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아들의 군 의문사, 그 진실을 왜 가족이 밝혀야 합니까

조형국 기자

1년 만에 ‘자살’서 ‘순직’… 김 일병 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싸움

김경준 교수(54)는 최근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 대민이(22·가명)와 밖에서 식사를 했다. “그래, 군생활은 할 만하냐?” 최근 군 내에서 이어진 사건·사고와 1년 전의 상처가 떠올랐다. 걱정이 앞선 김 교수의 아내는 질문을 쏟아낸다. “아픈 데는 없고?” “누가 괴롭히진 않아?” 아들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전역 두 달 앞둔 말년 병장을 누가 건드려요.”

음식이 나오자 수저를 꺼내던 대민이가 손을 주춤하자 엄마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대민이는 꺼내놓은 숟가락 한 벌을 도로 수저통에 넣었다. 아내와 대민이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김 교수는 알고 있다. 김 교수는 지난해 사망한 큰아들 지훈이(당시 22세)를 떠올렸다.

지난해 7월1일 김지훈 일병은 경기 성남 제15비행단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휘계통이 아닌 간부가 보고절차나 규정도 지키지 않고 얼차려를 시킨 직후였다.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며 군의관 상담까지 신청한 상태였지만 얼차려는 계속됐다. 7개월이 넘도록 김 교수는 아들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스스로 목을 맸다는 것, 죽기 전에 남긴 6쪽 메모에 부모에게 전하는 말이 단 한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은 1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친구 같은 아들이었기에 더 사무친다. 김 교수는 지금도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지난 19일 경기 분당구 김경준 교수 집. 고 김지훈 일병의 사진 옆에 촛불을 켜놓았다. 이 사진은 김지훈 일병이 군대 가기 보름 전쯤 아버지와 단둘이 일본 여행 갔을 때 아버지 김경준씨가 휴대전화로 찍은 것이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지난 19일 경기 분당구 김경준 교수 집. 고 김지훈 일병의 사진 옆에 촛불을 켜놓았다. 이 사진은 김지훈 일병이 군대 가기 보름 전쯤 아버지와 단둘이 일본 여행 갔을 때 아버지 김경준씨가 휴대전화로 찍은 것이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 병리적 성격에 자살했다더니 얼차려 직후 숨진 것 파헤쳐
이제서야 순직 처리 됐지만 가해자 처벌은 여전히 제자리

지훈이는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늘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턱을 내밀면서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교수 부부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먼저 떠난 아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작은아들이 휴가 나온 기분 좋은 날에 분위기를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옆자리가 휑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김 교수는 아들의 빈자리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지훈이가 세상을 떠날 때 대민이는 이등병이었다. 형이 죽고 동생은 많이 아팠다. 30일 가까이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대민이는 형 얘길 먼저 꺼내지 않는다. 김 교수가 말했다. “나와 아내는 쓰러질 때까지 울 수라도 있었죠. 대민인 군 부대 안에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을 겁니다. 형을 제대로 보낼 수 있었을지….”

김 교수는 지훈이 물건을 모두 태우자고 아내를 설득했다. 1년 가까이 지훈이가 쓰던 방문도 열어놓지 못했다. 사람 손을 타지 않는 빈방엔 아무도 쓰지 않는 책상, 누구도 눕지 않는 침대만 덩그러니 놓였다. 아내는 김 교수 몰래 지훈이 물건을 남겨뒀다. 지훈이가 자주 입던 옷 한 벌, 지훈이의 얼굴이 닿았던 휴대전화, 지훈이 손길이 닿은 학생증과 사진들…. 지훈이 엄마는 옷장 깊숙한 곳과 서랍 한 구석, 창고 후미진 곳에 숨겨둔 아들 물건을 가끔 꺼내서 봤다.

