 용기를 냈죠. 20여년 전 야학에 다닐 때부터 막연하게나마 가난한 사람들의 배움을 돕고 싶다는 꿈이 있었으니까요.”

- 첫 강의는 어땠습니까.

“땀 흘린 기억밖에 없어요. ‘니가 우리들한테 뭘 가르친다고 나서는지 함 두고보자!’는 눈초리 같았죠. 첫 강의 후 때론 선생님들(그는 노숙인 학생들을 꼭 선생님으로 불렀다) 사이에 다툼이 일어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기도 했어요.”

- 인문학보다는 ‘밥과 잠자리’가 더 절실한 것 아닌가요.

“당장의 밥과 잠자리는 한 끼, 하룻밤을 해결합니다. 그런데 노숙인 인문학은 밥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더 괴롭히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니까요. 20년, 30년 만에 볼펜을 다시 쥐고 지나온 과거를 정리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게 합니다. 시와 소설을 읽으면서 미움과 분노와 그리움의 묵은 감정을 토하게 만들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자신도 거들떠보지 않던 자신을 쳐다보고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는 사람만이 미래도 생각하게 되잖아요. 비로소 그들에게도 미래라는 것이 생기는 겁니다. 무기력과 술에 절어있던 이들에게 미래가 생긴다는 것은 어찌보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변화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죠. 인문학의 시작이 성찰이라면 강의의 반쯤은 성공을 거두는 셈입니다.”

- 강의하는 데 다른 어려움은 없습니까.

“강의 대부분이 자치단체와 기업, 종교단체 등에서 후원을 받는데, 예산이 빠듯하죠. 교재비나 밥값이 없으니까요. 문학을 얘기하려면 함께 책을 읽어야 하는데 예산에는 1년에 한 권 정도만 책정돼 있어요. 그래서 인터넷 카페에서 ‘책 나누는 사람들’이란 모임을 만들었지요. 처음엔 저와 함께 3명이 시작했는데 지금은 140여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어디 인문학 강좌에 무슨 책이 몇 권 필요하다고 공지를 올리면 형편되는 대로 1~2권씩 사서 보내주는 식입니다.”

‘책 나누는 사람들’은 그동안 3000여권의 인문학 관련 책들을 나눠왔다. 생색내기로 동참하겠다는 정치인이나 기업인, 종교인들의 참여는 거절한다.

- 강의를 하면서 고마운 분들은요.

“제가 야학 학생일 때 교사였던 분이 계세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인 박한용 선생님이죠. 노숙인 인문학 강좌에서 역사를 맡을 교수가 없어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느라 개인 생활이 없는 분인데도 생떼를 썼어요. 거절하지 못하고 오셔서 20여년 만에 만나 동료 교수가 됐습니다. 공지영, 김형경 작가도 달려와 특강을 해줍니다.”

- 노숙인들과 강의실 밖에서도 친분을 쌓는다면서요.

“강의 끝난 후 밥자리, 술자리 욕심에 출석하는 분들도 있어요. 두 시간 강의비가 10만~15만원 정도인데 20여명과 식사하고 나면 모자랄 때가 더 많죠. 한번씩 술도 마셔야 하고요. 서로 속마음을 트고 신뢰를 쌓지 않으면 진정한 강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선생님들이 좋아하세요. 성 프란시스 대학 초창기에는 1주일에 하루 강의가 있었지만 3일을 나갔죠.”

- 서울역에서 유명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이 아니라 서울역으로 갑니다.(웃음) 강의를 거쳐간 ‘선생님들’이 별 탈 없이 지내는지 걱정도 되고, 그들의 삶에서 떠날 수가 없어요. 매년 300~400여명이 거리에서 죽음을 맞아요. 서울역에서 열리는 추모제에도 빠지지 않죠. 억울한 사연이 있으면 나서서 풀어주기도 해야 하고요. 덕분에 ‘왈왈구찌’(노숙인 가운데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은어)한테도 환영받습니다.”

- 술을 먹고 욕을 퍼붓거나 2만~3만원 꿔달라고 전화해오는 경우도 많다면서요.

“제 사정이 좋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바로 그분들이죠. 나이 사오십 넘은 사람들이 그 돈 빌려달라고 전화할 때 심정은 오죽하겠어요. 5만원, 10만원 빌려갔다가 소식이 아예 끊기기도 합니다. 그러다 몇 년 만에 다시 연락해 갚는 분들도 있어요. 노숙인들은 돈과 집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무엇보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이들입니다. 그 심정을 뼛속까지 알기에 피할 수가 없어요.”

