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부문 이강진 - 위기의 시대에 대한 두 가지 처방

송경동과 장석원 시의 정치적 가능성

1. 가망 없는 반란, 또는 장님-되기

최초의 반란은 난감하다. 아버지를 죽인 형제들은 누가 새롭게 왕좌를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또다시 살육전을 벌인다. 하지만 개중에 눈치 빠른 이들은 재빨리 부친의 자리를 쪼개어 차지하고, 반역의 역사를 거듭하며 아버지는 점점 불어난다. 이로써 세계는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반복을 중지하는 데에 성공한다. 더 이상 아버지 아닌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완벽한 조화가 완성될 무렵에, 우리는 비로소 태어났다. 아버지로 가득한 세계에서 이제 친부살해의 역전은 불가능하다. 누구든 반역을 꿈꾸려면 세계 전체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죄책감 끝에 제 눈을 파낸 오이디푸스의 고통은 더는 비극이 아니게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는 오로지 절규할 수 없거나, 절규하지 않거나의 양자택일 뿐이다. 그것은 모든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친부살해의 시도를 감행하거나, 또는 아버지들의 명령을 내적으로 자동화하여 장님이 되는 일이다. 세계는 전자에게 처벌을, 후자에게 풍요를 약속하고, 우리는 대개 제 눈을 찌르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은 한국 시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제까지 우리 시의 근간을 이루어 온 서정의 본질이 세계에 대한 동일시의 미학인 이상, 오늘날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 된 지 오래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과의 일치를 추구한단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눈뜬 이후로 모든 세계가 이미 살해의 대상이며 적대의 공간이 되었을진대, 누구와의 화합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상적인 국가에 그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눈이 보고 느끼는 세계란 언제나 권력의 상징계가 금기시해온 공간들이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실재하는 자리인 동시에, 바라보려는 시도 그 자체로 처벌의 대상이 된다. 오늘날 시인으로서의 주체가 되는 일이란, 자기 존재의 불가능성을 끊임없이 거절하는 영원한 반역의 의무를 짊어지는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최근 몇 해간 계속된 ‘시와 정치’ 논의는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응방향을 모색하려는 고민이었다. 몇몇 논자들은 ‘문학의 위기’를 정치적 의무로부터의 자유에서 비롯된 세대적 해체(고진)로 진단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시의 언어야말로 세계의 위계를 다시 질서화하는 새로운 정치라는 주장(진은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장들에서 하나의 공통된 모순을 발견한다. 어쩌면 이들은 위기의 근본적인 지점을 애써 우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지점이란, 애당초 ‘시의 위기’가 전적으로 ‘시인의 위기’로 읽혀야 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시의 위기’는 완결된 텍스트 소비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급변하는 현실을 어떻게 담지할 것인가에 대한 창작태도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대가 직면한 위기의 연장으로 나타난 현상일 뿐, 문학 장르로서의 시 자체의 위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세계의 위협은 시 쓰기 대신에 그것을 떠맡을 시인의 시선 자체를 겨냥하고, 시인은 실재를 보려는 욕망을 품는 동시에 그로 인해 거세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그 결과 상징계를 유지하려는 아버지들의 힘은 “나의 선택은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장석원,「동화물리학」)는 체념을 자동화하고, 시인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언어를 포기하거나, 혹은 ‘매트릭스’의 거짓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기실 시인에게 있어 지난 역사의 시간들은 황금기가 아닐 수 없었다. 역사는 매 순간마다 잔혹한 아버지의 모습을 내세우고 있었으며, 시는 그것에 대한 저항을 자신의 선명한 존재이유로 삼아왔다. 신형철이 이미 지적했듯이, “예컨대 황지우의 시가 미학적인 동시에 ‘정치적’일 수 있었던 데에는 권력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의 억압이라는 외적 상황이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억압의 존재는 잔혹했을지 모르나, 동시에 시인에게 명확한 적대의 대상을 선사해왔다. 시의 언어는 그와 맞서 싸움으로써, 미적 자율성을 향한 자신의 욕망과 함께 해방에 대한 세계의 욕망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지난날 ‘시’와 ‘정치’가 확고부동한 동반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시인이 가진 사회적 분노가 고스란히 정치적 정념의 형태로 폭발할 수 있었던 역사적 맥락에 있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 진은영, 「70년대産」 부분

