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된 페미니스트

“온라인서 페미니스트라 밝히면 욕설만 되돌아와”

박은하 기자

20대 여성들의 체험담

▲ 중학교 때 처음 들은 단어
“걔 페미니스트래, 짜증나” 남학생이 흉보듯 내뱉은 말

▲ 고교 때 가입한 여성 커뮤니티
“여자 연예인 광대 튀어나와” 인터넷 여성 혐오 처음 느껴

▲ 대입 준비 위한 온라인 카페
“여대 가지 마라 개념 없어진다” 논쟁글 여성 작성자에 집중공격

▲ 대학 입학 후
“분위기 망친다” 남자들 교육 반대 여성학 강좌 등 극소수만 경험

“걔, 페미니스트래. 짜증나.”

대학생 윤수정씨(25·가명)는 훗날 자신의 정체성이 된 ‘페·미·니·스·트’라는 다섯 글자를 중학교 2학년 시절 교실에서 처음 들었다. 당시 남학생들은 ‘나대기 좋아하고 잘난 척 심한 여자’라는 뜻으로 이 말을 썼다. 윤씨는 고등학생 때 페미니스트에 대한 신문 칼럼을 읽으며 오해였음을 알게 됐다. 자신이 어쩌면 페미니스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마음속에 봉인했다. 양성평등에 관심이 있었지만 사랑받고 싶은 여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봉인을 푸는 데는 6년이 걸렸다.

■ 여성 커뮤니티서도 여성 혐오, 그래도…

윤씨가 ‘인터넷 여성 혐오’를 처음 느낀 곳은 일간베스트 저장소 등 ‘남초’ 커뮤니티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표적 10대 여성 친목 커뮤니티인 ㄱ카페였다. 2003년 ‘얼짱카페’로 출발한 이 카페는 현재 회원 수 150만명으로 연예인, 화장, 성형 정보뿐 아니라 사교육, 진학 정보 공유까지 이뤄진다. 윤씨는 고3 때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가입했다. 같은 반 친구 80%가 이 카페 회원이었다. “한참 예뻐지는 방법을 알고 싶을 때잖아요. 익명인 데다 20대 언니들이 조언해준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엄마는 연애하는 줄도 몰랐어요.”

‘25살 언니가 조언한다’는 글은 이랬다. “남자는 애 아니면 개다. 사랑 없어도 섹스할 수 있다. 함부로 몸 대주지 마라. 안 그러면 걸레 된다.” 언니들의 조언은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몸 대주다’ ‘걸레’ 이런 표현이 좀 충격적이었지만, 처음에는 옳다고 믿게 돼요. 19살에게 25살은 엄청 어른이잖아요.”

여성 연예인 사진과 정보가 꾸준히 올라왔고 ‘턱을 수술한 것 같다’ ‘코가 부자연스럽다’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등 외모에 대한 평가와 댓글이 잇따랐다.

“‘소녀시대’ 멤버 9명 진짜 다 예쁘잖아요. 그래도 흠 잡으려 하면 다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으면서도, 내심 ‘저렇게 예쁜 사람도 까이는데, 나는?’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바로 성형정보 찾아봐요. 수지가 다이어트 한다는데, 내가 뭐라고 안 해요?”

커뮤니티 활동은 재밌으면서도 좀 비참했다.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여자인데 여자 연예인들에게 너무 엄격해지지 말자”는 글도 많았다. “프로라면 견뎌야 한다”는 반박 댓글도 달렸다. “제 또래는 ‘연예인은 상품이니까 소비자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하는 데 익숙해진 것 같아요.”

1년 남짓 활동 끝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여성 커뮤니티 바깥은 더 노골적인 혐오와 편견의 바다였다. 입시준비를 위해 가입한 수능 관련 카페와 커뮤니티에는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거나 노골적인 혐오 표현은 드물었다. 하지만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고도 성폭행으로 몰아붙이는 꽃뱀들이 많다” “여자들 성추행 도와주면 나몰라라 도망가니까 절대 도와주지 마라” 등 편견과 적대적인 표현이 많았다. 사치스러운 여성을 소재로 한 풍자만화 등은 쉽게 볼 수 있었다. 이화여대는 단골로 비판받았다. “친일대학” “여동생 이대 보내지 마라. 개념 없어진다”는 등의 글이 수시로 올라왔다. 각종 스포츠·만화 등 취미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였다. 논쟁이 붙었다가 글쓴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거나 종종 신상이 털리곤 했다. 동의하지 않아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사촌오빠가 ‘이대는 가지 마’라고 했어요. ‘오빠, 이대생 친구 한 명이라도 있어?’라고 물어보니 없대요. IS(이슬람국가)에 간 김군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고정관념이 형성돼요. 일베를 하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이미 온라인 공간 자체가 그런 걸요. 달라질 수 있을까요?” 윤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윤씨는 다시 여성 커뮤니티에 되돌아갔다. 최소한 ‘성 유린 댓글’은 보지 않을 수 있다. 임신, 낙태, 취업 시 외모차별 등에 대한 고민에 따뜻한 댓글이 달리며 위로를 나눌 수 있었다. 단, 토론은 금기였다. “남성들의 여성 혐오에 맞서 똑같이 모욕 표현을 쓴 남성 혐오도 있어요. 제대로 토론하는 게 어려워요. 결국 여성에 관한 이슈가 나와도 일방적으로 욕하면서 끝내거나, ‘외모차별’에 상처받으면서도 ‘성형정보’를 공유하는 결론으로 끝나요.”

