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제의 모진 박해를 견뎌낸 한글, 내게 모국어는 저항 그 자체였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몽골 고대 시가에 “혼자의 힘으로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의 나무로 불이 될 수 없네. 여럿이 모여야 사람이 되고 여러 나무가 불이 된다네”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인간이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이 숙명이라면 세상의 존재와 언어의 존재는 동일 사건이 됩니다. 그것이 겪는 수난 이야기를 아직 마치지 않으셨는데요?

고은=우리는 조상들의 삶을 통해서 고대 제국주의에의 종속 체험을 가지고 있어. 그러다가 우리 세대부터 근대 제국주의의 예속 체험이 있게 되었어. 이것은 오늘날의 고전자본주의가 끝난 금융과 독점이라는 신식민지 체제 이전의 단계였어. 이른바 나의 정체성이란 이 같은 가혹한 체험의 대가이기도 하겠어. 주체란 과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지. 주체란 과정의 단련이니까.

김형수=역사는 주체도 성숙시키고 제국주의도 진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림|임옥상 화백

그림|임옥상 화백

고은=미국 국기 성조기 좀 봐. 주(州)가 하나씩 생겨날 때마다 별이 한 개 더해왔어. 카우보이가 총 쏘아대며 서쪽으로 내달리다가 태평양을 만나게 되자 한동안 주춤하다가 그 태평양 위의 하와이 왕국도 삼켜버리고 나서 별 하나를 또 그려 넣었지. 알래스카도 러시아 차르의 내탕금이 궁하게 되자 막장 떨이 값으로 사들여 별 하나를 추가했겠지. 그런데 이런 별 추가의 국기는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영토라는 전근대적 자본이 아닌, 상품 차원의 독점 자본도 넘어선 것을 추구하는 농염한 금융 제국주의를 부랴부랴 작동시키지. 이제 자국 국기 안에 별을 그려 넣기보다 다른 나라 국기 안에 자신들의 별을 그려 넣고 있는 셈이지. 금융이란 자본주의의 완숙 상태이지. 마치 장년층의 농밀한 섹스 같은 것이야. 진하기 짝이 없어.

김형수=추상적인 개념어를 그렇게 야하게 성격화시키다니!

고은=이런 판까지는 레닌쯤이 짐작했으나 19세기 마르크스조차도 자신의 시대상황에서 아주 멀리 보지 않았던 셈이지.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사무라이의 맹목적인 무단성(武斷性)만으로 된 것이 아닌 사실에 주목해야 하네. 우리 모두 다 아는 바지만 식민지 초기의 그 육군대장 하세가와(長谷川)의 헌병경찰제는 차라리 겉이고 그 속은 진작부터 3·1운동 이후의 문화정치라는 교활한 통치방식의 안쪽을 병행하고 있었어.

김형수=김구 선생이 해방 후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를 원한다고 말한 것도 일제의 문화정치를 지켜본 때문일까요?

고은=백범 김구가 상하이의 일본인 풍경을 통해서 감탄한 바가 있지. 저들이 남의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서 보초 하나를 서도 저토록 철저하게 서는 것에 대해서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맥 놓은 불성실을 개탄했지. 사실인즉 식민지 시대에는 한갓 일본인 중학교 교원이 백두산 일대의 식물 분포에 눈 떠 해마다 건너와서 면밀히 조사한 나머지 식물도감을 펴냈어. 산악 국가이고 산악신앙이 깊이 내면화된 조선의 명산 꼭대기마다 쇠말뚝을 박아 조선 산천의 기운을 다 죽이는 짓거리나 독립운동가나 전사들을 체포 고문하는 짓거리, 저 북간도 일대와 호남지방에 대한 삼광(三光) 작전으로 인명과 주거시설 따위를 다 불태워버린 초토화만이 아니었네.

김형수=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미를 평가하면서 민간 수예품에 주목하는 글도 참 대단합니다. 그 시절에 전라도 장터들을 섭렵하는 기행문을 남겼더라고요.

고은=조선의 인문·사회 각 분야를 비롯한 조선 반도 일체에 대한 근대적인 인식 체험을 심화시킴으로써 그야말로 전천후적이며 전방위적인 연구 사업을 진행했어. 한국의 도깨비까지 연구하고 미신과 무속 분야도 그때까지의 한국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수준으로 전공했지. 그런 토대 위에서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을 끌로 파내어 왜곡하기에 이른 것 아닌가. 그래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조작되지. 그러니까 식민지는 식민지 과학을 통해서 완성한 셈이지.

