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대통령론의 허상

김민아 논설위원

황상민 연세대 교수의 어이없는 막말이 여성 대통령 논쟁을 순식간에 저질 코미디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황 교수 발언에 주목하지만, 저는 이번 논쟁에서 활약한 다른 남성들의 발언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의 말을 통해 논쟁의 전개과정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새누리당에서 공식적으로 여성 대통령 이슈를 띄운 사람은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입니다. 김 본부장은 지난달 14일 “여성 대통령은 우리 정치 최고의 쇄신”이라고 선언합니다. 희화적입니다. 그는 2002년 “대통령 유고 시 여성 총리에게 국방을 맡길 수 있겠느냐”고 말한 장본인입니다. 여성 비하라는 질타 속에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났지요. 10년 사이 페미니스트로 거듭난 것일까요. 여성 대통령 논쟁은 처음부터 이렇게 꼬이기 시작합니다.

[경향의 눈]여성 대통령론의 허상

정성호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출산과 보육에 대해 고민하는 삶을 살지 않은 박근혜 후보에게 여성성은 없다”(10월29일)고 논평합니다. 초점을 잃은, 빗나간 대응입니다. 이상일 새누리당 선대위 대변인이 “미혼여성에 대한 집단모독”(10월30일)이라고 반격하지요. 이 대변인에게 조금이라도 젠더(사회적 의미의 성) 의식이 있었다면 미혼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을 겁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들은 ‘비혼’이란 말을 선택합니다. 박 후보와 마찬가지로 출산도 보육도 고민해보지 않은 저는 모독당했다는 느낌 대신 웃음이 나왔습니다. 여야 대변인 공히 젠더 감수성이 빵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번에는 김성주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 차례입니다. 김 위원장은 여성이지만 ‘명예남성’으로 대우해 드립니다. 최근 공개 석상에서 젊은 남성 당직자에게 “나 영계 좋아하는데”라고 말했다니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는 박 후보의 인생을 “국가와 결혼한 삶”(11월1일)으로 요약합니다. 결혼은 하나의 선택인데, 비혼이라고 국가와 결혼한 것으로 포장해야 할까요. 글로벌 마인드를 강조하는 분답지 않게 좀 구리네요. 죄송합니다, 속어를 써서.

박 후보도 “부패와 권력다툼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여성 대통령 시대로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자”(10월28일),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여성 리더십을 통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11월1일)고 강조합니다. “새누리당에 ‘남자 의원’은 박근혜 후보 단 한 명뿐”(조순형 전 의원)이라는 ‘칭송’을 듣던 이가 갑자기 여성 마케팅을 하니 낯설고 어지럽습니다. 여성이어서 국방을 맡을 수 없다는 게 편견이라면 ‘여성=반부패’ 공식도 편견 아닐까요. 문제는 성별이 아니라 개인적 도덕성이나 청렴에 대한 감수성이고, 부패를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입니다. 부드러운 여성 리더십의 정체는 또 뭡니까. 소통과 공감의 리더십을 지칭한다면 박 후보에게 어울리는 옷 같지 않습니다.

‘박근혜의 미래’가 내 딸의 미래를 약속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박 후보가 걸어온 길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신입·말단·수습 같은 호칭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20대에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를 지냈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에는 영남대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사회생활의 출발부터 ‘장(長)’이었던 그는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국회의원과 당 부총재가 되고 곧이어 대선 주자 반열에 오릅니다. ‘유리천장’이란 말을 들어보았으되 겪어보진 못했을 겁니다. 그게 박 후보 잘못은 아니지만 ‘매일이 투쟁’인 대다수 여성 직장인들에게는 속쓰린 얘깁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여성 대통령론을 이야기하다 뜬금없이 “박 후보는 조신한 몸가짐으로 한국 여성의 품격을 세계에 높였다”(11월1일)고 상찬합니다. 아부도 이 정도면 최상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러웠습니다. 마초들이 모였다는 새누리당에서 대선 후보가 될 때까지 조신한 성품을 지킬 수 있었구나 싶어서요. 남성 중심 조직에서 밥벌이를 하다 보면 타고난 성격도 바뀌는 법이니까요. 하긴 아무리 마초 집단이라도 박 후보에게 폭탄주를 강권하거나 노래방에 가자고 잡아끄는 강심장은 없었겠지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약자로 살아보지 않았다는 건 출산·보육 경험이 없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여성 대통령론은 길을 잃었습니다. 정성호 대변인의 표현을 빌리면 “양성평등에 대해 고민하는 삶을 살지 않은” 남성과 명예남성들의 허황한 말잔치 탓입니다. 박 후보 참모들의 여성 대통령론에는 철학도 논리도 문제의식도 없습니다. 정직성이나 일관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표면적으로 여성 대통령론을 설파하지만, 속으로는 왕조의 계승자를 향해 불타는 충성경쟁을 펼치고 있을 뿐입니다. ‘박근혜의 미래’에서 딸의 미래를 보고 싶은 부모들은 미망에서 깨어나길 바랍니다. 박 후보의 미래는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연장입니다.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유산입니다. 이름없는 부모를 둔, 이름없는 딸들의 미래는 그의 미래와 무관합니다. 여성 대통령론의 슬픈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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