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적 한건주의를 경계한다

신주백 | 연세대 HK 연구교수

며칠 전, 삐걱거렸던 2012년도 한·일관계의 뒷면을 알 수 있는 보도가 있었다. 2011년 12월 한·일 정상회담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틀어진 이후에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막후 노력이 2012년 10월경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양측은 협상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최종적인 합의점에 근접했다. 노다 총리가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낭독하고 주한 일본대사가 이를 피해자들에게 전달한다. 또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민간 기금이 아니라 정부의 특별 예산으로 편성한 인도적 자금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총선 국면에 들어서면서 협상은 중지됐다.

역사 문제는 양국 관계의 아킬레스건이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핵심적인 외교 현안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법이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는 적절한 해법이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국가 간의 현안을 구체적인 외교 교섭을 통해 마무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되새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론]외교적 한건주의를 경계한다

2011년 12월의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는 양측이 합의한 의제가 아니었다. 정상회담은 냉랭하게 끝났지만, 양국은 일본 측 외교 라인의 제안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실무 차원의 움직임이 중단되지 않은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는 도중인 6월에 제목에서만 ‘군사’를 쏙 뺀 한·일정보보호협정 체결이 밀실에서 추진되다 한국 측 여론의 강한 반발로 중단됐다. 이어 8월 초에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위안부’ 문제에 관한 협의도 중지됐다. 그 직후에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친일의 이미지가 강했던 그가, 왜 하필 그 시점에서, 그리고 어떤 메시지를 국민과 일본, 세계에 던지고자 방문했는지, 아무도 합리적인 해석을 하지 못했다. 그의 방문은 독도를 둘러싼 한·일관계가 역사 문제임을 스스로 망각한 행위였다. 전략도 없었고, 지혜도 없었던 한건주의였다.

이후 한·일관계는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갔지만, 양측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협상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측근이 나선 덕택인지 협상이 9부 능선에까지 다다랐다. 막판 협상에 참가했던 관계자는 과거사를 둘러싸고 한·일 간의 대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할 정도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는 여론을 수렴해 합의점을 도출해 가는 과정을 이때도 생략했다. 지혜를 짜내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만, 전략이 없는 한건주의 행동을 여전히 되풀이했다.

2013년에도 정상외교는 중단돼 있다. 노다 정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경화한 아베 정권이 등장하면서 한·일관계는 더 막혀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노다의 편지’ 수준에서 풀어가기조차 버거울 정도다.

지금의 한·일관계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경제를 추구하고, 인권과 평화를 공유할 수 있는 한국과 일본은, 함께하지 못할 부분보다 같이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통 영역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역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의 제한적인 마찰음을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역사 문제를 한·일관계, 또는 외교 문제로만 취급해서는 안된다. 국제무대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측의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해왔지만, 이제는 그것을 껴안으면서 넘을 수 있는 미래의 무엇까지도 제시해야 한다. 전시작전통제권을 다시 연기하는 문제가 미·일안전보장협의위원회의 결정에 영향을 줌으로써,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관계를 풀어가기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하지 못한 우리의 소견을 반성하고, 익숙한 양자 관계를 넘어 다자간 공존의 가치와 전략으로 바꾸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문제해결 지향적인 미래가치를 제시하고 그것을 시스템화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것을 한·일 간의 역사 문제로만 한정한다면, 피해자의 인권을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할 것인가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측면을 조화롭게 푸는 여정이 힘들겠지만, 이제라도 사회적 합의를 모아갈 필요가 있다. ‘원칙’을 고수한다는 현 정부가 해야 할 중대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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