과거에 시인은 이중적 역할을 수행했다. 우선 그들은 기존 국가체제가 승인할 수 없는 혁명의 언어를 다루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적’ 국가에 대한 독자들의 열망을 상상적인 층위에서 담보하는 성격을 띠었다. 때문에 시는 지난 역사 속에서 혁명의 상상적 대리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버지가 만연한 동시에 사라져버린 시대, 시인인 “우리”에게는 더 이상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최근 우리 시의 빼놓을 수 없는 수식어가 된 ‘파편화’는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파편화된 아버지들 자체이자, 쏘아야 할 ‘적’이 사라진 “비극”으로 인해 부서져버린 정치적 정념의 거울상이었다. 스스로의 종언을 선언한 아버지들은 이제 무턱대고 금기의 채찍을 휘두르지 않는다. 그들은 무엇이 효과적으로 아들의 분노를 감압할 수 있는가를 오랜 반역의 역사를 통해 터득했다. 이제 세계는 자유를 최대의 가치로 내세우게 되었으며, 자연히 시인의 언어는 폭력적 금기에 의한 역사적 긴장의 획득을 더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시와 정치’ 논의란 이러한 억압의 상실에 맞서서, 금기에 기대지 않고도 획득할 수 있는 새로운 ‘긴장’을 발견해내려는 몸부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이내 공허한 울림으로 흐려지고 말았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세계가 오히려 보이지 않는 폭력을 수단으로 하는 더 큰 억압 위에 세워진 까닭이었다. 위 시의 화법을 빌리자면, “누구나 여기에 총을 겨누지만/ 우리 중에/ 아무도 그걸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비극이다”라고 말해야 할 세상인 것이다. 전혀 다른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시와 정치’ 논의가 제시한 대안적 작업들이 과거의 노동시와 동일한 모순에 빠지고 말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노동시의 실패가 투쟁에 대한 강박으로 인한 이념적 함몰에서 비롯되었다면, ‘시와 정치’ 논의는 위기의 시대를 전위성에 기대 극복하려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투쟁의 강박이 “말은 마른 생선 거죽처럼 입천장에 달라붙어 나오지 않”(송경동,「생산자」)는 실패를 낳았듯이, ‘새로움’에 대한 무비판적인 기대는 은폐된 폭력들을 보지 못한 채 “나는 어쩌라고 약한가”(장석원,「젊고, 어리석고, 가난했던」)라는 음울한 비관을 낳을 뿐이었다. 그렇게 패배냐 굴종이냐의 갈림길만을 남겨둔 현실은 강박의 연쇄 속에 모든 가능성들을 구속한 채, ‘눈뜬 자들’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법률을 더욱 확고히 해온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제 “내가 들어온 眞景山水”(장석원, 「어제」) 대신, 빼앗긴 시선들에 대한 기억을 은밀하게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배제된 것들에게로 회귀하려는 모험인 동시에, 미학적 전위성의 달콤한 함정에 빠지지 않은 진정한 ‘새로움’을 모색하려는 작업이다. “비극”의 무대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권위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는 당연시된 전제, 세계를 바라보는 자신의 “眞景”마저도 의심함으로써 참된 실재에 닿으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이제 시의 재현(representation)이란 더 이상 세계를 있는 그대로 노래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꼬막 껍질 하나에 옴싹 들어갈/ 짜디짠 말 한마디 갖고 싶다”(송경동,「시詩」)는, 잃어버릴 것을 강요받았던 어떤 정념의 새삼스러운 표현이다.

