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의 ‘리넨 셔츠’

김경 | 칼럼니스트

2년 전 이맘때 얼떨결에 프라다의 뱀피 드레스를 샀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프레스 세일이라지만 평소 내 취향으로 봐서 귀신에게 홀린 짓이나 다름없는 선택이었다. 뱀의 피부라니, 게다가 가슴 선이 명치까지 시원하게 파여 있어서 지나가던 개도 내 가슴 사이즈가 알량하다는 걸 다 알 판이다. “이거랑 같이 입으시면 되어요.” 홍보담당자가 건내주는 걸 살펴보니 이건 마돈나나 레이디 가가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브레지어다. 벌집 모양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검정색 특수 브라.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재미로 한 번 입어보고는 싶었다. 그런데 웬걸. 그걸 입고 나오니 함께 간 편집장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진다. “야 사. 딱 니 꺼야. 세계적인 하이 패션지의 편집 차장이 그 정도는 입어줘야지.” 그 말에 솔깃해서 다시 한 번 그 무시무시한 뱀피 드레스를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그런데 다시 보니 스커트 자락이 잘못 만들어진 듯 아방가르드하게 삐뚫어져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소재는 풀 먹인 이불 호청처럼 뻣뻣하기 그지 없고. 특히 삐뚫어진 부분을 강조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뻣뻣하게 치솟아 있는 치맛자락이 어딘지 장난스럽다. 이윽고 완전히 넘어간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당첨!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미우치아 프라다 여사의 진정한 자존심을 상징하는 거다. 일부러 올바른 취향과 수준 높은 미적 감각을 내동댕이치고 아름답지 않거나 부적절하거나 혹은 실수처럼 보이는 불완전한 명품을 지향하는 그 고차원적인 정신 세계 말이다. 이 뼛속까지 오만한 저 상류 부르주아 출신의 전직 공산당원에게 박수를!” 내 의식이 여기까지 미치면 안 살 수가 없다. 무엇보다 편집장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마치 범죄를 공모하는 식으로, 아니 어쩌면 제물을 바치는 식으로 기회 닿는 대로 내게 고가의 하이 패션 쇼핑을 강권했던 사람이니까. 그렇다. 난 상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도 기꺼이 저 오만하게 삐딱한 드레스를 살 필요가 있는 거다! 결국 난 언제 입을지 의심스러운 그 뱀피 드레스를 샀다. 벌집 모양 브라도. 그리곤 프라다 로고가 박힌 큼지막한 쇼핑백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낮술로 신경전달 물질의 반응을 촉진시켜 온 몸에 이상한 만족감이 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패션왕>을 보면 알 거다. 패션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패션은 일종의 마약이다. 그들은 어떤 ‘룩’에, ‘핏’에, ‘간지’에, ‘에지’에 취한다. 그 취기가 기분을 업시키고 자기 내면의 불안감마저 지워준다. 게다가 다른 사람의 시선에 투영된 자신의 취향과 생각을 보면서 더할 나위 없는 자긍심마저 느낀다. 그러니 주머니 사정만 받쳐준다면 패션에 대한 탐욕은 그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다. 오 인생은 아름다워, 돌체비타! 하지만 문제는 자기 도취라든가 망각상태가 심해져 자신의 룩(look)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면 그 정신은 물론 지성이나 감성마저도 더 우월해졌다고 느낀다는 거다. 맛이 간 구제불능의 약쟁이들이 그러하듯이 이제 자기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없다.

[김경의 트렌드 vs 클래식]애덤 스미스의 ‘리넨 셔츠’

예컨대 김여진에게 국밥 아줌마처럼 생겼다는 둥의 개념 없는 막말을 하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황의건(홍보대행사 오피스H 대표로서 조선일보에 패션 칼럼을 쓰고 있는 자) 같은 인물이 그렇다. 그때 그 자신은 당당했는지 모르겠지만 패션계에 있던 나와 내 동료들은 같은 동네에서 밥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다행히도 나는 ‘패션왕(패셔니스타)’이 아니었다. 왕은커녕 아마 무수리였을 거다. 그런데 무수리에게 프라다 뱀피 드레스라니, 얼마나 어색한가? 파티가 있던 날 한 번쯤 입어보려고 하니 촬영하려고 걸어둔 여배우의 옷을 훔쳐 입은 듯 마냥 불편하기만 했다. 평소 쏙 빼입는 것보다 아무렇게나 걸쳐 입는 쪽이 오히려 더 스타일리시하고 우아하다고(우아함은 고상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 믿던 내가 아방한 드레스를 입은 꼴이 영 우스꽝스러웠다. 그래서 얼마 후 후배에게 팔아버렸다. 내가 샀던 가격의 반값에 팔았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취하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땀 흘려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 것처럼 개운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더 이상 옷을 사지 않는다. 그런데도 옷장을 열 때마다 내게 입을 만한 옷이 이렇게 많았나 하며 새삼 놀라고 있다. 예전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늘 입을 만한 괜찮은 옷이 없고 늘 새 옷이 필요했다. 그러면서 그 바쁜 출근 시간에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느라 30분씩 시간을 축 내고 있을 땐 괜히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짜증이 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든 신경 안 쓴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신경 쓰고 있었던 거다. 나도 옷차림으로 내 주변 환경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낄까봐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다. 나도 내 옷차림이 내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인정을 받기를 은근히 바랐던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애덤 스미스가 말한 리넨 셔츠가 떠올랐다. 생존에는 불필요하지만 가장 하층민이라도 체면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 일례가 바로 ‘리넨 셔츠’라던. 언뜻 지나가는 말로 했던 우리 노모의 청이 떠오른다. 시스루 스타일의 비치는 하늘하늘한 여름용 재킷이 필요하다던. 아무렴, 필요하지. 아예 두 벌을 사드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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