윤씨는 3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페미니즘’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동기들과 페미니즘 소모임 등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는 어려웠다. “여성학 강좌나 학회 소모임 등은 소수만 경험할 수 있다. 대다수는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통해 페미니스트를 접한다”고 말했다.

■ 대학에서 사라진 여성주의 학회·동아리

대학에서도 ‘해방구’를 찾기 힘들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숱하게 생겼던 학내 여성주의 학회나 동아리, 언론 등이 상당수 사라졌다. 학내 커뮤니티 게시판은 입시 게시판을 답습했고, 과 동기 카카오톡방은 여성 커뮤니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려대를 졸업한 김지은씨(27)는 2학년 때 여성학 교양수업에서 ‘사이버 공간의 여성 혐오’에 대해 발표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ROTC 제복을 입은 학생이 냉소적 목소리로 “여성 혐오? 그런 게 있어요?”라고 묻자 당황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김씨는 “증거를 들어 발표를 했는데 완전히 부정당하니 당혹스러웠다. 10명 이하 비인기 강좌라 절대평가가 적용되고 단지 그것 때문에 듣는 사람도 많았다”고 전했다.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붙었을 때 고려대 게시판에는 대자보를 붙인 여성 학생회장을 ‘자궁떨리노’라는 이름으로 모욕하는 글이 올라왔다. 대자보 내용을 반박한 게 아니라 성적 모욕으로 공격한 것이었다.

지난해 서울대 가을축제 게임대회에서는 삼일한(‘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이라는 이름의 팀이 나타났다. 여학생들을 ‘위안부’에 비유하고 가슴 크기 등을 언급하는 등 최근 벌어진 국민대 카카오톡 강간 모의 사건은 학생회장 출신들이 주도했다. 여성 혐오와 조롱은 어디에나 있었다.

지난해 서울대를 졸업한 박현정씨(26·가명)는 예외적인 경우다. 박씨는 대학시절 내내 ‘페미니스트’로 살 수 있었다. 3학년 때는 여성주의(페미니즘) 학회장도 맡았다. 학회 모임에는 4~5명가량만 참여했지만 때때로 복학한 선배들이 찾아와 경험을 전하며 응원했다. 박씨는 “2학년 때 새내기새로배움터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자고 하니 동기들이 ‘분위기 망친다’고 반대했다. ‘러브샷 강요’ ‘껴안는 게임’ 등 예방 교육 없었을 때 벌어진 과거 사례를 들어 설득하니 납득했다. 하지만 ‘성폭력에는 반대하지만 페미니즘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박씨는 “중·고등학생 때는 성차별보다 성적 차별이 더 심하니까 성차별을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모습도 있는 것 같다”고도 전했다.

■ 미디어 통해 학습되는 여성 혐오

소년들만 페미니스트를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소녀들 역시 10대 초반부터 미디어 경험을 통해 위축과 검열, 혐오를 학습한다. 위축과 혐오를 넘어설 교육을 받아볼 기회는 거의 없다. 세계 여성의 날을 이틀 앞두고 취재에 응한 여성들이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남자친구와 데이트 비용 반반씩 낸다. 한국 여성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글을 일부러 써야 공격받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한국 여자들은…’ 하며 모욕에 시달리죠. 온라인 공간에서 여성은 ‘김치녀’ 아니면 ‘나빼썅’(나 빼고 썅년·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편견에 동조해 개념 있는 척하는 여성)뿐이에요. 스스로에 대해 긍정적 인식을 하기 어렵죠. 초등학생 때부터 화장하고 외모 가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됐고요. ‘나는 페미니스트’ 선언은 온라인에서 상대방을 반(反)페미니스트로 몰아 공격하는 용도가 되기도 했어요. 여성들 스스로를 존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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