김형수=맞아요. 호찌민은 베트남이 프랑스나 미국보다 중국이나 일본에게 점령당하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고 보았습니다. 서양인에게는 생물학적 반응에 의해서라도 정체성의 갈등을 겪지만 같은 동양인에게 문화를 해체당하면 꼼짝없이 동화된다고 보았던 거죠.

고은=식민 통치란 자국의 지배력보다 몇 배 강력한 강제와 통제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저 고려 후기 몽골의 복속체제 120년 동안 받은 시련에도 견줄 수 없는 혹독한 것이었어. 더구나 일본 문화에 대해서 한국 문화가 얕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일본의 그것에 대한 전통적인 우위를 지속해 온 터라면 이에 대한 위협 제거를 위한 가학성 탄압은 실로 가공한 것이 되고 말지.

김형수=칭기즈칸이 타인의 문화를 존중한 사실은 참 인상 깊습니다. 한류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도 가끔 몽골제국 시기가 언급되는데, 실제로 ‘몽골풍 고려양’이라 하여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서사가 문화적으로는 고려의 양식이 풍미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고은=원나라 연경에서는 고려문화 터득이 큰 긍지였지. 일제는 우리나라 세시풍속의 하나인 석전(石戰)놀이조차 폐지시킴으로써 삶의 적극성 따위를 철저하게 제거시키려 했어. 그래서 콩쥐팥쥐처럼 울음이나 질질 짜내는 설화 따위나 장려한 것이지. 식민지 시대 서편제가 식민지 유지층에서 아무런 제재 없는 풍류로 크게 환영받은 것이나 유행가 전반의 애조야말로 우리의 근본정서인 한과 닿아 있는 반면 고도의 식민 통치의 문화적인 장려를 받은 이면이 없지 않다네. 저 현해탄의 관부연락선의 치정자살로 세상의 이목을 모은 윤심덕의 그 처절한 노래가 그 당시의 조선 반도에 번진 것도 절망과 실의 그리고 체념 따위의 패배정서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기여했어. 아마도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전쟁 말기의 일본 군가들이 한결같이 애수와 비장한 종말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런 패배정서를 통한 최후적인 투신심리 조장이었던 것처럼 말이네.

김형수=일본산(産) 유행문화에 속하는 신파의 본질에 대해 아주 명료한 태도를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비애의 미학에 늘 연민을 두어왔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존재 자체를 울음이 되게 하는 현상이 무슨 문제를 내포하는지 깨닫습니다.

고은=이런 식민 통치의 과학적이기까지 한 강제장치 중에서 가장 치밀한 것이 언어정책이었어. 왜냐하면 언어와 문자는 주체가 상실되었을 경우 그 주체를 대행하는 서술주체가 되기 때문이겠지. 흔히 민족이론에서 민족을 정의할 때 혈통과 영토, 전통을 손꼽기도 하지만 거기에 언어가 포함되지 않으면 안되는 그 불가결성의 차원만이 아니라 바로 언어야말로 최종적인 주체 행위이기 때문이지.

김형수=<만인보>의 시가 떠오릅니다. ‘2학년 담임선생’인가요? 초등학교 교실 풍경이 그려지는데 일본인 풍으로 디자인된 선생님이 알고 보니 ‘조센진’으로 드러나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바로 이런 걸 ‘주체 현상’이라 말씀하시는 거죠?

고은=그래서 나라가 없어진다는 것은 주권의 구체적인 핵심인 군사 외교 분야나 재산권의 표면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바탕인 문화의 식민지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것의 으뜸에 언어정책이 있지. 내가 한문 서당의 재래 학동으로부터 뒤늦게 근대 학교의 생도가 된 것은 그런 언어 문자정책이 노골적으로 강화된 때문이기도 했어. 그 이전까지 한말 갑오경장 이후의 신식 교육과 식민지 초기교육의 기초 과정은 처음에는 소학교였어. 그러다가 한일합방 직후 조선 교육령에 의해서 보통학교라는 이름이 되었다가 심상(尋常)소학교로 그 이름이 바뀌었지. 그 뒤 1941년 일본의 전시체제에 의한 국민 총동원 체제에 부흥하는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이 몇 해 전 ‘초등학교’로의 복귀에 이르기까지의 기초 교육기관을 뜻해온 것이지.

김형수=학교야말로 근대 이데올로기의 거점이었으니, 식민지 교실에서 저희들의 지성이 재구성되었다고 해야겠어요. 이후 중등교육, 고등교육은요?

