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겨나는 가난한 노동자들

오민규 | 비정규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

“모두 해고해서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없앨 모양입니다.” 연말연시가 되자 계약해지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비정규직을 철폐하겠다고 선언한 공공부문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보건복지’ 분야에서 곡소리가 줄을 잇고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으로서 보건복지 분야 정보시스템을 통합 운영하는 보건복지정보개발원은 최근 계약직 상담원 42명과의 계약을 해지했다. 계약기간 만료가 이유일 뿐이다. 일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또다시 1~2년짜리 계약직을 채용하겠다는 것이다. 칠곡의 경북대병원에서는 노사합의로 상시 업무인 진료보조를 맡는 사람을 계약직으로 채용한 뒤 정원 확보 과정을 거쳐 정규직화하기로 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병원 측은 2년이 도래하는 비정규직 6명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신규 채용된 비정규직으로 대체했다. 해고자들은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경향시평]쫓겨나는 가난한 노동자들

취약계층을 방문해 상담과 진료를 하는 방문건강관리사. 2007년 제도 시행 후 전국에서 2700명이 일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말 계약 연장을 하지 못해 300명이 쫓겨났다.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가 이 직종을 무기계약 전환 대상에 포함하라는 공문이 나온 직후였는데, 해고를 단행한 일부 지자체들의 답변은 기가 막히다. “올해부터 시작해 2년 지나면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라는 지침일 뿐이다.” 그러고선 또 10~11개월짜리 계약직 채용 공고를 낸다.

16만명으로 추산되는 학교 비정규직의 경우, 연말연시에 해고된 인원만 1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방과후 코디 노동자들이, 광주에서는 방과후 전담강사·전문상담사들이 집단해고돼 농성을 벌였다. 경기도와 경북에서도 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무려 160여명이 해고된 충남에서는 도교육청 앞에서 이 추운 날씨에 노숙 단식농성이 벌어지고 있다.

공공부문만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현대차는 불법파견을 피해가려고 1500명에 달하는 근속 2년 미만 하청노동자들을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꼼수를 썼다. 그런데 이제 6개월 만에 곳곳에서 곡소리가 나고 있다. 해고를 한 달 앞둔 계약직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성실하게 일하면 5년이고, 10년이고 일할 수 있다는 말에 1년11개월간 지각·조퇴 한 번 하지 않고 연장근무는 물론 철야근무 한 번 빠진 적이 없습니다. …월급은 반만 받아도 괜찮습니다. 평생 계약직으로 일해도 괜찮습니다. 일만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청으로 일한 기간까지 합해 2년을 넘기지 않도록 모조리 해고하는 것이다. 이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해고된 자리에 또다시 1~2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직이 투입된다. 앞에 든 공공부문 사례처럼 ‘비정규직 돌려막기’가 자행된다. 지난 한 해 441만대의 자동차를 판매하고, 9조원대의 당기순이익을 올린 공룡재벌 현대차에서 지금 벌어지는 일이다.

지난 대선, 가난한 노동자들의 다수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민주노조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야권연대의 정치도, 노동계급의 정치도 가난한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음은 사실이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을 거치며 삶의 피폐를 겪어온 이들은, 여야 후보의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민생’과 ‘안정’을 강조한 박근혜 후보 쪽으로 쏠림현상이 벌어졌다.

하지만 대선이 끝난 지 한 달도 안돼 ‘민생’과 ‘안정’을 향한 가난한 노동자들의 열망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세계 경제위기가 한반도에 상륙하고 있기에 이들의 열망과 박근혜 정권의 실제 모습은 내내 충돌하고, 모순과 긴장이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가난한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다시 한번 해고를 앞둔 현대차 계약직 노동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노동조합은 조합을 위한 조합입니까, 노동자를 위한 조합입니까. 자동차 부품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곳에서 곧 버려지게 된 노동자입니다.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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