2. 강박에서 벗어나기: 강철의 투쟁에서 생의 투쟁으로

오랫동안 ‘시이면서도 시가 아닌’ 것들이 있었다. 우리가 ‘노동시’ ‘선동시’ ‘이념시’ 등으로 불러왔던 시들이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많은 노동시들이 시인의 이념을 너무나 강렬하게 드러낸 나머지, 미적인 형상화에 실패하고 마는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결국 이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줄곧 평행선을 달려, 노동시인들은 “노동을 모르고 시를 쓰고/ 노동도 모르고 먹고 싸는 부류가 너무 많아/ 노동하며 시 쓰는 평범한 시인은/ 시집 한 권으로 평론가 교수를/ 감동시키고 있구나// 노동하며 시를 쓴다는 이유 하나로”(조혜영,「편견(노동시)」)라고 냉소하고, 반대편에서는 “직접적인 이념성을 드러내는 행위는 언어에 회의하는 긴장의 끈이 풀어지게 마련이다”(신형철)라며 비판을 가해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쯤에서 한 가지 의심을 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 끊이지 않고 이어질 듯한 논쟁이야말로 노동시가 진정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를 왜곡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인은 분명 상징계 너머의 실재를 목도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상징체계를 전면적으로 거부해야만 참된 시인이라는 강박이 될 수는 없다. 노동시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노동시가 바라보는 실재는 노동해방을 위한 이념적 투쟁성도, 노동운동을 위한 각성을 촉구하는 선동성도 아니다. 시인이 마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망각한 채 이념과 미학의 대립에만 열을 올리는 일이야말로, 노동시가 품고 있는 생명력을 꺾어버리는 일인 셈이다.

송경동은 ‘혁명’과 ‘시’를 동시에 걸머지려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이러한 오류에 맞서는 시인이다. 오늘날 세계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본에 대항하는 것은 시작부터 패배를 예정한 승산 없는 싸움일 수밖에 없다. 이제까지 노동시의 주체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허무주의 속에, 싸움 자체를 강박적으로 소비하는 형태로 변질되어왔다. 그러나 송경동의 시는 이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강철의 투쟁’을 오히려 ‘생의 투쟁’으로 내려앉게 만든다. 그의 시는 언제나 노동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으되, 그것이 만들어내는 모순의 구조들을 억지로 들추어내지 않는다. 매번 투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지만, 그곳에서 피 흘리며 싸워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지도 않는다. 대신에 송경동은 다만 노동자의 삶 자체로 시선을 돌려 그 시시콜콜한 풍경들에 집중한다. 마치 세계에 대한 패배를 시인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그러나 강박의 연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되기의 준비과정인 동시에, 오히려 가장 강력한 정치적 목소리가 된다. ‘생의 투쟁’을 담담하게 읽어나가는 이 목소리 안에서, 노동자는 “쇠살만큼/ 착하고 여린 것도 없다/(…)// 억지로 미니까 후려친다/ 강제로 자르니 무너진다”(「쇠살」)는 인간적인 자리를 회복한다.

어느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부분

오늘날 노동자들을 삶으로부터 억지로 밀어내고 잘라내려는 모든 시도들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폭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싸워야만 한다는 강박, 인간이 사라지고 이념적 투쟁만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노동운동의 현실이야말로 그들을 위협하는 더 큰 폭력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에 송경동은 이것들이 얼마나 “사소한 물음들”에 불과한가를 되묻는다. “맑스주의자” “조직 결성” “대학” “출신”과 같은 텅 빈 기표의 “열정”들에 기대고 있는 허상이란 얼마나 우스운가! 자본이 인간을 도구로 전용하는 것이 견딜 수 없는 폭력인 만큼, 공허한 투쟁이 인간을 “조직”의 부속쯤으로 여기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의 폭력이 된다. 때문에 시인은 자신을 향한 저 “사소한 물음들”에게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답하는 것이다.