- 본인도 개인회생을 신청한 상태라고 하던데요.

“법원에 신청한 상태입니다. 지난 몇년간 한국판 ‘빅이슈’ 창간을 위해 뛰어다녔어요. 영국에서 성공을 거둔 잡지인데 노숙인들에게 판매권을 주고, 제작비용을 뺀 수익도 노숙인들이 갖도록 한 공익성 출판물이죠. 그런데 선한 의도가 꼭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본력도 없이 몸부림치는 동안 빚만 수천만원이 됐어요. 다행히 발행하겠다는 단체가 있어 관련 도메인까지 모두 넘겼습니다. 꼭 제가 발행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곧 창간호가 나올 거예요.”

- 왜 이렇게 힘들게 사나요.

“바보니까요. 바보는 쉬운 일 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사람 같아요. 이런 일들을 하면서 고통을 느낄 때가 사실 많아요. 하지만 내가 더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분들에게 강의하고 있으면 감동적인 영화를 본 것도 아닌데 함께 왁자지껄 웃고 가슴 뭉클해집니다. 저는 알량한 지식을 나누지만, 그분들은 저에게 삶을 가르쳐줘요.”

최 교수는 어려서부터 힘겹게 살아왔다. 신발공장, 대중목욕탕, 건설현장 등을 전전하며 밤엔 야학에서 공부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외국어대 중국어과에 입학했지만 학생운동과 야학교사 일에 빠져 졸업을 하지 못했다. 대학 졸업장이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때문이다.

- 작가가 꿈이었나요.

“아니요. 외환위기 때 생활이 많이 어려웠어요. 그때 살고 있던 집의 방이 너무 좁아 어머니와 아내, 첫 아이가 눕고 나면 앉을 데도 없었죠. 8개월 동안 밤이면 PC방에서 살았는데, 게임도 할 줄 모르고 해서 시나리오를 썼어요.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한시간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제 과거를 얘기합니다.”

- 가족이 힘들어하겠습니다.

“어머니는 ‘돈도 못 버는 주제에 웬 헛수고냐’고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셨죠. 그런데 어느 날 노숙인들과 등산 약속이 있어 나가는데 고쟁이에서 2만원을 꺼내주셨어요. 함께 막걸리 사 마시라고요. 무박 1일로 졸업여행을 갈 때는 아내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김밥 50줄을 싸주셨죠.”

- 낮은 곳에서 일기 시작한 인문학의 참 가치는 무엇일까요.

“특히 노숙인 인문학은 사람의 변화에 대한 신념을 길러주는 배움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변화의 신념도 함께요. 인간의 참다운 행복에 대해 같이 생각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겠죠. 사실 우리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공부라고 봅니다.”

소외층을 위한 인문학의 뿌리는

노숙인 인문학을 비롯해 소외층을 위한 인문학의 뿌리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원조 격은 미국의 ‘클레멘트 코스’다. 1995년 뉴욕 인근의 노숙인, 마약중독자 등을 대상으로 윤리·철학·예술·역사·논리학 등의 강좌가 열렸다. 클레멘트 코스를 이수한 노숙인들은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인문학을 통해 무기력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을 살아갔다.

클레멘트 코스의 설립자는 얼 쇼리스. 언론인, 소설가로 활동하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문학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얼 쇼리스는 4년 전 한국의 노숙인 인문학 첫 졸업생들이 나왔을 때 그들을 축하하기 위해 암 투병 중에도 방한했다.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는 노숙인의 자활을 돕는 데 관심을 갖고 있던 임영인 신부가 시작했다. ‘가장 아름답고 작은 대학’이란 이름으로 2005년 9월 성 프란시스 대학이 생기고 의미있는 첫 학기가 열렸다. 1년 과정으로 1학기는 철학·예술사·글쓰기, 2학기는 문학·역사·글쓰기를 공부했다.

성 프란시스 대학의 출발에 힘입어 이후 경기광역인문학, 관악인문대학 등이 생겨나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시도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경희대는 실천인문학센터를 설립했다. 소외계층의 인문학 강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최준영 교수는 최근 펴낸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자연과 인문)를 통해 강의실에서 만난 이들과의 생생한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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