고은=돌이켜보자면 저 고구려의 경당과 고려 시대의 서당, 학당, 그리고 학숙(學塾)이라는 이름들의 후대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저 소크라테스의 아고라, 플라톤의 아테네 교외 숲의 아카데미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이오의 학문이야. 오늘날의 대학에 준하는 것이지. 서울대의 중심 공간을 일컫는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폴리스의 신성한 곳으로 뒷날에는 아테네 파르테논신전 일대를 말하는 것이지. 또 서울대 표징의 ‘베리타스 룩스 메아(진리는 나의 빛)’도 이런 그리스 학풍을 계승한 라틴 문화의 흔적이지.

김형수=저는 우리가 당도해야 할 ‘미지’가 누군가 이미 사용하고 간, 전혀 미지일 수 없는 곳이라는 게 늘 이상했어요.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 동경제국대학과 경성제국대학의 낱말적 분별력을 잃었는데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뒤섞여버리더라고요.

고은=속내야 어쩔갑세 그놈이 그놈이기도 했지. 식민지 언어정책 초기는 매우 타협적인 단계정책이었어. 조선어와 일본어를 기초교육으로 해 어문교육에서 둘을 다 정규 수업으로 채택했지. 내가 서너 살 때인 1936년 여름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부임하자마자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이라는 삼대 강령을 내세우지. 이때부터 일어상용과 창씨개명 등 식민지의 마지막 자존심인 언어와 성명까지 박탈하는 정책으로 나아갔어. 이에 부흥해서 그 다음날로 최남선의 일선동조론(日鮮同調論)이 총독의 내선일체에 부흥하는 뜻을 담아 발표되지. 반면 젊은 최현배가 ‘조선어법’이라는 한글 문법 교과서를 만들어 모국어의 사수를 조금도 늦추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지 않은가.

김형수=모국어에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네요.

고은=음력을 없애고 양력을 강요했는데 일본은 이집트 나일강 농업에서 시작해서 로마 그레고리오력으로 된 서양력을 그들의 명치유신 이래 차용한 것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쓰고 있었어. 우리는 이것이 일본의 것으로 알고 써야 했어. 이것에서도 서구 문명을 수용하는 우리로서는 일본이 수용한 것을 2차 중역으로 이식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지.

김형수=김수영 시인이 조선의 지성을 “일본을 필터로 삼아 빨아들인 유럽의 지성”이라고 말한 이유가 그리 복잡하지 않네요. 독일의 하이네도, 러시아의 푸시킨도 다 일본에서 들어온 탓에 혁명시인에서 연애시인으로 변질된 것 아닙니까?

고은=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의 언어문자에 대한 위상은 이를테면 같은 식민지 신세인 당시의 월남이나 인도하고도 좀 달랐어. 월남은 프랑스 식민지가 되자 그때까지 지배층이 쓰던 한자가 없어지고 월남의 한글이라 할 쭈놈 대신 프랑스 선교사가 만든 알파벳으로 쉽게 바꾸었고 인도 역시 수많은 언어의 분열 상태였으므로 영어가 무리 없이 식민지 민중 계층에까지 보급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인도가 독립된 뒤 몇 십 년이 지나서도 독립 헌법에 규정된 15년 시한을 넘어서까지 국가 공용어로 힌디어와 병행했지. 오늘날 영어화 시대에 이르러서야 인도사회는 영어와의 갈등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지.

김형수=그런 언어문제에 대해 유네스코에서는 “세계는 여러 시각이 모인 모자이크다. 언어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그 모자이크 한 조각을 잃는 것이다”라는 관점을 갖는 것 같습니다.

고은=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자신의 모국어를 쉽게 내버리지 않았어. 한글이 오랜 박해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남아서 살아날 판에 다시 내부의 적이 아닌 외부의 적 앞에 노출되었던 식민지 문자의 운명으로서도 매우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한 셈이지. 이런 의지가 바로 주시경을 계승한 조선어학회라는 국자(國字)운동이었어.

김형수=저희 또래만 해도 문학의 수난은 현실이지만 어학의 수난은 과거사로 떠밀어버리는 습성들이 있습니다. 황홀이자 환멸이요 숭고이자 공허였던 ‘말의 역사’가 처연합니다.

고은=조선총독부가 조선어 말살 정책을 가동시키는 중에도 내 어린 시절은 한 가족 단위나 촌락 단위의 일상에서는 조선어 사용이 그대로 진행되고 일본의 양력에 반대해서 음력설을 전면 금지에도 맞서 쇠었어. 그러니까 설 차례 상의 떡국조차도 독립운동에 다름 아니었네.

김형수=하, 떡국도, 항아리도, 물동이에 떨어지는 하늘도 다 독립유공자였네요.

