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진중권 교수

■ 윤평중 교수
시효 다한 ‘박정희 패러다임’의 근원적 정당성을 신봉하고 있다

▲ ‘박정희 패러다임’의 자식임을 그만 두고
‘포스트 박정희’로 나아가야

[윤평중·진중권의 대선비평 ‘판’](1) 박근혜의 과거사 인식

일찍이 철학자 헤겔은 세계사는 세계 법정이라고 갈파했다. 시대정신의 구현인 역사의 흐름이 곧 심판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정치의 핵심인 공공성을 파괴해 온 이명박 정부의 5년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불신·불안이 쌓여 총체적 분노로 폭발하기 직전이다. 재벌은 사상 최대의 호황이라는데 우리네 삶은 팍팍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박근혜 후보가 없었다면 새누리당은 어떻게 되었을까? ‘못 살겠다 바꿔보자’의 아우성 앞에 공황상태였을 것이다. 박근혜 없는 18대 대선은 17대 대선처럼 집권여당을 일패도지로 밀어넣었을 게 틀림없다. 한마디로 압축하건대, 새누리당의 예정된 몰락을 버텨내는 존재가 정치인 박근혜다. 여당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4월 총선의 흐름을 뒤집는 데도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역할이 컸다. 이것이 바로 박근혜의 힘이다.

박근혜를 ‘박정희의 딸’이란 프레임으로 가두려는 진보의 시도는 이 대목을 간과했다. ‘이명박근혜’로 묶어 정권심판을 유도하는 민주당 전략도 이명박 정부에서 박 후보가 실질적인 ‘여당 내 야당’으로 기능해왔다는 이미지 때문에 먹혀들지 않는다. 정권재창출보다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이 훨씬 많음에도 대결구도가 초박빙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박근혜의 개인적 역량에다, 한국현대사의 힘 관계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 온 보수의 구조적 우위가 합쳐져 ‘40% 콘크리트 지지율’로 나타나는 것이다.

적의 실력을 정확히 알아야 승리를 꾀할 수 있음은 병법의 기본이다. 하지만 부동의 강자인 박근혜 후보에게도 치명적 약점이 있다. 과거사 인식문제가 그것이다. 지도자의 역사관은 공동체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제왕적 대통령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건 단연 박정희 패러다임이다. 당대 세계사의 흐름을 읽은 박정희는 경제적 불균등 발전전략을 씨줄로 삼고 냉전반공주의적 독재정치를 날줄로 삼는 박정희 패러다임으로 한 시대를 질주했다. 그러나 박정희 패러다임의 완성이 동시에 박정희의 파멸을 잉태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의 재벌 문제도 결국 박정희 패러다임이 낳은 것이다. 문제는 한 시대를 풍미한 박정희 패러다임의 유효성이 다했음에도 이를 대체할 포스트박정희 패러다임이 분명치 않다는 사실이다. 옛것은 사라졌는데 새것은 보이지 않는 혼미의 상황인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최대 약점은 박정희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패러다임의 근원적 정당성을 신봉한다는 데 있다. 재벌개혁에 미온적인 박 후보의 경제공약은 박정희 패러다임의 잔재를 여실히 보여준다. 권위적인 박 후보의 정치 방식은 21세기가 요구하는 민주적 리더십에 못 미친다.

이런 상황에서 박 후보의 과거사 인식을 둘러싼 논란은 불가피한 검증 작업이다. 정치적 공방의 초점이 되고 있는 정수장학회 논쟁은 사회 환원 등의 방식으로 곧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정수장학회는 작은 현상적 표현일 뿐이며 문제는 훨씬 깊은 데 있다. 박정희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포스트박정희 패러다임을 21세기 민주다원사회인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박근혜 후보는 평생 지켜온 박정희 시대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공식적으로 수정했다.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으로 헌법적 가치가 훼손되고 정치발전을 지연시켰다”고 인정한 건 ‘원칙주의자’ 박근혜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딸인 제가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는 것을 국민들께서 원하시는 건 아닐 것”이라는 말에도 진정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묻는 책임윤리의 정치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선한 의도나 진정성이 아니다. 현실정치의 지평에서 정치인의 진정성은 행동으로 증명되고 정책으로 검증되어야 비로소 유효하다. 어느 누구도 박 후보가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는 패륜을 자행하길 원치 않는다. 다만 오늘의 한국사회는 정치인 박근혜가 시효가 다한 박정희 패러다임의 자식임을 그만두고 포스트박정희 패러다임의 선두 주자가 되길 바란다. 박 후보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민심은 변화를 희구한다. 1년 이상 고공행진하는 안철수 열풍이 생생한 증거다. 18대 대선구도가 지금처럼 ‘과거와 미래의 대결’로 흘러갈 때 제일 불리한 건 박근혜 후보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과거이며, 포스트박정희 패러다임은 미래를 지칭한다. 한국같이 역동적인 사회에서 어찌 과거가 미래를 이길 수 있겠는가? 다만 박정희 패러다임의 공과가 너무 선명한 데 비해 포스트박정희 패러다임의 모습은 아직 흐릿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박 후보의 최대 장벽은 자기 자신이다. 범인의 상상을 뛰어넘는 부모의 비극과, “개인적으로 절망의 바닥까지 내려간” 상처는 박 후보를 단단한 자아의 철벽에 가두었다. 그러나 어떤 존재도 껍질을 까는 아픔 없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박 후보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포르투나(Fortuna, 운명)에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비르투(Virtu, 역량)로 오늘의 자리에 이르렀다. 지금은 박정희 패러다임이라는 과거를 뛰어넘는 비르투를 발휘해야 하는 결정적 순간이다.

