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생각나는 날에는읽음

조혜정 | 남원도통초 교사

눈을 들면 겨울 나무는 빛바랜 나뭇잎과 앙상한 나뭇가지를 하고 있지만 가만 눈을 감고 걸으면 성큼 꽃으로, 웃음소리로 다가온다. “여보! 우리 겨울숲 보러 갈래요?” 내가 제안하는 것에는 거의 언제나 가을 들녘처럼 넉넉히 웃으며 수락해주는 남편의 얼굴에 이내 따사로운 햇볕이 찾아와 있다. 남원으로 처음 발령받은 이듬해 인월의 3학년 16명 아이들과 봄현장체험학습을 다녀왔던 곳, 그리고 4년이 지난 얼마 전 봄날 우리 3학년 27명의 아이들과 다시 찾았던 곳…. 경남 함양의 상림숲을 이제는 따뜻한 남편 손을 잡고 걸었다.

솜털 같은 신록을 안고 있던 봄에는 드넓어 보이던 숲이 이제는 가장 편한 친구와 대면하듯 맨얼굴로 서 있는 나무들로 오히려 아늑하다. 백련과 홍련이 피어있던 연못에는 얕은 얼음이 살포시 내려와 있다. 지역의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이곳에 숲을 조성하도록 하였던 최치원 선생을 추모한다는 사운정(思雲亭)에 도달하여 잠시 숨을 돌렸다. “선생님, 여기 신발 신고 올라가도 돼요?” 초임지 인월에서 만난 우리 효재와 유희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운정 계단에 한 가족처럼 어여쁘게 놓여 있던 아이들 색색의 운동화를 바라보며 마음 뭉클했던 순간도 가슴으로 스미어 온다.

“이 작은 언덕 같은 곳, 여기 이 벚나무 앞에서 우리 반 단체사진 찍었어요. 바람결에 벚나무가 마구마구 흩날렸어요.” 어린아이처럼 흥분하여 남편에게 말하는데 눈앞에 초췌한 벚나무가 금세 봄날로 돌아가 연분홍꽃들을 면사포처럼 쓰고 있다. 우리 아이들과 그랬듯이 연리목 앞에서 남편과 정답게 사진을 찍으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교단에서]네가 생각나는 날에는

내 사랑, 그대들은 겨울방학 동안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을까? 여느 방학과 마찬가지로 아이들과 ‘전화데이트’를 할 시간이다. 학급명부에 손을 얹어 27명의 우리 아이들 새해에도 변함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게 해 주시라고 기도드린 후 수화기를 들었다. 기관지염으로 고생 중인 세찬이에게 방학 동안 제일 좋았던 일을 물으니 “친구들이 기억나는 거요” 하고 대답한다. 방학 때 한 일 중에 하나를 답으로 기대했던 나는 또 한번 놀란다. 한 달여 남짓 아이들과 떨어져 있으며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는, 참으로 마음 따뜻한 이 아이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선물로 살아갈까 생각하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효민이 아버지께서는 “아, 우리 효민이요? 놀러 간다고 또 나갔고만요” 하시며 내가 아이의 안부를 묻자 “우리 효민이야 언제나 건강하죠. 잘 놀러 댕기고” 하고 구수한 사투리로 화답하시며 내 마음을 환하게 해 주셨다. 고요한 샘물 같은 가은이는 집으로 전화해도 연결이 되지 않아 아이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가은아! 선생님이야” 하고 가은이 이름을 부르니 아이는 “아! 선생님!” 하며 눈꽃을 보듯 탄성을 지른다. 나는 그 목소리만으로도 환대를 받는 것 같아 고마워졌다. 아이는 한 해 동안 학교에서는 어느 때도 볼 수 없던 큰 목소리로 재잘재잘 자기의 일상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천안에서 썰매 탔어요.” “아, 천안에 친척이 사니?” “네, 이모부랑 이모랑 천안에 살아요. 친척 오빠도 결혼하면서 거기 살아요.”

“혜인아!” “네?” “하, 선생님이야. 학교 선생님.” 언니로부터 수화기를 건네받은 혜인이는 “어?” 하고 인형 같은 목소리로 깜짝 놀란다. “방학 전에 걸린 수두는 다 나았어?” 하고 물으니 아이는 “몸에 조금 남아 있긴 한데 거의 나았어요” 한다. “그래, 고생 많았어. 선생님도 어릴 때 수두 앓았을 때 힘들었거든.” 사실 그때 파우더 색깔의 약을 바른 것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이와 한 마음을 보여주고 싶어 이렇게 덧붙인다. 그리고 “혜인아, 남은 한 주간 하고 싶었던 것 원 없이 하고 다음주에 반갑게 만나자” 하고 말을 맺으니 아이는 곧바로 “감사합니다” 한다. “그래, 선생님도 고마워” 하는데 핑 눈물이 돈다. 더 많이 소중한 것들을 나누어 주고 싶었지만 때로는 육신의 피곤함 때문에 또 때로는 결혼 후 맺어진 새로운 가족관계에서 오는 갖가지 스트레스 때문에 선생님에게도 어려움이 많았단다. 이런 부족한 선생님을 믿고 한 해 동안 잘 따라와 준 너희들에게 고맙구나, 마음 깊이.

끝내 연결이 되지 않은 하연이에게 장문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아버님! 식사하셨어요?” “날이 많이 춥지요?” “저희는 고깃국 끓여 먹었어요.” “남은 방학 하시고 싶었던 일 맘껏 하시고 푹 쉬시고요.” 가만 보니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시아버지께도 하고 있다. “그래, 별일 없냐?” “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네, 그냥 생각나서요.” 그냥 생각나서요…. 봄볕 같은 그 말을 되뇌며 우리 아이들을 또 생각한다. 아직 어렵기만 한 아버님을 대할 때에도 우리 아이들이 용기를 주고 있었다. 그대들이 곁에 있어 선생님에게 힘을 준단다. 더 사랑할 힘을, 더 꿈꿀 수 있는 힘을. 네가 생각나는 날에는 선생님은 그래서 언제나 겨울숲에서도 꽃을 볼 수 있을 거야. 우리 늘 그 자리에서 꽃으로 만나자,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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