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

정제혁 사회부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재야 법조인 시절 쓴 <야만시대의 기록>에는 우리가 거쳐온 시대를 증언하는 생생한 사례들이 가득하다. ‘고문의 한국현대사’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상당 분량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할애돼 있다. 지금은 상상조차 힘든 야만의 시간 가운데서도 특히 참혹한 것은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다. 저자는 이 사건을 ‘처참함이 극에 달한 고문사건’으로 규정한다.

[기자 칼럼]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

“중앙정보부 취조 시 고문에 의해 수십 차례에 걸쳐 심장병인 협심증까지 일으켜 드디어는 수차 졸도하는 등 만신창이가 되었다”(피고 도예종씨의 최후진술 중), “혹독한 고문으로 탈홍이 되고 폐농양증이 생겨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 취조를 받았다”(피고 하재완씨의 상고이유서 중), “고문을 할 때는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으며, 두 번만 더 돌리면 심장이 파열되어 죽을 것 같았다. 이때 고문하는 수사관은 술에 취해 있었다”(피고 우홍선씨의 법정진술 중)

중앙정보부만 고문을 한 게 아니었다. 검사가 “구둣발로 고무신을 신은 발을 마구 밟거나” “수사관의 손에 끌려 지하실로 내려가 다시 전기고문대에 올려진”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법정에서 검사가 피고에게 “너, 아직 고문이 덜 되었구나”라고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했다가 공판이 끝나자마자 끌려가 검사와 수사관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고문을 통해 조작된 진술은 법정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기자들은 법정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이런 재판 아닌 재판을 거쳐 1975년 4월8일 8명에게 사형이 확정됐다. 판결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형은 집행됐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중앙정보부의 수사 단계에서부터 대법원의 판결, 그리고 집행에 이르기까지 고문과 불법으로 점철된 조작의 극치”(박원순 변호사)였다.

남편의 무죄를 주장한 한 사형수의 부인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욕설과 협박에 시달렸다. 요원이 불러주는 대로 ‘내 남편은 간첩’이란 글을 쓰고 지장을 찍은 뒤에야 풀려났다. 집에 돌아온 부인은 자책감에 시달리다 쥐약을 사서 아이 셋과 함께 집단자살을 기도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며 마치 적법한 절차를 거쳐 사형 선고와 집행이 이뤄진 것처럼 말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진상은 대략 이렇다. 자유민주주의자인 박 후보는 법치를 중시하는데 유신정권에선 자유도, 민주도, 법치도 체계적으로 부정당했다. 사법의 암흑기였다. 박 후보의 발언에선 이를 인정치 않으려는 완고함이 읽힌다.

어느 사회든 과거에 대한 평가를 통해 미래의 기준을 만들어간다. 박 후보의 역사인식이 걱정스러운 이유다. “다들 배가 부른가보다”는 집권당 원내대표의 말은 많이 배웠다는 우리 사회 지도자급 정치인의 ‘평균적 교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정제혁 사회부기자 칼럼정제혁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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