그런데 송경동의 시세계가 기존 노동운동이나 노동시에 대한 의문을 던질 뿐이라면, 우리는 그가 그리는 일상성이 단지 기존 노동시 담론에 대한 반정립으로서의 의미에 불과하지 않으냐는 비판을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송경동의 시는 단순한 반성으로부터 분명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진정한 노동운동은 노동자 권력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노동자들 모두가 ‘노동자’라는 규정성을 벗어나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를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그가 “오래 묵은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봐도/ 진보단체 싸이트를 이리저리 뒤져봐도/ 나는 왠지 무언가 크게 잃어버린 느낌이다”(「혁명」)라고 느끼는 이유는, 마땅히 노동혁명의 ‘사라지는 매개자’가 되어야 할 “사소한 물음들”이 오히려 자본주의의 아비들보다 더 강하게 군림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송경동이 그리는 주체들은 노동자이자 노동자가 아니며, 이들이야말로 노동운동이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인 ‘한 인간으로서의 노동자’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의 삶을 통해, 노동자 또한 얼마든지 평범한 욕망을 품는 ‘인간’임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오늘은 마누라와 그 짓을 한판

대판해야겠다

흐린 날 사흘에 맑은 날 한나절

일 끊긴 한 달 새

지지고 뽁던

사랑의 균열을 이어야겠다

(...)

어서 가자 어서 가

오늘은 마누라와 그 짓을 땀

뻘뻘 흘리며 해야겠다

지치고 어둔 마음에 볕 한 줄 들도록

사랑의 주사부터 한 대 콱

놓아야겠다

-「일 잡혀 돌아오는 맑은 날 정오」 부분

송경동의 시에서 자주 목격되는 ‘대마치’를 그리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 시는 특기할 만하다. 일을 쉬는 대마치는 노동자가 자신의 이름표로부터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시간이다. 그런데 시인은 오히려 “일 끊긴 한 달”을 겪고 마침내 “일 잡혀 돌아오는 맑은 날 정오”를 배경으로 함으로써, 자기의 주체성을 되찾으려는 노동자의 의지를 역설적으로 재현해낸다. 한순간이라도 노동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노동자는 처음으로 ‘노동하는 주체’와 ‘투쟁하는 주체’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지 않은 순수한 개인이 된다. 이 과정에서 고달픈 삶이 만들어낸 “사랑의 균열”은 일하는/일 끊긴 노동자가 아닌, 평범한 남성으로서의 화자에 의해 회복된다. 적어도 “그 짓을 한판 대판”하는 순간에는 그도 “마누라”도 자기만의 욕망을 간직하고 있는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맑은 날 정오”란 한창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생산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자신의 순수한 욕망의 충족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사랑의 행위는 자본의 폭력 속에 “지치고 어둔 마음”에 “볕 한 줄 들도록” 만드는 힘이 된다. 자동화된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일상성은, 삶으로부터 오는 아픔을 치유할 “사랑의 주사”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자본의 생산체계는 이러한 욕망들을 “간밤 갈대밭 우그러뜨리던 그짓보다 찰진”(「꿀잠」) “공사판 낮잠”으로 후퇴시키고, 다시 그 주체들을 “내 암호명은 일용공비정규직/ 노동 이외엔 어울릴 친구가 없다”(「암호명」)는 고독과, “조금은 돈이 있으면 좋겠다고”(「돈」) 꿈꾸는 환상으로 내몰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그러나 송경동이 그려낸 주체들은 이와 같은 음모에 굴하지 않고, “밥만 먹곤 못 살아/ 일만 하곤 못 살아/ 누구라도 살아 그 마음에/ 꼿꼿한 욕정 하나 없으리”(「이총각뎐」)라고 끊임없이 반문하고 있다.

