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연탄 파동과 에너지 정책

권보드래 | 고려대 교수

강압적 ‘주유종탄’ 정책에 검게 탄 서민의 가슴

한국에서 연탄의 전성기는 박정희 통치기와 대략 맞먹는다. 연탄이 공장 및 산업 시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일반 가정에서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연료의 주종은 신탄이었다. 1960년 당시만 해도 에너지 소비 중 나무와 숯의 비중이 63%를 웃돌았던 반면 석탄의 역할은 27%에 불과했다. 석탄 소비가 본격화하고,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석탄을 주원료로 하여 원주형으로 압축 성형한 구멍탄’, 즉 연탄이 가정용 연료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

아마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연탄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찬바람이 돌면 연탄부터 들이던 기억, 리어카나 지게로 나르던 기억, 연탄 가느라 한밤중에 오들거리며 방을 빠져나가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 겨울철이면 매일이다시피 연탄가스 중독 기사가 떴고 1년에도 여러 번 탄광 매몰 뉴스가 전해졌으며 박정희가 죽고 몇 달 후에는 사북에서 대규모 쟁의 소식이 들렸지만, 기름보일러나 도시가스 난방이 주종이 돼 버린 지금 연탄은 거의 ‘그때 그 시절’의 감미로운 향취마저 띠고 있다.

시흥 주부들 수백명 ‘연탄집게 시위’ 연탄파동이 일어난 1974년 10월16일 경기도 시흥 주부들이 대도시 위주의 연탄 공급에 항의하면서 연탄집게를 들고나와 시흥대교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시흥 주부들 수백명 ‘연탄집게 시위’ 연탄파동이 일어난 1974년 10월16일 경기도 시흥 주부들이 대도시 위주의 연탄 공급에 항의하면서 연탄집게를 들고나와 시흥대교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증기기관 발명 이후 한때 석탄은 국가의 부강을 좌우하는 열쇠였다. 지금도 화력발전의 상당 부분을 수입 유연탄에 의존하고 있는 처지임에도 한국에서 석탄이나 연탄은 이미 지나간 시절의 화제처럼 보인다. 박정희 시절부터 그랬다. 1960년대 중반까지 박정희 정권의 주축 에너지 정책은 매장량이 풍부한 국내 무연탄을 개발하는 것이었으나 울산 정유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그 축은 유류로 대체하는 쪽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1966년 연탄파동을 겪은 후에는 더욱 그랬다.

■1966년 ‘가격 통제’로 1차 파동

물가인상률이 경제성장률만큼이나 가파르던 당시, 정부에서는 물가인상률을 8%선에서 동결시킨다는 방침하에 먼저 연탄가격 통제에 나섰다. 시중가격이 장당 15원대였음에도 8원이라는 고시가격을 책정하고 판매상을 압박하는 밀어붙이기식 통제였다. 비현실적 고시가격은 당연히 공급 위축을 불러왔다. 산지에 무연탄이 쌓여 있는데도 실제 소비자들은 연탄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굴러야 했다. 암거래가 성행해 외곽에서는 연탄가격이 고시가의 세 배 훨씬 넘게 치솟았다. 시장주의자들은 “경제질서를 무시한 통제정책이 부작용만 양산했다”며 혀를 찼다.

때마침 정유시설을 마련해 국내 석유가격을 낮출 수 있게 됐다. 정부는 연료를 전적으로 유류로 대체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국영기업과 대기업에 유류로의 대체를 의무화하다시피 했고 다방이나 접객업소에까지 기름 사용을 강권했다. 이른바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의 전환이었다. 산업화·도시화의 여파로 매년 10%씩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는 형편이라 에너지 정책의 전환이 시급하긴 했다.

정부에서는 국내 무연탄만으로는 에너지 수요의 3분의 1밖에 감당하지 못할 것이고 그나마 30~40년이면 고갈되고 말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반면 중동 산유국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석유는 싸고 무진장한 자원처럼 보였다.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주유종탄’ 정책은 그대로 추진되었다. 1966년 총 16%에 불과했던 총 에너지 공급 대비 석유의 비율은 1972년 52%로 급상승한다.

그리고 한동안 “정유공장을 여기저기 짓고 석유를 흔하게 만들”었다. 석유공사 외에 호남정유와 경인에너지가 설립되면서 과다경쟁으로 석유값이 더 내려가기도 했다. 연탄은 아직 신식 연료인 데다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면서 연탄아궁이가 겨우 농촌에도 보급되기 시작한 단계였지만, ‘주유종탄’ 정책의 파급 효과는 빨랐다. 도시의 살 만한 가구에서는 벌써 연탄아궁이를 없애고 기름보일러를 들이기 시작했다. 1974년 두 번째 연탄파동이 닥친 것은 이렇듯 유류로의 대체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던 무렵이다.

한국이 ‘1973년의 제1차 오일쇼크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계속했던 것은 사실이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 당시 승승장구하던 한국이 벽에 부딪힌 것은 그보다 앞선 1968~1971년 무렵, 그러니까 박정희가 압도적 지지로 재선에 성공한 직후였고, 1973~1974년은 이미 유신체제에 진입한 한국이 중공업화 정책으로 선회, 경기침체에 공격적으로 대응하던 즈음이었다. 그러나 오일쇼크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4년의 연탄파동은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오일쇼크가 서민들의 삶에 어떤 얼룩을 남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현실적 가격통제 때문에 시작됐던 1966년의 연탄파동과는 달리 1974년의 연탄파동은 실제 공급량 부족이 큰 원인이었다. 조짐은 1년 전부터 보였다. 오일쇼크의 여파로 기름값이 오르기 시작하자 정부에서는 연탄 사용을 독려하는 한편 제철에 앞서 미리 연탄을 사다 말려놓으면 열효율이 한결 높다고 선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파동을 겪은 바 있는 서민들은 1974년에는 여름이 닥치기도 전에 연탄을 사 나르기 시작했다. 유가 인상을 겁내 기름보일러를 다시 연탄아궁이로 바꾸는 집마저 있었다. 몇 년간의 주유종탄 정책으로 채탄량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상황이어서 7월에 벌써 연탄이 바닥날 조짐을 보였다.

