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박송이 기자

대통령 선거의 승패는 누가 그 시대의 어젠다를 선점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시대적 화두였던 ‘복지’ 어젠다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민주당보다 오른쪽에 위치했던 새누리당이 복지 어젠다를 선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박근혜 후보가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보다 더 과감하게 복지공약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 행보는 ‘원칙이 바로선 자본주의’라는 2009년 스탠퍼드대 연설에서부터 시작됐다. 새누리당 정치인으로서는 과감하게 시대정신인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꿰뚫는 행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권자들은 ‘원칙과 신뢰’라는 수식어로 박근혜 후보의 ‘복지공약’에 손을 들어주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박근혜 후보의 과감한 복지공약은 단순히 ‘선거용’이 아닌, ‘의지’와 ‘실천’으로 읽혔다. 하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박근혜 대통령이 내걸었던 공약은 ‘실체’가 아닌 ‘허구’였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9월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박대통령이 복지공약 후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9월 26일 청와대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박대통령이 복지공약 후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청와대 사진기자단

집권 1년도 안 돼 실체 사라진 ‘20만원’

20만원은 지난 18대 대선에서 기초연금에 대해 유권자들이 믿었던 유일한 숫자다. 숫자는 명징했고, 유권자들은 환호했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에게 월 20만원씩 주겠다고 약속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직전 두 차례 TV토론에서 “모든 어르신”과 “모든 국민”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월 20만원씩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새누리당이 거리 곳곳에 내건 현수막에서도 ‘월 20만원 모두 드리겠습니다’는 약속이 나부꼈다. 하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20만원’이라는 숫자는 실체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실 ‘20만원’이라는 숫자는 애초부터 허구였다. 공약 단계에서부터 ‘20만원’의 실체는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TV토론에서 약속했듯이 65세 이상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씩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은 60조3000억원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국민연금위원회가 추계한 자료를 토대로 2014~2017년까지 전체 노인에게 20만원을 지급할 때 필요한 돈을 계산했다. 총 60조3000억원이다. 이 중 현행 기초노령연금을 유지하는 데 드는 돈은 26조9000억원. 그렇다면 전체 노인에게 20만원을 지급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추가로 필요한 돈은 60조3000억원에서 26조9000억원을 뺀 33조4000억원이다. 여기서 다시 중앙정부가 부담해야 할 돈이 전체 액수의 75%이므로 박근혜 후보가 공약집에 명시했어야 할 공약 이행에 필요한 추가재원은 25조1000억원이 된다. 하지만 오건호 위원장은 당시 박근혜 후보의 공약집은 기초연금 공약 이행을 위해 필요한 추가 재정을 14조7000억원으로 책정해놓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공약집이 10조원이나 부족하게 추가 재정을 책정한 것은 처음부터 기초연금을 공약대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집권 후 말을 바꿔 국민연금과 연동시켜 20만원에서 삭감해 집행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9월 2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국민연금바로세우기국민행동 주최로 열린 ‘박근혜 정부 기초연금 공약파기 규탄 기자회견’ 도중 한 참석자가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대선당시 공약 팻말을 들고 서 있다. /서성일 기자

9월 2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국민연금바로세우기국민행동 주최로 열린 ‘박근혜 정부 기초연금 공약파기 규탄 기자회견’ 도중 한 참석자가 박근혜 대통령의 지난 대선당시 공약 팻말을 들고 서 있다. /서성일 기자

공약집과 인수위 백서의 교묘한 차이

이러한 지적에 대해 새누리당은 말을 바꾼 적은 없다고 반박한다. 국민연금과 연계하겠다는 방침은 공약집에서도 이미 밝혔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공약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새누리당 김현숙 의원과 안종범 의원은 이미 공약집에서부터 ‘국민연금과 연계해서 모든 노인에게 지급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약집과 인수위 백서에는 교묘한 차이가 있다. 공약집에는 ‘현행 기초노령연금과 장애인연금을 기초연금화하고, 국민연금과 통합운영함으로써 사각지대나 재정 불안정이 없는 모든 세대가 행복한 연금제도로 개편’, ‘기초연금 도입 즉시 65세 이상 모든 어르신과 중증장애인에게 현재의 2배 수준으로 인상하여 지급’한다고 밝히고 있다. 안종범 의원과 김현숙 의원의 주장대로 ‘국민연금과 통합운영’은 공약집에 나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문구를 통해 과연 몇 명의 유권자들이 ‘기초연금은 국민연금 가입기간에 따라 20만원이 아니라 삭감된 액수를 수령하게 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국민연금 수급 정도에 따라 기초연금 수령액이 달라진다는 것은 집권 후 발간된 인수위 백서에서나 등장한다. 선거 기간 중 그토록 명쾌했던 ‘20만원’이라는 숫자 대신 인수위 백서에는 복잡한 수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수위 백서는 국민연금 수급자 중 소득 하위 70%는 14만~20만원, 소득 상위 30%는 국민연금 수급자 4만~10만원으로 차등지급하는 방안을 밝히고 있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이 TV토론에 나와 ‘모든 노인에게 월 20만원씩 드리겠다’고 한 약속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집권 전과 후 몇 개월 사이에 공약의 문구가 달라진 것은 유권자들의 착각을 유도하거나, 후퇴를 위해 사전 정지작업을 한 것이라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허구의 숫자에 기댄 ‘증세 없는 복지’