“나의 모든 시도 실상은 산재시다/ 내가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모든 형태의 산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 세계에 대한 항의다”(「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라는 것만큼이나 송경동의 시를 명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목이 또 있을까? 오늘날 세계의 현실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쓸 수 없도록 만든다면, 이 “근본적인 산재에 대한 항변”이야말로 시의 본령을 회복할 운명을 짊어진다. 그렇기에 송경동은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 “내 이름을 달고 나오지만 이 시집은 나만의 것이 아님을 잘 안다”(‘시인의 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노동자의 삶과 밀착해 있음에도 끊임없이 노동운동의 호명을 거절하는 그에게 있어, ‘시의 정치’란 “양장 고운 <체 게바라 평전>”(「그해 늦은 세 번의 장마」)이 아니다. 처음부터 “생의 완성은/ 다만 저 혁명의 완수에만 있지 않”(「마산항 새벽복국」)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가 품은 해방의 기획은, 삶에 가장 가까워짐으로써 도달하게 될 ‘생의 정치’를 통해, 비로소 저 불가능성 너머에 살아 숨쉬는 것이다.

3. 부정과 사랑의 변증법: 정치성의 불가능한 무한판단

송경동이 시를 통해 강박이 되어버린 정치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면, 장석원은 ‘시와 정치’ 논의가 기대했던 ‘미학적 가능성’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평가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는데, 오래 전부터 장석원의 시를 다성성(polyphonic)의 산물로 보는 시각(권혁웅)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장광설들이 다원성이 아니라 오히려 비감한 폐허의식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는 독해(함돈균)가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의 독법이 서로 대척점에 위치하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장석원의 ‘시적인 새로움’이 모종의 전위적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동의의 지점이 장석원을 ‘시와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인으로 비추었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평가와는 달리 장석원의 시는 단순히 전위성에 기대어 작동하는 냉소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시는 철저하게 저 ‘미학적 가능성’의 공허함에 대한 반대와 극복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미학적 가능성’에 대한 기대란, 역사적 맥락에 의해 획득되었던 긴장에 대한 해묵은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과거의 시가 스스로의 역할을 지탱하기 위해 잔혹한 아버지를 필요로 했듯이, ‘시와 정치’가 옹호해왔던 ‘가능성’들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이미 사라진 억압 구조를 다시금 요청해야만 했던 까닭이다.

~p → ~q = p → q

부정문을 부정하면 긍정문이 된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화되는, 질적 비약이 눈부시다. 눈부신 것은 회색의 이론이 아니라, 푸르른 현실이다.

-「동방의 서점에는」 부분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이 때문에 장석원은 단순히 미학적 자율성에 기대는 것에서 벗어나, 오늘날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정치 자체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세계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폭력적인 지배, 인격적인 종속관계를 점진적으로 사물의 객관적 질서에 의한 종속관계로 대치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억압이 은폐된 자리는 고도의 합리성에 의해 채워진다.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객관의 질서는 가장 먼저 이전 역사의 폭력과 결별한다. “부정문을 부정하면 긍정문이 된다”는 합리성을 직접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이로써 각각의 주체들이 경험하는 실패와 아픔은 세계의 “부정”적인 억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무력함의 증거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이미 현실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화되는, 질적 비약”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부친에 대한 적대는 더는 그것을 극복할 수단이 못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부신 것”은 이제 눈앞의 “푸르른 현실”로 주어진다. 강제된 자유 앞에서 더 이상 “진실은 저 너머에 있지 않고 행정 서류에 기재되어 있다”(「동방의 서점에는」). 부정성이 지배하던 과거와 함께 아버지가 “틀어쥔 목의 사슬”(「나의 전부는 거짓이었다」)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주체에게 해방의 공간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과거에는 가질 수 없었던 선택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 선택지란 오로지 “복지부동과 부화뇌동 사이에서”(「현충일 현충원에서」)만이 가능할 따름인 것이다.