<윤평중 교수 | 한신대 철학과>

■ 진중권 교수
정수장학회 장물 아니라는 것…‘과거사 사과’ 진정성 의구심

▲ 기부의 강제성 인정한 법원의 판결 뒤집어…
‘피해자 고통’에 배려 안해

[윤평중·진중권의 대선비평 ‘판’](1) 박근혜의 과거사 인식

부친의 문제로 그와 아무 관계없는 후보의 발목을 잡는 것은 ‘연좌제’의 발상이리라. 하지만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코 아무 관계가 없지는 않았다. 우선 그는 유신정권에서 퍼스트레이디로 활동을 했고, 오늘날 그가 가진 정치적 위상도 부친의 후광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과거사 문제를 묻는 데에는 이런 가족력보다 더 중요한 맥락이 존재한다.

대통령의 책무는 헌법과 영토를 수호하는 데에 있다. 그렇다면 후보가 헌법에 천명된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야말로 일차적으로 검증의 대상이 되는 게 당연할 것이다. 문제는 박 후보의 정치철학이다. 박 후보는 과연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에 적합한 정치철학을 갖고 있는가? ‘과거사’에 관한 물음은 이렇게 재규정되어야 한다.

그는 1989년 어느 방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5·16 때 공산당한테 나라가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희생이 값진 것이고 헛되지 않은 것이지, 나라가 (먹혔다면) 그 희생은 다 헛된 것 아니겠느냐.” “유신과 자주국방은 떼려야 뗄 수가 없어요. 왜나면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그 기한 안에 이루기 위해 아버지가 유신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결국 두 번에 걸친 헌정의 파괴가 역사적으로 정당했다는 얘기다.

결국 여론에 밀려 그는 사과를 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구심은 남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왜 그가 이 문제에 전향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그토록 힘들어 했나 하는 점이다. 그것은 이 사안이 적어도 그에게는 계산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5·16 쿠데타와 유신헌법은 박 후보의 정치철학 요체, 즉 그가 정치를 하는 이유, 그가 삶을 사는 동기 그 자체다.

박 후보의 인식은 유신정권에서 유포하던 프로파간다 수준에 머물러 있다. 청와대에서 자라나 그 안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까지 하다 보니, 정권의 프로파간다에 완전히 세뇌돼 버린 것이다. 그가 뒤늦게라도 인식을 바꾼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의 사과는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되려는 자는 그 어떤 논리로도 헌정의 파괴를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는 긍정적 선례를 남겼다.

박 후보의 발목을 잡는 또 하나의 ‘과거사’는 바로 정수장학회다. ‘정수장학회는 사유재산이 아니라 공익재단’이라는 그의 입장은 ‘형식적으로’는 올바르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이 그에게 묻는 것은 그 재단이 ‘실질적으로’ 누구의 것이냐는 것이다. 자신이 정수장학회와 관계없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심지어 새누리당과 보수언론도 이 문제의 전향적 해결을 요구하지 않던가.

얼마 전 정수장학회와 박 후보가 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사건이 터졌다. 바로 장학회의 최필립 이사장과 MBC 이진숙 기획홍보본부장의 밀담(?)이다. 거기서 최 이사장은 “결승전이 다가오는데 나도 한몫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 본부장은 “정치적 임팩트가 굉장히 큰 사안”이라 발언했다. 이 본부장은 지분 매각 문제를 “극비리에 추진하겠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공익재단’을 표방하는 곳의 자산을 특정 후보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정수장학회 지분을 팔아, 박 후보의 과거사 부담을 덜어주고, 부산·경남의 득표 활동에 도움을 주며, 박 후보에게 유리한 언론환경을 만들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어제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에 관해 전향적 태도의 표명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으나, 박 후보는 유감스럽게도 “정수장학회는 사유재산이 아니”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집했다. 이는 논리적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되, 추후 최 이사장이 자진해서 사퇴를 하는 그림을 그린다면, 박 후보는 “왜 그동안 장학회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왔느냐”는 비난을 받지 않고 이 문제를 무모순적으로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 후보의 발언은 분명히 이 수준을 넘었다. 그는 심지어 “정수장학회는 부일장학회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폭탄발언까지 내놓았다. 이 말은 거의 ‘연세대는 연희전문을 승계한 게 아니라 새로 만든 것’이라는 얘기로 들린다. 이 말로써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한마디로 정수장학회는 ‘장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 발언은 박 후보가 했던 사과의 진정성을 심각히 의심하게 만든다. 그는 이미 “두 개의 판결이 있었다”는 발언으로 인혁당 피해자 가족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바 있다. 그러더니 이번 발언으로 다시 한번 부일장학회 기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법원의 판결까지 뒤집어버린 것이다. 이 적반하장의 어법에는 피해자 가족이 당했을 고통에 대한 일고의 배려도 보이지 않는다. 김지태씨 유가족이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박 후보의 얼굴에 스친 그 무심한 표정이 매우 스산하게 느껴진다.

<진중권 교수 동양대 교양학부>

<2012 대선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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