기초연금 ‘20만원’을 비롯해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공약을 떠받들고 있던 재원 마련 방안도 실체가 없는 허구임은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공약을 뒷받침하는 재원 마련 방안은 지난 5월 31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공약가계부에 나와 있다. 증세 없이 ‘지하경제 양성화’ ‘비과세 감면’ 등을 통한 세입 확충이 주요 재원 조달방안이다. 인수위 때 박 대통령은 “지하경제 양성화 등은 조세정의 차원에서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의지를 갖고 정보를 공유하며 노력한다면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공약가계부는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 총 131조4000억원의 추가 재원이 필요하며 세입 확충을 통해 50조7000억원의 재원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27조2000억원을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조달할 계획이다. 집권 5년 동안 27조2000억원 규모의 세수를 더 확충하기 위해서는 연 평균 5조4000억원가량의 추가 세수를 확보해야 한다. 문제는 통상적으로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걷는 세금이 지난 5년간 연평균 2조4000억원에 이른다는 데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로 매년 8조원가량을 거둬야 공약가계부의 계획대로 5조4000억원의 추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올 상반기 국세청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목표치를 얼마만큼 달성했을까.

국세청 관계자에게 지하경제 양성화로 올 상반기 얼마만큼의 세입을 확보했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올 상반기 지하경제 양성화로 확보한 세입 확충의 집계는 물론이거니와 올 한 해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얼마만큼의 세입을 확충할지에 대한 “목표치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국세청 관계자들은 지하경제 양성화로 애초에 목표 세입 금액을 상정하고 여기에 도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처럼 “의지를 가지고”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례로 지하경제의 한 부분인 역외탈세 적발 규모는 해마다 다르다. 2008년에는 역외탈세 적발로 1503억원의 세금을 징수했고, 2010년에는 5109억원, 2011년에는 9637억원을 징수했다. 2011년에 역외탈세 적발이 예년보다 큰 폭으로 늘어난 이유는 이때 규모가 큰 적발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지하경제 적발을 위해) 투입하는 규모와 그에 따른 산출은 비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하경제 양성화로 27조원의 추가 재원을 마련한다는 정부의 재원 조달 방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증세 없는 복지’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약속은 재원 마련 방안도, 목표 복지 수준도 허구의 숫자에 기대어 있었던 셈이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연합 사회정책팀 팀장은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내건 기초연금 방안에 대해 보편적 복지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다. 하지만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책이 안 보였다”면서 “결국 복지를 하려는 의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기초연금을 필두로 박근혜 대통령의 복지공약이 줄줄이 후퇴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지금이라도 허구의 복지가 아닌 실체적 복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공약 실천 미흡’ 직무수행 부정평가 상승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은 “재원문제를 이야기하며 공약 포기에 가까운 발언을 하고 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 조세 및 비과세 감면으로 고소득층 위주로 세제혜택을 준 것만 5년 동안 60조원 가까이 된다. 이것만 원상복귀해도 얼마든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증세를 이야기하지 않고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9월 26일 기초연금 후퇴안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사과를 하며 새로운 약속을 한다. “하지만 이것이 결국 공약의 포기는 아닙니다. 국민과의 약속인 공약을 지켜야 한다는 저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박 대통령은 허구의 숫자를 실체의 숫자로 만들 수 있다. 증세라는 대안만 받아들이면 말이다. 박 대통령은 증세 대신 공약을 버리는 도박을 택했다. 그는 여전히 ‘증세 없는 복지’만 약속하고 있다. 이 새로운 약속은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3.9%라는 내년도 경제성장률과 27조원이라는 지하경제 양성화 세입 확충 방안이라는 허구의 숫자에 또 다시 기대어 있다.

그렇다면 유권자들은 대통령의 새로운 약속을 한 번 더 믿어줄까. 최근 조사된 여론조사 결과는 유권자들의 신뢰가 더 이상 박근혜 대통령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 9월 23일부터 26일까지 한국갤럽이 전국 성인 1208명에게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지,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지 질문했다. 60%는 긍정 평가했고, 29%는 부정 평가했으며, 11%는 의견을 유보했다.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추석 전인 2주 전에 비해 7%포인트 하락했고, 부정 평가는 10%포인트 상승했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부정 평가 비율이 30%에 육박한 것은 인사 및 윤창중 전 대변인 문제로 난항을 겪던 지난 3월과 4월 이후 처음이다. 부정 평가 이유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이 ‘공약 실천 미흡/공약에 대한 입장 바뀜’(25%)이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장기적으로 유권자들이 대통령의 복지공약 후퇴에 대해 부정적인 정치적 평가를 내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기존에는 일부 야권 성향 지지자들까지 박 대통령의 국정에 대해 지지를 보내면서 65%를 넘는 높은 지지율을 보여 왔지만, 복지공약 후퇴로 이러한 고공 지지율에 균열이 갈 것이라는 진단이다. 윤 실장은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국정조사 등 정치적인 사안과 별개인 포지션을 취해 왔기 때문에 이제껏 정치적 사안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이번 복지공약 후퇴 건은 본인이 내걸었던 공약인 만큼 정치적인 평가를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금껏 유권자들 사이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이나 우호적인 기류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던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복지공약 후퇴는 이 기류를 바꿀 만한 폭발력이 충분하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적 평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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