어머니 표정 없이 말하네

죽을 때까지 선하게 살아라

아들아 나의 아들아

고난이 널 찾아올 테지만 이겨내라

아픈 몸과 더 아픈 몸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

아름다운 남자가 되어라 나의 작은 악마야

이룰 수 없는 욕망을 버리고 포기를 배워라

이제 잠들거라 사랑하는 아들아

69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네 정맥 속의 뱀을 느낄 수 있단다

-「악마를 위하여」 부분

아버지의 은폐 이후에 태어난 장석원의 주체들은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이미 모든 불가능성을 지니고 나온다. “어머니”의 말은 세계의 질서가 주체에게 교육하려는 것들을 대변한다. 과거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을 피할 안식처로서 존재했다면, 오늘날의 “어머니”는 숨어버린 아버지의 전언을 가져와 “표정 없이 말하”는 대리자가 된다. “죽을 때까지 선하게 살아라”, “고난이 널 찾아올 테지만 이겨내라”, “아픈 몸과 더 아픈 몸을 네 몸처럼 사랑해라”는 충고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인간적인 사랑 뒤에, 세계의 질서를 보충하기 위한 질서를 품고 있는 거짓된 말들이다. 뒤틀린 현대의 윤리는 이렇듯 주체를 교정함으로써 스스로의 모순을 은폐한다. “어머니”의 말이 이어지는 부분의 시행이 일반적인 구조와 다르게 한쪽으로 비틀려있는 것은, 바로 이 이중성을 드러내기 위한 시각적 효과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의 탄생은, 푸코가 ‘미시권력’이라고 이름붙인 질서, 모든 신체가 권력의 세부적인 장악에 의해 교정되어야 하는 이 ‘신체-길들이기’를 위협하는 사건으로 발생한다. 아들들이 저마다 품고 나온 “욕망”은 세계를 위협할 원죄, “정맥 속의 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어머니”의 얼굴을 한 아버지의 힘은 방금 태어난 “작은 악마”에게 “69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질서를 거스르지 않을 “아름다운 남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들”들은 이제 “욕망을 버리고 포기를 배워라”라는 정언명령과, 욕망이란 언제나 “이룰 수 없는 욕망”일 뿐이라는 기만을 배우며 자라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혁명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revolution is-not possible)는 부정판단을 각자의 가슴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re-volution, 다시 회전하면, 그대와 내가 벌인 사랑의 육박전(…)

지나간 모든 추억에 선전포고를 했던 그대 그리고 나. 그대와 나눈 혁명적 사랑, 그대의 자세는 조금 난해했을 뿐이었는데, 하얗게 밤을 새워, 항아리가 바닥날 때까지, 지나온 길 위의 날들이 지나치게 혐오스러워졌던 아침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리라. 샘물 같은 그대의 눈물 나의 허무를 적셨다, 죽였다, 완벽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단절이었다. 그대 위에서 한없이 출렁일 때, 풍랑에 휩쓸린 신밧드, 펼쳐라 펼쳐라 너의 모험을. 그날 일엽편주에 몸 싣고, 신대륙을 향해 출항했던 동지들 혹은 애인 구함.

-「지난해 ○○여관 때로 △△여관에서」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이란 결국 합리성이 만들어낸 윤리의 허상에 사로잡히는 것 외에는 없는 것인가? 여기에서 장석원은 가능하지 않게 되어버린 혁명(revolution)을 “re-volution”으로, “그대와 내가 벌인 사랑의 육박전”으로 뒤집는 행위를 통해 합리성의 세계 바깥으로 도약한다. 가능성을 잃어버린 혁명이란 어디까지나 강박에 사로잡힌 투쟁, 즉 “지나간 모든 추억”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변화의 실마리는 “길 위의 날들”의 과거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것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멸한 혁명의 자리에는 “혁명적 사랑”이 채워지고, 교정된 신체에 예정된 고독은 “하얗게 밤을 새워, 항아리가 바닥날 때까지” 계속되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극복된다. 이렇게 사랑은 강요된 자유 속에 말라가던 주체들의 “허무를 적”심으로써, 혁명의 ‘가능하지 않음’이라는 부정판단으로부터 “완벽한 단절”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마치 모험을 떠나는 “신밧드”가 “신대륙을 향해 출항했던” 힘찬 뒷모습처럼, 이제 주체는 “어서 집으로 가자, 음모에 휘말리기 전에, 잠에 빠지기 전에”(「동화물리학」)라는 주체성을 통해 세계의 음모를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否定의 정신이다─Hegel.”(「태양의 연대기」)는 이 ‘부정변증법’을 통해, 이들은 부정판단의 음울한 비관으로부터 벗어나 무한판단을 통한 가능성의 장으로 뛰어오른다. 물론 이 때 중요한 것은, “다시 회전하”는 도약이란 주체가 남아있는 모든 잔여를 쏟아낼 것을 각오한 이후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마치 “모험”이 “풍랑”이라는 시련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듯이, 장석원이 이야기하는 “혁명적 사랑”의 방식은 종전의 “난해했”던 부정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변증법적 수용 없이는 시도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지금부터는 불가능한 것이야말로 혁명(revolution is im-possible)인 셈이다. 아버지들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수많은 실재들은, 이제 이 칸트적 전회로부터 새로운 혁명의 가능성을 획득한다. 현실은 시인에게 “엘리베이터는 로켓이 될 수 없다 자체 추진력이 없다”(「더 많은 계획」)고 소리치지만, 지금 장석원의 “로켓”은 오히려 “추진력이 없”는 자신을 통해 우주로 향하는 “모험”을 시작하고 있다.

