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학자군주 정조와 실학자 홍대용의 300일간 논쟁

고영득 기자

▲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김도환 지음 | 책세상 | 332쪽 | 1만5000원

“지구는 둥글고 스스로 돈다.” 성리학적 유교질서에 갇힌 18세기 조선시대, 우주는 한없이 넓고 지구는 그 중 하나의 천체일 뿐이라고 설파한 홍대용.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라 불리는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과학자이자 수학자였고 당대의 손꼽히는 거문고 연주자였다. ‘실용실행(實用實行)’을 중시한 그는 말 그대로 실학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홍대용이 300여일간 정조의 서연(書筵·왕세자의 공부)에 참석해 나눈 대화를 기록한 <계방일기>의 해설서다. 정조와 홍대용, 그리고 다른 신하들과의 문답으로 구성돼 있다. 사유와 논쟁의 연속이다. 경전을 놓고 강론을 벌이는 모습이 대화체로 펼쳐져 생생하다.

[책과 삶]학자군주 정조와 실학자 홍대용의 300일간 논쟁

북학의 문을 활짝 연 홍대용뿐만 아니라 문예부흥을 이끈 정조의 세손 시절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정조의 표정, 행동거지를 놓치지 않는다. 정조 즉위 전후의 시대적 배경도 곁들인다. 아울러 “꽤나 호된 신고식이었다” “아뢰기 무섭게 다시 세손의 명령이 떨어졌다”처럼 저자가 대화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군신 간의 딱딱한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풀어간다.

둘의 첫 만남이 인상적이다. 정조가 <중용>의 주자 서문에 나오는 ‘형기지사(形氣之私)’와 ‘인욕지사(人慾之私)’에서 ‘사’가 같은 것인지를 묻자, 홍대용은 <중용>의 주자 서문을 읽은 지 오래돼 기억할 수 없다고 답한다. 정조는 홍대용을 평가절하했을 것이고, 홍대용도 정조가 선비처럼 세밀한 것을 따지는 자로 봤을 터. 홍대용은 자신의 학문을 지나치게 자신하는 정조에게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간한다.

만남이 반복되면서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는 홍대용은 아첨에 능한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강하게 반박할 때도 있지만 정조는 홍대용의 말에 수긍이 가면 “지극히 옳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정조가 보기에 홍대용은 아는 것도 많고 수양도 잘 쌓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서연에서 홍대용에게 묻는다. 왜 과거를 보지 않느냐고. 과거제도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홍대용은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댔다. 이에 정조는 과거를 분명 옳게 여기지 않아서일 것이라고 추궁한다. 홍대용은 차마 그리 말할 수 없었다. 침묵으로 답을 대신한다. 출세는 그의 사전에 없었다. 홍대용은 또 옛것만을 고집하는 이들을 싫어했다. 홍대용은 정조에게 격물치지를 간절히 권했다. 하지만 정조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조가 옛날과 지금의 밥그릇 모양 차이로 세상의 변화를 언급할 때였다. “어느 것을 사용하는가”라고 묻자, 홍대용은 “지금 만든 것을 사용합니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홍대용은 끝내 정조와 같은 길로 갈 수 없었고, 가지 않았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밖에 대화에는 공자, 주자를 비롯해 송시열, 홍국영, 박지원과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외척 등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한다. 당대의 지식인들이 주고받은 말 속에는 많은 것이 감춰져 있다는 저자의 말을 부인할 수 없다.

‘홍대용 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홍대용만큼 ‘실학자’라는 명칭이 잘 어울리는 인물도 없다고 했다. 책은 정조보다는 홍대용의 진면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고영득 기자 godo@kyunghyang.com>

[책과 삶]학자군주 정조와 실학자 홍대용의 300일간 논쟁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