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라는 이름의 ‘여행지’읽음

김민서 |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닉은 오랫동안 살던 미국 중서부를 떠나 동부로 이사를 온다. 낯선 보금자리에서 쓸쓸함을 느끼던 그에게 어느 날 누군가가 길을 묻는다. 이방인에게 길을 가르쳐준 순간 닉은 더 이상 쓸쓸함을 느끼지 않게 된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닉은 누군가에게 길을 가르쳐줌으로써 그 동네의 시민권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나도 그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학연수 차 미국에 잠깐 머물던 시절, 나는 반년이 다 되도록 그 커다랗고 낯선 땅이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고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관광객이 나에게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그 관광객에게 능숙하게 길을 알려주던 순간, 나는 이상할 정도로 뿌듯하고 스스로가 기특했다. 별거 아닌 에피소드 하나로 타국에 애정을 갖게 된 것이다.

[별별시선]우리동네라는 이름의 ‘여행지’

그렇다면 결혼 후 새 보금자리를 꾸리게 된 낯선 동네에서 시민권을 부여받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나는, 단골 마트의 캐셔 아주머니가 내 포인트카드 번호를 외우신 그 순간이다. ‘이 아가씨가 오늘도 장을 보러 왔군’ 하는 표정으로 내 포인트 번호를 미리 누르는 캐셔 아주머니를 보는 순간, 나는 비로소 이 낯선 동네의 진정한 주민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의 경우도 비슷하다. 남편은 경비 아저씨가 자신을 알아봐주고 인사를 건넨 순간 새로운 거주지로 옮겨 왔다는 실감이 났다고 했다. ‘이 동네’에 살았던 누군가로부터 ‘우리 동네’ 사람으로 인식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낯선 터전에 정을 붙이고 애정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나의 동네를 인식하고 나면 새로운 이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신혼집에 입주한 첫 주, 나는 집 앞의 떡집에서 시루떡을 맞췄다. 신혼집은 복도식 아파트고 우리 층에는 네 명의 이웃이 산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한 집에도 떡을 돌리지 못했다. 저녁시간의 이웃집은 모두 비어있었다. 어쩌면 낯선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요즘은 워낙 흉흉한 사건들이 많은 세상이니까. 냉동고에서 차갑게 굳어버린 시루떡을 보면서 괜히 마음이 허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옆집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었고 그녀가 둘째를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면 태아의 안부를 묻거나 순산을 빌어드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아주머니는 둘째를 무사히 낳으셨다. 요즘 옆집에서는 간간이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갓난아이를 안고 복도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이웃과 마주할 때면 나는 가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인생이 겹쳐져 있다는 그런 기분이다. 시루떡을 나누지도, 아이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이웃의 인생을 지켜보고 그들의 사정들을 알게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인생에 낯선 이웃이 스며드는 것이다.

새로운 이웃들까지 인식하게 되면 본격적으로 우리 동네의 안녕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게 된다. 싱글 시절엔 주민 안내 방송이 나오면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미리 알고 대비하는 것은 부모님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파트 안내판에 붙은 공지는 모두 꼼꼼히 체크하고 내 일상반경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직접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는다.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진 것이다. 싱글 시절의 내가 수동적으로 보호를 받았다면 유부녀가 된 지금은 능동적으로 내게 소중한 것들을 보호하고 지킨다. ‘주민의 딸’이 아닌 ‘주민’으로서의 변화다. 이와 같은 과정들이 새로 이사 온 신혼부부가 동네 주민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다.

대부분의 신혼부부가 그렇듯 우리도 전세민이다. 2년 후엔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는 집을 매매하지 않는 세대다. 잠시 머무를지도 모르는 동네에 애정을 쏟고 정을 붙이는 시간들이, 가끔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남편에게 ‘내 집을 갖지 않는 세대에게 우리 동네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하고 물었다. 남편은 여행지라고 대답했다. 고향처럼 돌아오고 싶은 회귀본능을 끌어내진 못해도, 언젠가 떠날지도 모르는 동네이기에 더 능동적으로 동네를 탐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묘하게 수긍이 갔다.

우리는 몇 년에 한 번 꼴로 새로운 단골 마트를 만들고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번번한 왕래 한 번 없는 이웃과 느린 정을 쌓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분명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나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훗날 추억할 ‘우리 동네’가 늘어난다는 것은 꽤 낭만적인 일이다. 기억에 남는 데이트 장소를 지나칠 때마다 그 날의 감정들을 되짚어보는 것처럼, 부부의 인생이 담긴 ‘우리만의 동네’ 지도를 만들어나가는 것도, 현 시대의 부부들이 개척해볼 만한 새로운 낭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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