4. 불가능의 시대를 살아가기

진은영이 던진 ‘시인의 고뇌’ 이후로, 우리 시에는 미학적으로 급진적이면 자연스럽게 정치적이게 되리라는 낙관론과 그에 대한 비판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왔다. 그러나 양자는 공통적으로 ‘결국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시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가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가능한가? 누군가의 말처럼 “옛날에 살인자는 용감한 병정들로 살인의 장소를 지키게 하지 않았다”(진은영, 「오래된 이야기」)와 같은 시는 직접적인가? 지금까지 이러한 판단을 긍정했던 비평가들은 대개 ‘시의 정치’가 갖는 예외적인 속성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태도를 경계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을 강조해본다 한들 ‘시의 정치’는 세계에 대해 예외적일 수밖에 없다. 설령 미학적인 성취를 포기해가면서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을 해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하나의 언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 시가 해야 할 일이란, 오히려 그것으로 말미암은 스스로의 ‘위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시가 직접적으로 정치적일 가능성이란 시와 시인이 현실로부터 유리된 스스로의 위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그 예외적인 자리로부터, 시는 현실의 정치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가능성들에 한 발 먼저 도달할 수 있다.

송경동의 ‘삶’과 장석원의 ‘변증법’이 말과 삶, 말과 말을 아우르는 힘이었듯이, 마찬가지로 시와 시인은 독자들이 미래에 대한 상상력과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 오랜 역사 속에서도 시가 현실의 정치적 결정에 물리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바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러한 예외성을 ‘위기’ 또는 ‘종언’이라 불러야 한다면, 시는 이미 탄생의 순간으로부터 줄곧 위기의 중심에 놓여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시는 자신이 짊어진 상상의 공간에 사람들을 개입시킴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또는 ‘불가능한’ 실재의 자리 위에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것이 된다. 시의 위력을 깨달은 지배자에게 추방당한 그날부터, 이미 시인의 본령은 줄곧 세계가 판단을 중지시킨 것들을 다시금 꿈꾸게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권력의 상징계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 삶의 모습들, 그리고 내재화된 억압에 의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교육받았던 모든 가능성들. 어쩌면 시가 가진 필연적인 예외성이란, 오히려 세계의 이러한 예외적인 자리들로 회귀할 운명을 예견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고백으로서, 영원히 저 꿈의 방해자들과 싸워야만 할 운명을 지고 태어난 셈이다.

오늘날 세계는 주체에게 가망 없는 반란, 또는 장님-되기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강요한다. 그러나 시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상상의 힘으로부터, 우리는 위기의 시대에 대한 두 가지 처방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삶의 영역에 내려앉아 그것에 눈뜨는 송경동의 ‘생의 투쟁’과, 가망 없음의 절망을 불가능함의 실재로 되살려내는 장석원의 칸트적 무한판단. 이미 시는 우리를 대신하여 미래의 땅에 한 발 먼저 도달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예외적인’ 처방을 통해 현실을 집도하는 것은, 메스를 쥘 손을 가진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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