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천리마 운동’과 ‘잘살아보세’의 부활

이중근 정치부장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지난주 육성으로 신년사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 최고지도자로서는 19년 만의 육성 연설로, 할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을 흉내냈다는 복고풍의 형식도 새삼스러웠지만 내용에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지난 연말의 장거리 로켓 발사 성공을 한껏 홍보하며 경제적으로 강성대국이 되자고 한 것은 익히 예상한 바였다. 그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김정은이 과거 할아버지 김 주석 당시의 ‘천리마 운동’ 정신을 끄집어냈다는 점이다. 그는 신년사에서 “당 사업을 1970년대처럼 전환시키고 구현하자”고 말했다.

법륜 스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평화재단은 이 부분을 두고 “경제현장에서의 창의적 노력을 통해 상향식으로 1970년대의 천리마 운동을 다시 구현하자는 의도로 풀이된다”고 분석했다. 남한 사람들이 1970년대를 새마을 운동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일군 시대로 인식하는 것처럼, 북한 주민들도 천리마 시대의 활기찬 분위기에 대한 향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침을 열며]‘천리마 운동’과 ‘잘살아보세’의 부활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려는 것은 북한의 김정은만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직전 “다시 한번 잘살아보세 신화를 이뤄내자”고 강조했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이 전략은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다. 박 당선인을 지지한 표심에는 산업화에 대한 열망과 에너지가 넘쳐났던 1970년대에 대한 향수가 배어 있는 게 사실이다. 베이비붐 세대로 통하는 50대 표심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그리고 당선 후 다시 잘살아보세 구현을 약속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도 박 당선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잘살아보세’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화답했다.

또 남북의 새 지도자가 꺼내든 국정과제를 요약하면 ‘안보’와 ‘민생’이다. 공교롭게도 김 주석과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70년대에 각각 안보와 민생 문제 해결을 외쳤다. 그사이 세계가 부러워할 경제성장을 일궈낸 남한에서도, 또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빈국으로 떨어진 북한에도 모두 ‘안보’와 ‘민생’이 최우선 국정과제로 남아 있는 것은 아이러니다. 분단 상황이 미치는 영향과 리스크가 그만큼 크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복고풍 구호가 성공하려면 충족돼야 할 전제조건이 있다. 먼저 두 사람이 각각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천리마 운동과 ‘잘살아보세’ 운동을 할 당시의 과오를 답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집권 1년을 맞은 김정은이나 갓 취임하게 되는 박 당선인 모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처지임에도 행동은 반대로 가는 듯하다. 지난 1년 동안 김정은이 한 일은 군부의 힘을 꺾기 위해 군 최고위 장성들을 숙청하는 것이었다. 방향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할아버지의 권력투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래도 불안해 보인다.

박 당선인의 경우는 어떤가. 많은 사람들은 박 당선인이 이명박 대통령처럼 모질게 반대편을 핍박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최근 선보인 박 당선인의 인사는 이를 의심케 한다. 극우보수 언론인인 윤창중씨를 대변인으로 기용하더니 인수위원 인사에서도 박효종, 유민봉 교수 등 보수 이데올로그들을 중용했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의 내정은 그 결정판이다. 헌재 내부에서도 이 사람만은 오지 말았으면 하는 사람이 됐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런 극우보수 인사를 기용한 결과는 금세 나타나고 있다. 윤창중 인수위 대변인은 5일 야당을 향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 야당도 내부적으로 할 일이 산적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의 선후를 가려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 당선인의 대변인이 야당에 우선순위를 따져 일하라고 하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간섭이다. 야당이 흥하든 망하든 그것은 야당과 그 지지자들의 몫이 아닌가. 실용노선을 외치던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집회 후 보수 이데올로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다 보수의 함정에 빠진 전철을 박 당선인이 밟지 않을까 저어된다.

또 하나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박 당선인의 복고풍 사고가 ‘민생’ 분야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당면한 민생 현안은 누가 뭐래도 노동과 고용이다. 그럼에도 박 당선인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인수위에 경제민주화를 대표하는 인사가 한 사람도 없다. 노동자들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희망버스’가 1년 만에 다시 등장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박 당선인이 노동자들을 경시하니 이한구 원내대표와 같은 책임 있는 인사가 쌍용차 국정조사 약속을 뒤집는 것이다.

천리마 운동이나 잘살아보세 운동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전체의 이익을 위한다는 이유로 일부 계층이나 지역의 이익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국가의 이름으로 한 집단이나 계층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재현되어서는 안된다. ‘국민총화’라는 말이 또다시 나올까 두렵다. 정말 이런 걱정이 기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정말 못 볼 것을 너무도 많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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