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행복과 형평성

안호기 경제부장

박근혜 정부의 국정 비전은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다. 박 대통령은 지난 2월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취임사에서도 행복을 강조했다. 5300여자로 이뤄진 취임사에 등장한 단어 중 ‘행복’은 42회로 ‘국민’(58회)에 이어 두번째로 많았다.

대통령이 행복을 강조한 것은 지금 국민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이명박 정부는 전체 부의 규모를 키우면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기업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세금은 깎아주고, 환율은 높게 해 수출이 잘되도록 했다. 대기업이 돈을 잘 벌면 중소기업과 서민도 잘살 수 있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컵에 물이 넘치면 주변을 적시는 이른바 ‘낙수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대기업은 돈을 더 많이 벌어도 자신의 컵 크기를 키우는 데 열중했다. 물은 넘치지 않았고, 주변은 여전히 메말랐다.

[아침을 열며]국민행복과 형평성

일부만 더 행복해졌고, 많은 사람이 더 불행해졌다고 여겼다. 양극화가 심해지자 경제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거세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은 물론 여당 후보도 경제민주화를 실천하겠다고 강조했다. 헌법 조항이나 경제학자의 어려운 해석을 빌리지 않더라도 경제민주화의 의미는 간단하다. 국민 모두가 일한 만큼 공평하게 잘산다면 그게 경제민주화일 것이다.

당선 이후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의지가 퇴색했다고는 하지만 아예 접은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첫 작품인 국민행복기금에 이어 엊그제 행복주택 건설 계획과 외환위기 당시 연대보증 채무자 구제책을 잇따라 내놨다. 서민의 빚을 탕감해주고, 집 없는 이에게는 싼 비용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니 환영할 일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은 옛날 속담일 뿐이다.

그런데 곳곳에서 불만이 들린다. 행복주택은 당초 계획한 것보다 보증금과 월세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저소득층이나 장애인, 노인 등 소외계층보다는 대학생, 신혼부부 등 젊은이를 우선 입주대상으로 하겠다는 얘기도 나온다. 건설비용이 많이 들어 계획했던 20만가구를 다 짓기도 어렵다고 한다.

행복기금 역시 신청자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건 아니다. 행복기금과 채무조정 협약을 맺지 않은 금융회사에 채무가 있다면 빚을 줄여주는 채무조정을 받을 수 없다. 전체 금융회사의 99%가 협약을 맺었지만 1만1700개 대부업체 중 협약을 체결한 곳은 2%뿐이다. 빚을 빌린 지 오래돼 어디서 빌렸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채무조정 대상이 아니다. 행복기금을 신청하러 갔다가 자격이 안된다는 답변을 듣고 발길을 돌리는 서민이 부지기수다.

외환위기 당시 연대보증을 한 탓에 10년 넘게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던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방안에도 2003년 카드대란 사태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연대보증 채무를 진 사람은 제외했다.

어찌보면 행복은 제로섬 게임과 비슷한 것 같다. 누군가 행복하면 그 이면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한쪽의 행복과 다른쪽의 불행을 더하면 제로(0)가 되는 셈이다. 채무조정 대상이 돼 빚이 줄어들면 새출발을 할 수 있겠지만 신청대상에서 탈락한다면 상대적 박탈감만 더 심해질 것이다. 행복주택도 잔뜩 기대했다가 대상이 안된다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행복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행복은 규모가 정해져 있어 그 안에서 서로 나눠갖는 것이 아니라 그 크기를 키울 수 있다. 행복한 나라 순위가 나올 때마다 상위권 나라로 거론되는 부탄은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 개념을 도입해 국민 전체를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남의 행복을 보면서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회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행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푸념하며 불공평한 현실에 분노하는 것이다. 문제는 형평성이다.

최근 형평성 문제에 가장 민감한 이들은 ‘58년 개띠’다. 1958년생은 전후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나 고등학교 추첨제(1974년)를 처음 겪었다. 대학 재학 때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사회 초년병 시절 민주화(1987년)를 체험했다. 외환위기(1997년) 때는 갓 마흔의 나이에 직장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살아남은 1958년생은 지금 정년연장 기로에 서 있다. 정년을 60세로 한 정년연장법이 국회를 통과해 대기업·공기업 등은 2016년, 300인 미만 중소기업은 2017년부터 적용된다. 현재 정년이 57세 이하인 회사라면 1958년생은 2015년까지 퇴직해야 해 정년연장 혜택을 받지 못한다. 정년이 58세여야만 2016년부터 2년을 더 일할 수 있다. 정년이 58세라도 회사가 300인 미만이라면 2017년부터 법이 시행돼 2016년 퇴직해야 한다. 운이 억세게 나쁜 사례가 나올 수 있으니 형평성 탓만 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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