고은=어린 시절 나는 똘이라고 부르는 냇물에 자주 갔어. 그런 냇물의 둑 밑에는 구멍들이 있는데 찬 기운이 도는 구멍은 뱀의 거처이고 따뜻한 기운이 도는 구멍에는 참게 따위가 살고 있었지. 그런데 그 냇물의 평상시 느린 흐름에는 별로 거슬러 올라가는 민물고기가 보이지 않으나 물길이 격렬하고 빠를 때에는 그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고기들이 많다는 것을 눈여겨보았어. 말하자면 자연의 생명체의 생명 행위에는 그 생명의 조건에 따라 조건에의 저항이 들어있다는 사실 말이네. 저항은 본질적인 것이지.

김형수=한 존재의 기슭에 그렇게 많은 시가 묻혀 있다니 경이롭습니다.

고은=그래서 우리 동네의 한 아이가 술주정꾼 아버지의 행패로 자주 얻어맞는 것을 보고 ‘저렇게 맞아주는 것이 효자인가’라는 회의도 생겼어. 끝내 마을 노인장들이 담뱃대를 휘저으며 그 주정뱅이를 조상 무덤에 데려다가 반나절이나 꿇어앉혀 놓고 참회를 시켰어. 뭐랄까 아무리 유가의 삼강오륜 체제가 국가의 강제윤리로 고착된 재래 촌락이라 하더라도 그 부권이라는 것에 대한 이의 제기 같은 저항이 가능했던 것처럼 외세의 강제에 대한 저항은 거의 본능적이기까지 했어. 그래서 일본인 순사 나으리가 자전거를 타고 마을에 나타나 한 바퀴 돌고 나서 이것저것 지시나 간섭을 해대고 떠나면 마을 아이들조차 ‘쪽바리 떠나간다 길을 비켜라 쪽바리 달려간다 길을 막아라’ 하고 놀려대기도 했지. 어떤 경우에는 맨땅에다 미리 자갈을 수북하게 쌓아 놓아 그가 자전거를 멈추고 투덜대며 그 자갈을 다 치우는 수고를 하게 만들기도 했어.

김형수=언젠가 “인간의 밤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낭만주의 소설과 사실주의 소설이 번갈아가면서 있어야 한다” 하셨는데, 그 어떤 통치 권력도 그들의 귀에 닿지 않는 숨죽인 언어가 민간의 마음들 틈을 흘러다니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은=하지만 면(面) 단위로 있는 주재소라는 경찰 파출소 앞은 누구나 지나가기를 꺼려했어. 걸핏하면 일본인 순사가 나와 ‘조토 고이(잠깐 와봐)’라고 괜히 취체하기 십상이었으니까. 그래서 아기가 울 때도 엄마가 우는 아기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에비, 순사 온다’ 하면 아이들이 그 말에 겁을 먹고 울음을 그칠 정도였어. 내가 자라나는 동안 전통 사회의 오랜 관행이던 가양주(家釀酒) 빚기를 밀주 단속으로 엄금하는 시기에도 명절을 앞두고 대부분 땅 속이나 창고의 한 구석에 술 항아리를 묻어두는 것으로 그런 행정 강제를 거슬러 낸 것이네. 내 어린 시절의 모국어도 이런 저항으로서 지하화였던 것이지. 불온이야말로 자아였어.

김형수=모국어의 지하화라…. 개인적으로 ‘고은 식 사유’의 정수를 <개념의 숲>에 두어봅니다. 선생님께서 손수 그림을 그리고 아포리즘을 구성한 책인데, 언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 질서정연하지 않고 단조롭지 않은 이상한 명쾌함 속에는 ‘바라보기 관습’(이건 제가 편의상 지어낸 표현입니다만)을 무화시키는 진경이 펼쳐집니다. 중국학풍, 서양철학으로 형성된 딱딱한 개념들이 선생님 특유의 ‘시선 해체’에 의해 존재의 의미를 되찾아 나오는 모습은 한국어의 절경같이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불온’이라는 말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 수도 있나 싶어집니다.

2학년 담임선생

가네무라 선생

전주사범학교 나와

우리 학교에 부임한 가네무라 선생

국민복 입으면

몸이 옷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가네무라 선생

아이들이 음악시간 풍금 들고 오면

그 풍금 치며 노래할 때는

목울대 유난히 떨려

도둑질하고 무서워 떤다고 여기게 했던 가네무라 선생

조선 사람인데

조선말 한마디 쓰지 않고

빠가야로

빠가야로

하루도 빼놓지 않는 빠가야로

아이들한테 손찌검은 없어도

걸핏하면 벌주어

2학년 교실 복도에는

두 손 들고 서 있는 아이들 수두룩하다

(하략)


Today`s HOT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케냐 의료 종사자들의 임금체불 시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2024 파리 올림픽 D-100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솔로몬제도 총선 실시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