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 어쩔 텐가

안병욱 | 가톨릭대 교수·한국사

박정희 집권 18년간 수많은 국가범죄가 저질러졌다. 동백림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김형욱 암살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모두 박정희와 사적인 연관을 지닌 공통점이 있다. 8명의 사법살인을 불러온 인혁당 사건도 마찬가지다. 박정희의 큰형은 대구에서 좌익활동에 앞장섰다가 처형됐으며 그 자신도 남로당에 관여했지만 그 조직원들의 정보를 수사당국에 제공하고 살아났다. 그런 연유로 박 대통령은 당시 누구보다도 대구지역의 혁신계 지식인의 동향을 훤히 알고 있었다.

[시론]박근혜,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 어쩔 텐가

반유신 시위가 격렬해지자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1974년 4월3일 밤 10시에 발표된 특별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하에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통일전선의 초기단계적 지하조직’을 형성하고 이른바 ‘인민혁명’을 기도하였다고 했다. 이 담화는 민청학련 수사의 가이드라인이 됐다. 중앙정보부와 군법회의 검찰부는 아니나 다를까 인민혁명을 기도하면서 학생들을 조종하고 있는 불순배후 세력의 실체는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 공산세력’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인혁당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대구 지역의 혁신계 또는 반정부 성향의 비판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평소 유신체제를 비판했지만 결코 인혁당이라는 당조직을 결성한 적도 또 그런 명칭을 스스로 사용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일찍부터 그들의 비판적인 행적은 유신정권으로부터 정치적 희생양으로 지목받고 있었다.

이보다 10년 전인 1964년에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대통령 취임 1년여 만에 위기를 맞았다. 그때도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불순한 배후 세력 핑계를 대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는데 그렇게 체포된 분들이 이른바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수사 검사들은 기소할 만한 혐의가 없다면서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내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 일은 박정희에게 분노와 함께 지울 수 없는 자존심의 상처였을 것이다. 이것이 1974년 10년 만에 재론되는 배경이다.

긴급조치 4호로 이제는 최고 통치자의 의중에 따라 재판이라는 일사천리의 요식절차만 남았다. 그런데 뜻밖에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박 대통령은 육 여사 장례식을 계기로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1975년 2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해 높은 찬성률을 이끌어 낸 다음 구속된 학생, 종교인 신분의 피고인들을 석방했다. 물론 인혁당 인사와 이미 학교를 졸업한 인사들은 석방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석방된 인사들은 민청학련과 인혁당에 대한 정부 발표를 전면 부인하고 고문에 의한 조작이라고 폭로했다. 이는 또 한번 박정희를 분노케 했다. 그는 연두순시에서 석방자들이 형무소를 나올 때 마치 개선장군처럼 만세를 부르면서 나왔다고 역정을 내면서 인혁당은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조직된 것이라고 다시 한번 사건 성격을 규정해 주었다. 박정희의 지침은 대법원 판결에 그대로 반영돼 사형이 선고됐고 선고 18시간 만에 야만적인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 이는 독재자 개인의 분노가 개입된 보복적 처단이었으며 정부의 공권력이 들러리로 총동원되어 저지른 살인이었다.

독재자들은 행위가 아니라 머릿속 생각을 적발해 처벌하고자 한다. 유신은 그런 시대였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다면 그런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근래 인혁당 논란을 계기로 박근혜 후보에게 불안한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그에게서 지워지지 않은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 때문이다. 박근혜 후보는 유신정부의 퍼스트레이디였으며 유신정책의 중심에 위치했다. 그는 후보로서 무엇보다 군사쿠데타와 유신정변을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정리해야 한다. 자신의 과거 행적 때문에라도 먼저 나서 유신잔재를 극복하려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모호한 태도로 의구심을 키우고 있다. 인혁당 희생을 야기한 야만적이고 잔인한 역사를 감싸는 정치인에게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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