■오일쇼크 여파에 연탄 품귀…1974년 2차 파동

정부에서는 연탄값을 올리고 탄을 소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장당 22원이었던 가격을 30원으로 대폭 인상하는 한편 중량은 0.5㎏쯤 줄였다. 그것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7월20일에는 일종의 배급제를 고시했다. 전국 12개 도시를 대상으로 가구별 연탄카드를 발급, 1회당 구매량을 제한한 것이다. 그 밖에 요식업소나 접객업소 등에서의 연탄 사용을 금지하고 각급 학교 겨울방학을 연장하는 등의 방책도 내놓았다. 오일쇼크 와중이었음에도 기름값을 10% 이상 인하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겨울이 깊어가도록 사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특히 연탄카드제에서 소외된 지역은 문제가 더 심각했다. 새마을운동으로 연탄아궁이 설치가 독려된 데다 산림보호법 개정으로 많은 지역에서 낙엽 채취마저 금지된 상황이었다. 마을별로 연료 공동채취장을 지정했지만 땔감이 모자랐고 연탄은 더더구나 부족했다. 연탄 운반선이 끊긴 섬지역에서는 뭍으로 연료를 구하러 나서야 했다. 도시에서 30원인 연탄이 울릉도에서는 장당 80원까지도 갔다고 한다. ‘새마을’에서, 모처럼 마련한 연탄아궁이를 지피지 못해 “시부모와 아들 내외가 한방에서” 자야 하는 형편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연탄아궁이를 땔감아궁이로 환원시키라는 시책마저 하달되었다. “1년에 아궁이를 세 번이나 뜯어고쳤다”는 하소연은 아마 사실 그대로였을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서울이라고 편안치는 않았던 것 같다. 연탄은 여전히 부족했으며, 한번에 수백장을 들이는 대신 찔끔찔끔 수십장을 들일 때마다 집 안은 검댕투성이가 되곤 했고, 탄이 작아져 아궁이 간수해야 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품귀 현상의 당연한 여파로 저질 연탄이 많아져 사정은 더 고약했다. 1966년 파동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공급 자체에 급급했던 정부는 저질탄 문제를 애써 외면했다. 불량탄이 적발되었을 때도 번번이 경고 조치만으로 넘어가곤 했다. 덜 마르고 작고 열효율 낮은 불량 연탄 때문에 고생하던 누군가를 기억한다면, 그건 그 배후에 똬리를 틀고 있던 에너지 정책, 산업정책, 새마을운동 등을 한꺼번에 환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1966년과 1974년의 연탄파동에서 집단적 항의는 거의 없었다. 산발적 불평불만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1974년 10월 경기도 시흥에서 있었던 주부들의 항의가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집단행동으로는 유일하다. 당시 안양시에 편입돼 있던 시흥군은 시흥대교를 사이에 두고 서울과 접한 지역이었다. 다같이 힘들었던 연탄파동 중에도 지역별 불균형은 심각해 농어촌이나 도서지역 외에 대도시 밖의 거주자도 힘든 고초를 겪어내야 했다. 대도시는 연탄 우선 확보에 집중하는 한편 밀반출을 엄격히 금지했다. 시흥대교에도 서울시 연탄 밀반출 단속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양시내 연탄값이 장당 100원까지 치솟았다는 그해 가을, 주부들은 더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모자라는 것이 아닌 고르지 않은 것

10월16일, 연탄을 가득 실은 트럭이 시흥대교에 다다른 순간 인근 주부들이 모여들어 트럭을 둘러쌌다.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 처음엔 웅성거리며 항의하던 것이 순식간에 숫자가 300~400명으로 불고, 그중 상당수는 연탄집게를 들고 나와 트럭에서 연탄을 내리려 했던 것 같다. 정치·사회적 변동에서 가장 먼 자리에 있는 주부, 그야말로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 수백명 떼를 짓고 연탄집게를 흔들어대며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은 적잖이 충격을 준 모양이다. 사태는 더 번지지 않은 채 일단락됐고 그 충격 자체만은 몇몇 조각글을 통해 전해진다. 그때 어느 신문에서 꼬집었다시피, “모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고르지 않은 것이 바로 문제”였다.

두 차례 파동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별반 바뀌지 않은 듯하다. 에너지원의 석유의존도는 1978년 63%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상승했다. 1970년대 말 국제유가가 가파르게 상승한 후에야 석유 의존 일변도의 정책이 수정되기 시작했다. 천연가스를 도입하는 한편 원자력과 유연탄을 이용한 발전시설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다. 석유의존도는 1987년 44%로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개발과 성장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에너지 정책의 체질 자체가 바뀌지는 않았다.

‘주유종탄’ 시절에서는 멀어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박정희 정권 말기에 마련된 에너지 정책의 궤도 위에서 살고 있다. 유보조건을 달지 않을 수 없겠지만 박정희 시절 한국의 ‘발전’은 과연 놀라운 것이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그 막다른 길에 처해 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와 다른 길을 어떻게 찾아나갈 수 있을까. 어떤 길도 쉽지 않고 어느 부문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어떻게 뒤에 태어난 자, 배우고 달라져야 할 자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을까. 박정희에 대한 평가 자체는 차라리 그 뒤의 몫이었으면 싶다. 2013년 현재 연탄 한 장 값은 500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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