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맞춤복지’의 진실

오건호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

복지 공약이 엇비슷하다고들 말한다. 지난 3일 선거관리위원회와 한 언론사가 벌인 여론조사에서도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가장 비슷한 공약으로 복지가 꼽혔다. 지난 2년간 대한민국을 크게 가른 주제가 복지였다. 2010년 지방선거는 무상급식,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보편복지와 선별복지의 대결이었다. 이제 그 차이가 해소되었단 말인가?

복지 민심이 확산되면서 유사해진 복지가 있다. 무상급식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무상보육으로 이어졌다. 반값등록금도 지원 방식은 다르나 규모에서 비슷해져 가고 있다. 사회적 관심이 크거나 당사자들의 활동이 강한 영역의 복지들이다. 반면 대다수 복지에서는 여전히 차이가 크다. 검증이 없었을 뿐이다. 그제 TV토론이 처음이었다. 보건의료 공약 10분 토론으로도 후보 간 다름이 드러났다. 문재인 후보는 모든 질환에 100만원 상한제를 도입하고, 박근혜 후보는 고액진료 환자의 15%에 불과한 4대 중증질환만 책임진다.

복지 공약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은 새누리당의 변신작업이 유효했음을 의미한다. 기존의 선별복지를 생애주기별 맞춤복지로 개명했다. 차별 이미지 대신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연상케 하는 용어다. 사실 복지 자체는 생애주기별로 제공되는 것이다. 의료를 제외하고는 보육, 급식, 교육, 일자리, 노후 모두 생애별로 설계된다. 제공 방식이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가 논점이다. 예를 들어, 복지 논쟁을 촉발했던 무상급식은 초등학생 생애주기에 해당되는 복지고, 권리로서 제공되는 보편급식과 소득계층을 따지는 선별복지가 충돌했다. 서구 복지국가에서 시행되는 보편적 아동수당도 박 후보 공약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경향논단]박근혜 ‘맞춤복지’의 진실

노동자에게는 실업복지가 중요하다. 문 후보는 현행 고용보험 가입자에게는 실업급여 강화, 사각지대에 있는 청년·장기실업자·폐업자영자에게는 실업부조 형식의 구직촉진수당 지급을 내걸었다. 박 후보에게는 이와 관련한 공약이 없다. ‘복지 수급의 조건으로 일을 강조하는’ 근로연계 복지, 시장중심주의 복지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일을 잃어 생활이 어려운 당사자에겐 가혹한 일이다.

노인에게 중요한 복지는 의료, 장기요양, 기초노령연금이다. TV토론에서 드러났듯이,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암·심혈관·뇌혈관·희귀난치성 환자는 병원비 부담에서 벗어나겠지만, 간·척추·안과 등 85%의 다른 고액진료 환자는 계속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장기요양보험 적용 대상도 문 후보는 현재 노인의 5.6%, 33만명을 2017년까지 10%, 약 70만명으로 늘리는 데 반해, 박 후보는 경증 치매노인 약 4만명과 차상위계층, 독거노인 대상 판정체계 개편에 머문다. 치매나 취약계층 노인이어야만 장기요양보험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다.

기초노령연금은 두 후보 모두 20만원으로 인상을 약속했다. 2007년 이명박 후보도 그랬다. 그런데 인수위원회에서 이를 폐기했고, 새누리당과 박 후보 역시 줄곧 이에 동조했으며 지난 총선 공약에도 인상안이 없었다. 그런데 지난달 5일, 이명박 후보가 그랬듯이, 박 후보는 대한노인회를 찾아 다시 기초노령연금 20만원을 꺼냈다. 이 공약을 믿을 수 있을까?

복지 공약의 차이는 재원 공약에서도 확인된다. 박 후보는 연평균 27조원, 문 후보는 38조5000억원을 말하지만 공약 목표가 실현되는 2017년의 필요 규모 차이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두 후보는 재정지출 개혁, 탈루소득 과세 등에선 의견이 같지만 부자, 대기업 증세에서 길을 갈라선다. 복지 민심과 낮은 조세부담률의 괴리를 좁혀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바라보는 인식이 크게 다르다.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무상급식을 원하는 어린이,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 고액 병원비와 장기요양에 시달리는 환자를 차별하고, 기초노령연금으로 어르신을 우롱해 온 복지다. 용어는 그럴듯하지만 생애주기별 차별복지에 가깝다. 대한민국이 풀어야 할 시대적 과제인 낮은 조세부담률을 방치하는 복지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였다고? 딸을 통해서는 이루지 못할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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