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맞은 잎 봄꽃보다 더 붉은 금오산, 사랑읽음

장거리 연애를 하는 우리는 대략 중간지점인 구미에서 종종 만나곤 한다. 이 작은 도시에 금오산(金烏山)이라는 좋은 데이트장소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금오산의 이름처럼 우리에게 있어서 이 산은 견우와 직녀에 나오는 까마귀 징검다리인 셈이다. 구미시외버스터미널에서 눈물겨운 상봉을 하고는 택시를 타고 금오산으로 향했다.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12번 시내버스를 타면 금오산에 갈 수 있지만 배차간격이 한 시간이라서 택시를 택하게 된다. 지난번에 금오산에 갈 때는 택시비를 절약하고자 버스시간을 대충 맞춰서 12번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영광스러운 기분까지 들었었다.

금오지의 산책로.

금오지의 산책로.

금오지에 비친 금오산.

금오지에 비친 금오산.

금오산으로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구미의 아담한 정경에서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서울과 대조되는 한산한 도로, 공단으로 항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 낮은 건물들과 점심밥을 준비하는 밥집…….

매번 금오산 입구 못 미친 곳에 위치한 금오지(金烏池)를 여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금오지 근처에 내렸다. 평일이라서 한산했을까, 유난히 고요한 수면에는 커다란 금오산이 통째로 들어있다. 수면 속의 금오산의 웅장함 때문인지 호수 위의 오리배 무리가 오늘은 한 구석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잔잔히 넘실거린다. 이렇게 금오지를 건너서 작은 등산로로 입산을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가파른 이 길은 칼다봉 능선을 지나 정상으로도 향할 수 있는 길이다. 정복감과 목표의식에서 등산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계획적인 등산을 좋아하지 않고, 딱히 정상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그저 산을 오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지나간 시간들뿐만 아니라 현재의 근심과 걱정을 산 밑에 내려놓고 오르는 기분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구미의 금오산을 오면 서울을 떠나 또 산을 오르는 것이니 그 기분이 배가될 수밖에 없다.

산중턱에서 찍은 금오산 속.

산중턱에서 찍은 금오산 속.

산중턱에서.

산중턱에서.

열심히 오르다보니 대화도 적어져 젊은 두 남녀의 숨소리만 거칠게 들리는데 어디서 딱따구리 소리가 난다. 금오산이라는 이름은 옛날 옛적 승려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지었다던데, 여기서 그 전설속의 황금빛 까마귀는 못 보았지만 이렇게 딱따구리를 만나니 반가웠다. 무슨 일인지 나무를 열심히 쪼고 있었는데 방해가 될까봐 반가움을 뒤로 한 채 가뿐숨을 고르고 조용히 지나간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새 금오지가 조그맣게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매번 산을 오를 때 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열심히 올라와놓고는 늘 ‘내가 언제 이만큼 올라왔지?’하며 놀란다. 과연 소(小)걸음이 무섭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칼다봉 오르기 직전 코스에서 내려다본 모습.

칼다봉 오르기 직전 코스에서 내려다본 모습.

칼다봉을 오르며 보이는 풍경.

칼다봉을 오르며 보이는 풍경.

山行
- 杜牧
遠上寒山石徑斜 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風林晩 霜葉紅於二月化

산행
멀리 가을 산 위로 돌길이 비껴 있고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이네.
단풍든 숲의 저녁경치가 좋아 수레를 멈췄더니
서리 맞은 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

예쁘게 물든 단풍.

예쁘게 물든 단풍.

당시(唐詩)가 한수 떠오르는 걸 보니 가을은 가을이다. 우리는 그렇게 칼다봉을 앞에 두고 가을 감상에 젖어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내려오는 길에는 다람쥐 선생님을 따라 대혜폭포로 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여름날에 이곳에 왔을 때는 물이 참 많았다. 그때 이 폭포에서 만난 물들은 신나게 세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도 정신없이 세상 속에서 여름을 보냈고, 어느새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의 대혜폭포는 거친 물살로 주위의 산비둘기들을 쫓아내지도 않고, 가을볕에 붉게 데인 단풍 속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폭포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 산을 걸어온 작은 걸음들만큼 올 한해도 꾸준히 걸어왔는지 생각해본다. 숨을 고르고 돌아 봤을 때 ‘아 정말 내가 이만큼이나 왔구나.’ 하는 기분이 들 수 있을까.

산 입구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는 케이블카 탑승장이 있다. 금오산의 케이블카는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 최근 북한산, 지리산 등의 국립공원에도 케이블카가 생기는 것 때문에 말들이 많다. 관광객(觀光客)도 등산객(登山客)도 산을 찾은 객(客)일 뿐인데, 손님이 요란하게 공사를 해가며 유리창너머로 산을 감상하려고 하는 것은 주인에게 커다란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금오산의 메타세콰이어 길에서 우리는 그렇게 케이블카와 환경보존에 대한 이야기, 케이블에 매달린 케이블카가 나무에 열린 홍시의 색깔 같더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건 그렇고 저녁밥은 뭐먹을지, 역시 막걸리가 빠져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때 이미 홍시 색보다도 곱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대혜폭포.

대혜폭포.

산을 다 내려와서 저녁밥을 배부르게 먹고 터미널로 가는 길은 늘 아쉽다. 또 남자친구와 나는 서로 각자의 일로 바쁘게 한주를 보내고 주말이 되서야 만나겠지. 하지만 일년에 딱 한번, 그것도 무더운 칠월칠석에 만나는 견우와 직녀보다는 낫지 않는가 하는 심심한 위로를 스스로에게 해본다. 그리고 새삼 구미의 금오산에게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금오산에서의 예쁜 풍경을 마음 깊숙이 담고, 금오지에서의 오랜만에 평온한 기분도 오래오래 기억해야겠다. 소(小)걸음으로 걷다보면 소소한 기쁨들이 곳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여민희/인터넷 경향신문 대학생 기자 (웹場 baram.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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