[세상 속으로]아들의 군 의문사, 그 진실을 왜 가족이 밝혀야 합니까

‘공군 고 김지훈 일병 사망사건’. 김 교수는 아들의 죽음을 기록한 문서 제목을 직접 지었다. 밤을 새우며 수백장의 자료를 정리할 때보다 아들의 이름 앞에 ‘고(故)’자를 넣을 때 김 교수는 “괴롭고 힘들었다”고 했다. 아들의 사망 직후 군은 성의 있는 태도를 보였다. 군은 김 교수에게 “희생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순직처리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당시 부대 책임자로 있던 허모 단장은 지훈이 장례식장에서 “전 자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훈이 명예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 믿고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올해 1월 군은 ‘일반사망’ 판정을 내리고 위로금 600만원을 지급했다. 김 교수는 “군 입대 전부터 있었던 병리적 성격이 가장 큰 요인”이라는 군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후 국방부와 공군본부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군은 수사결과를 공개하지 않았다. 김 교수는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수사결과를 받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사고 9개월 뒤에야 알았다. 수백장의 수사기록을 토대로 자료를 정리했다. 군 수사가 엉성한 부분은 한두 곳이 아니었다. 지휘계통이 아닌 간부가 보고절차 없이 얼차려를 시킨 직후 아들이 숨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군의관 소견에 반영된 아들의 우울증 증세는 예비군 훈련차 부대를 찾은 민간인 면담에서 나온 얘기였다. 아들의 죽음 이후 얼차려를 지시한 ㄱ중위는 공군 제35비행전대로 보직이동했고, 당시 지휘관인 허 단장은 소장으로 승진했다.

김 교수는 아들의 죽음을 파헤친 과정을 꼼꼼히 적었다. 군은 말을 바꾸곤 했다. 누굴 언제 만나 무슨 얘길 했는지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했다. 지난 3월20일 국방부에 처음 정보공개를 신청한 날부터 지난 5월23일 공군참모총장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날까지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각 국가기관의 벽에 부딪치기 일쑤였다. 국방부는 “공군본부 조사 결과가 나와야 한다”며 책임을 미뤘고, 국가인권위는 석 달 넘게 아무 답이 없었다. 김 교수가 진정서에 “(아들 죽음 앞에 넋 놓고 있던) 내가 죄인이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쓴 것을 두고 조사관은 “부관(ㄱ중위)과 단장(허 준장), 그리고 보내신 아버님을 처벌해 달라는 거지요”라고 물었다.

김 교수는 “자식 잃은 부모를 상대로 각 부처가 역할을 나누고 일을 떠넘겼다”고 했다. “그건 안됩니다”란 한마디에 절망하고, “힘내십시오, 아버님” 한마디에 눈물을 쏟는 날들이 이어졌다.

1년 넘는 싸움 끝에 지난 14일 김 교수는 아들의 순직 통보를 받았다. 군은 “지속적인 질책성 업무지도와 단장실 무장구보 등으로 정신적 압박감과 심리적 부담이 있었다”며 순직을 결정했다. 그날 김 교수는 “국토 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공군의 일원으로 성실히 근무 중 순직하신 고 김지훈님의 명복을 빌며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라 적힌 순직 안내문을 받았다. 그날 김 교수는 사진 속 지훈이가 “아버지, 잘하셨어요. 역시 우리 아버지야”라며 웃는 듯했다. 김 교수는 “이제 시작이니, 더 열심히 할게”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난한 싸움을 두고 “대학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의 양해가 없인 싸움 자체가 불가능했다. 일반 직장을 가진 부모라면 직장을 그만두고 전념해야 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님을 처벌해 달라는 거지요”라며 이죽거린 군은 정작 처벌해 달라던 지휘관은 형사입건도 하지 않았다. 순직 결정을 발표한 뒤 공군본부는 허 전 단장의 징계를 검토하는 차원에서 그쳤다. 김 교수 부부는 허 전 단장에 대해 “가혹행위를 묵인하고 사건을 축소·은폐한 혐의로 처벌을 원한다”는 고소장을 제출했으나 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Today`s HOT
파리 뇌 연구소 앞 동물실험 반대 시위 앤잭데이 행진하는 호주 노병들 기마경찰과 대치한 택사스대 학생들 케냐 나이로비 폭우로 홍수
황폐해진 칸 유니스 최정, 통산 468호 홈런 신기록!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9주년
개전 200일, 침묵시위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